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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곡기념관 2층에 그림으로 그려놓은 율곡의 일대기
ⓒ 이승철
조선 중기 유학계에서 영남학파의 거두 퇴계 이황과는 달리, 문제 해결을 중시하는 현실참여적인 실천적 학문으로 성리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율곡 이이,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을 주도한 율곡의 묘소와 그를 모신 자운서원을 찾은 것은 가을이 깊어가던 지난 9월 25일이었다.

우리들이 탄 승용차는 파주시 법원읍 사거리에서 약 100여 미터 문산 방면으로 진행하다가 오른쪽 길로 진입하였다. 법원여중을 지나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니 오른편에 율곡연수원이 나타난다. 그러나 연수원은 경기도에서 운영하는 것이었고 조금 더 내려가자 그 아래 자운서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법 넓은 주차장은 텅 빈 모습이다. 서원의 경내로 들어가는 자운문을 들어서니 왼편에 매표소가 자리 잡고 있다. 입장료는 1인당 천 원씩이었다. 왼편 언덕 위의 신도비를 둘러보고 기념관으로 들어갔다. 우리 일행을 뒤따라온 문화해설사가 안내를 자청한다.

"이곳에는 이 기념관 외에도 신도비와 서원, 그리고 율곡 선생과 부친, 그리고 모친인 신사임당 등 이이선생의 가족들 대부분의 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문화해설사가 우선 이 자운서원의 대략을 설명 하였다.

"아니 율곡 선생과 신사임당의 유적들은 강릉에 다 있는 줄 알았는데 이곳에 있다고요?" 일행들 대부분이 놀라는 표정이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하면 우선 떠오르는 곳이 강릉의 오죽헌이었기 때문이다.

▲ 율곡이이의 신도비, 이항복이 글을 짓고 신익성이 썼다고 한다
ⓒ 이승철

▲ 율곡기념관 입구
ⓒ 이승철
"율곡 선생의 부친인 이원수의 고향이 바로 이곳입니다. 강릉은 모친인 신사임당의 출생지지요. 그러나 율곡 선생도 태어나기는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지요. 그러나 성인이 된 후 율곡 선생이 많이 살았던 곳은 이곳이랍니다. 벼슬을 내놓고 낙향하여 머물다가 돌아가신 곳도 이곳이고요. 참 율곡이라는 호도 이곳 지명을 딴 것이랍니다."

문화해설사의 긴 설명을 들은 후에야 모두들 이해를 하는 눈치였다.

기념관은 1층과 2층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1층에 들어서자 우선 문 양쪽으로 병풍을 세운 것처럼 보이는 율곡의 5언 고시 <등 비로봉과 금강산>이 펼쳐져 있다. 이 시는 600구 3000자의 글자로 쓴 시로 세계 최장의 시라는 것이었다.

숲에는 가을이 저물어 가매/시인의 시정은 그지없어라.
물빛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단풍은 햇빛 따라 불타올라라.
산에는 둥근 달이 솟아오르고/강에는 끝없는 바람 어려라.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저무는 구름 새로 소리 끊겨라.

-율곡 선생이 8세 때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화석정(花石亭) 전문-


▲ 율곡의 시 ,등비로봉 금강산. 600구 3000자로 세계 최장문의 시라고 한다
ⓒ 이승철

▲ 자운서원 강인당
ⓒ 이승철
율곡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7살 때 이미 사서삼경을 거의 통달했었다고 하니 가히 천재라는 이름이 걸맞을 것 같다. 그는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23세 때부터 29세까지 9번의 과거에서 장원을 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일컬어졌다고 한다.

"아니 과거시험에는 한 번 만 장원급제하면 벼슬길에 나가게 되는데 왜 아홉 번 씩이나 장원급제를 했을까? 혹시 율곡 선생이 자신의 천재성을 자랑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일행 중에서 또 누군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율곡은 학문을 하는 자신의 마음을 친구에게 이런 글로 표현한 적이 있었다.

"내가 어릴 적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학문하는 방법을 몰라서 노유 선생에게 찾아가서 학문을 구하였다네. 그러나 나이든 선비들이 내게 권하는 것은 과거하는 공부에 불과하고 구차하게 세상에 부합되는 것을 힘쓸 뿐이었다네. 어려서는 지식이 없어 세속 일에나 골몰하고 문장 격식이나 익히기를 5∼6년 동안 하였다네. 성리에 관한 학문은 다시 강구하지도 못했고 과거 공부 역시 익숙하지도 못했네.

마침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상제의 몸으로 책을 펴보지도 못하다가 어느 날 분발해서 자신을 살펴보니 텅 빈 것이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었네. 이에 스스로 탄식하기를 "사람이 재주가 있고 없는 것은 배우고 배우지 않은 데 달려 있고, 사람이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은 행하고 행하지 않은데 달려 있다.는 것이었네. 내가 본래 어질지도 못하고 또 배움의 자질도 부족하였으며 지난날의 공부라는 것이 겨우 과거에만 골몰했을 뿐이라네. 과거공부에만 골몰하는 것이 어찌 배우는 자세의 부지런함만 같겠는가?"


▲ 서원의 사당 문성사
ⓒ 이승철

▲ 서원 안의 거수, 이이의 학문처럼 거목이다
ⓒ 이승철
그의 학문에 대한 겸손한 자세와 삶의 지표가 묻어 있는 글이다. 그는 29세 때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비로소 벼슬길에 나아간다. 그는 학문에 정진하는 동안에도 학문과 현실에 대한 갈등으로 금강산에 들어가 1년여를 수도하기도 했었다.

벼슬길에 나간 그는 학문을 현실에 적용한 경세가로서 어지러운 국정을 개혁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는 동인과 서인간의 당쟁이 심하였던 때여서 그의 개혁정책은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

사헌부와 사간원, 승정원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외직으로도 나가 백성들의 삶의 모습도 직접 볼 수 있었다. 나중에 호조와 이조, 형조, 병조판서 등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과 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동인 측으로부터 서인으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게 된다.

결국 율곡은 십만양병론을 주장한지 2개월 후인 같은 해 1583년 6월에 동인에 의해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임금에게 교만을 부렸다"는 이유로 삼사의 탄핵을 받게 된다.

그 이유는 첫째, 북쪽 변방지역에 오랑캐가 침입하여 국토가 유린당하고 있을 때 병마를 모집하면서 왕의 재가없이 처리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어전회의에 나가다가 어지러움 병이 발생해 회의에 나가지 못했는데 이것이 교만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이는 벼슬에서 물러나 선영이 있는 이곳에서 머물다가 4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 이곳 선영에 묻힌 것이다.

▲ 율곡의 모친인 신사임당의 묘
ⓒ 이승철

▲ 율곡 이이선생의 묘
ⓒ 이승철
기념관 안에는 율곡에 대한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기념관을 나와 서원으로 향했다. 자운서원은 경기지방기념물 제45호로 1615년(광해군 7)에 이 지역 유림들의 공의로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되었고 1650년(효종 원년) 왕으로부터 자운(紫雲)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은 사액서원이다

1713년(숙종 39)에 율곡의 후학인 김장생과 박세채를 추가로 배향하였는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 1969년에 지방 유림들의 기금과 국고보조로 복원하여 1975년과 1976년에 보수하였다고 한다.

서원은 대지의 맨 위에 사당을 앉히고 사괴석 담장을 둘러 삼문 앞 계단으로 오르도록 설계하였다. 사당은 6칸으로 익공계 형식 팔작지붕이다. 율곡 이이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었다.

기념관에서 서원으로 가는 오른편 산록에는 묘지 입구인 여견문이 서 있는데 동서 양쪽의 협문은 양측 면을 박공으로 마감한 솟을대문 모양이다, 안에는 묘정비가 세워져 있고, 좌우 능선에 이이와 부모의 묘소가 있는데 특이한 것은 부모인 신사임당 부부의 묘보다 아들인 율곡 이이 부부의 묘가 위에 있다는 것이었다.

10만 양병 주장으로 미구에 다가올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라고 주장했었고, 조세와 각종 제도를 개혁하여 민생안정을 도모하려했던 학자이며 개혁적인 경세가였던 율곡 이이. 그러나 그의 천재적이며 뛰어난 학문은 후세까지 풍미했지만, 그의 개혁적인 의지는 실현을 보지 못한 채 임진왜란의 참화를 겪고야 말았다.

▲ 자운서원
ⓒ 이승철
"율곡 선생의 가족들 중에 임진왜란 때 왜구들에게 살해당한 가족들이 많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묘역을 둘러보고 내려오다가 문득 기념관에서 문화해설사가 마지막으로 전해 준 말이 귓가에 맴돌아 다시 한 번 묘역을 뒤돌아보았다.

사람의 행동거지는 운명에 의한 것/깨끗하게 살기 위해 물러남은 아니라.
짧은 사임서를 올려 임금님의 곁을 떠나/강호에 배를 띄워 갈대처럼 떠났네.
내 천성은 밭을 가는 것이 적합한 일이라/마음은 부질없이 밭을 그리고 있네.
초가에서 밭 갈며 옛 자세로 돌아가매/여생의 가난이야 걱정할 것 없어라.

-율곡이 사직 후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감회를 읊은 시 <구퇴유감(求退有感)>-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BS 유포터뉴스와 시골아이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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