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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구 <만월 1> 2003년 한지에 아크릴릭 145 x 76 cm
ⓒ 이종구
달빛이 밝아 밤 하늘도 푸른색인가.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이 순하게 생긴 황소 등어리에도 빛을 비추며 농촌의 온밤을 지킵니다.

깊은 고요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잔잔하고 섬세한 붓질로 귀털까지 세밀하게 묘사해 금방이라고 음메~~ 하며 일어날 것 같이 느껴지는 황소의 극사실적인 생생함은, 농촌의 삶을 모르고 소에 대한 친숙함이 없으면 그릴 수 없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충남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그곳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고, 화가가 되서는 고향 오지리를 가슴에 담고 '우직하게' 고향의 모습과 고향 사람들을 그리기를 고집한 이종구 화백이기에 그릴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넉넉한 자연과 더불어 일하고 휴식하는 모습을 서정적으로 그렸습니다. 소는 농촌에서 중요한 노동력이자 농부에게는 가족 같은 존재이기에, '만월 1'에서 소가 휴식을 취하는 모습은 농부의 의인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화가와의 인터뷰에서 (2006년 9월 25일)


▲ 이종구 <속 농자천하지대본 - 연혁> 1984년 부대종이에 아크릴릭 170 x 100 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 이종구

이종구 화백은 1982년 "현실사회를 리얼리즘 미술로써 창작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임술년>의 창립동인으로 참여하면서 민중화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고, 쌀부대 종이에 아버지의 초상과 농민들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당시 그는 우리나라 화가 중 처음으로 쌀부대종이에 그림을 그려, 화단과 일반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내가 농부를 그리면서 미술제료인 캔버스나 고급종이 대신 헌 쌀부대를 화폭으로 사용한 것은, 검게 그을린 노동하는 농부의 진솔한 초상을 화려한 재료에 함부로 그릴 엄두가 나지 않았거니와 농부의 삶과 유기적인 재료로써, 그리고 현대미술의 개념인 오브제가 가지는 상징성과 현실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이종구 <땅의 정신 땅의 얼굴> 70쪽 한길아트 2004년


농촌의 현실과 농민의 모습을 더욱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쌀부대 종이는 그림의 주제를 극대화 시키는 중요한 '도구적 역할'을 하였고, 그는 이 쌀부대 종이에 <아버지 연작>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위의 작품 역시 <아버지 연작> 중의 하나로,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열심히 농사 지으며 나라에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 모범적 농부, 고지식한 농부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표창장도 받는 모범학생이었기에 쌀 농사 지으면 부자 된다는 정부의 선전 포스터와 태극기로 상징되는 국가를 믿으며 평생 농사만 지은 아버지. 그러나 현실은 환하게 웃음짓는 선전 포스터와 달랐는지, 아버지는 웃음 대신 뜨거운 뙤약볕에서 농사 짓느라 검게 탄 얼굴과 주름살만 보여줍니다.

이종구 화백은 이렇게 <아버지 연작>을 통해 농촌의 현실을 그리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기에 그림 속에 나타나는 아버지는 "우리 시대 익명의 농부", "우리시대 농부의 한 표본"입니다.

▲ 이종구 <아버지의 배추> 1988년 마대 위에 유채 90 x 115 cm
ⓒ 이종구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우리 농촌은 농산물 수입이 개방되는 우루과이 라운드(UR)로 불안과 걱정으로 휩싸이기 시작합니다. UR 협상이 86년에 시작되어 93년에 완료되었으니 당시는 협상 초기였지만, 농민들은 협상이 진행되는 UR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커다란 배추를 수확하고도 얼굴에 근심이 가득합니다.

이종구 화백은 농촌의 삶을 황폐화 시키는 UR에 대한 분노의 표시로, 농산물 개방의 상징인 CHINA 글씨가 선명하게 보이는 마대자루(포대) 위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사실 마대자루는 천이 촘촘하지 못하고 엉성할 뿐 아니라 작은 구멍들이 많아 그림 그리기가 쉽지 않지만, 그는 거친 천에 붓질을 거듭하여 위의 작품을 완성시켰습니다.

농부에게 가장 경건하고 위대한 대상은 바로 농산물(배추)입니다. 봄이면 논에 모심고, 고추심고, 여름이 되면 배추나 김장용 무우를 심어놓고 오직 자식 돌보듯 아침저녁으로 그것들을 살핍니다. 해충을 없애려 농약주고 잡초뽑고. 그런 일상으로 살아갑니다.

'아버지의 배추'는 탐스럽게 큰 배추를 성인이 된 자식을 바라보듯 대견하게 바라다 보는 풍경입니다. 그러나 결코 흐뭇한 표정이 아닙니다. 그림의 바탕이 되는 포대(중국산 수입포대, 맨 위에 글씨 CHINA 가 녹색으로 찍혀있는)는 그것을 암시합니다.
근심덩어리인 수입농산물 때문입니다. 풍년이 되면 값이 폭락하고 흉년이 들면 소득이 없고 그 와중에서 수입농산물은 직격탄으로 농민들의 삶을 황폐화 시키는 원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거인처럼 잘 큰 배추를 바라다 보면서도 얼굴에는 근심에 차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또 무언가 심기 위해 아버지는 황토의 땅에 서있습니다. 파종과 수확, 다시 파종하는 농부의 (개인적인)희망과 (구조적인)절망, 계산적으로는 이익이 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농부는 다시 파종을 합니다.
-화가와의 인터뷰에서


이종구 화백은 <아버지 연작> 이후, 아버지와 함께 고향 오지리에서 농사짓던 친척들과 이웃 어르신들 그리고 친구들을 쌀부대 위에 그리는 <오지리 연작>을 통해 보다 다양한 농촌의 모습과 삶의 모습을 형상화합니다.

▲ 이종구 왼쪽 <대산리 할머니> 오른쪽 <9월> 1988년 좌우 모두 부대종이에 아크릴릭 각 68 x 38 cm
ⓒ 이종구

위의 두 작품은 쌀부대 종이 위에 그린 작품 중 가장 서정적인 그림입니다. 문, 하늘, 그리고 푸르름이 가득한 밭. 그러나 수확이 시작되는 9월이기에, 할머니는 문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수확 소식을 기다리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화가는 오지리 고향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쩌면 이들은 우리나라 농경문화 전통의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근대화, 산업화과정에서 소외된 그들은 지금 세계화와 FTA(자유무역협정)라는 더욱 높은 벽 앞에서 너무도 무력한 존재로 서 있기 때문이다.
-이종구 위의 책 71쪽


▲ 이종구 <오지리에서> 1988년 부대종이에 아크릴릭, 포스터. 200 x 180 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이종구

<오지리 연작>을 그리면서 친척들과 고향 이웃들의 삶의 모습과 그들이 처한 농사의 어려움을 더욱 깊이 느낀 화가는, 단순히 그들이 처한 현실과 아픔을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근본적 원인을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찢어진 대통령 선거 포스터와 노태우가 환한 웃음을 짓는 당선사례 포스터를 배경으로 그렸고, 포스터 옆에서는 중국 배추때문에 값이 폭락한 배추가 추풍낙엽처럼 떨어집니다. 고향 친척 아저씨들은 그런 현실을 체념한듯 그냥 쪼그리고 앉아 앞으로 다가올 더 험난한 현실을 걱정할 뿐입니다.

반만년 역사의 농경문화 전통이 무너지고 농촌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을 나의 가족과 이웃을 통해 목격해온 나로서는 너무도 당연히 비판적 리얼리즘의 시각으로 농촌 현실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농부인 나의 아버지와 이웃의 농부를 통하여 무너져가는 농촌사회와 그들의 삶의 가치를 빼앗는 권력과 폭력을 고발하고 싶었다.
그 현장이자 무대가 바로 나의 고향인 오지리였다
-이종구 위의 책 28쪽


▲ 이종구 왼쪽 < UR - 권씨 > 1991년 부대종이에 아크릴릭 150 X 105 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오른쪽 <길> 1991년 장지에 아크릴릭 94 x 65 cm
ⓒ 이종구

추수를 앞둔 듯 황금물결을 이룬 논 한 가운데 수입 농산물 상자가 상징적으로 서있고, 오지리 권씨 아저씨는 그런 현실이 화가 나는듯 한손에 낫을 든채로 UR의 부당성을 역설합니다. 여름 내내 뙤약볕 아래서 일을 해 얼굴이 검게 그슬린 이땅의 농부 권씨 아저씨. 그러나 화가는 권씨 아저씨 한분을 그리는 것으로는 UR의 부당성을 설파하는데 부족하다는 듯, 오른쪽에 있는 <길>도 그립니다.

'길'은 경운기가 지나가는 논길을 커다란 낫이 가로막고 있는 풍경입니다. 우리의 양식이며 생명인 벼들이 싱싱하고 푸르르게 잘 자라는 들의 한 가운데에 비록 녹슨 낫이지만 칼날은 푸른하늘을 반사하여 퍼렇게 날이 서서 길을 막고 있습니다. 우리민족의 생명인 대지로 침투하는 산업화, 자본, 수입 농산물, 외세 등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낫을 다소 과장하여 그렸습니다.
-화가와의 인터뷰에서


위의 두 작품은 모두 91년에 그렸으니, UR 협상이 시작된지 만 5년, 정부의 우물쭈물하는 협상태도에 농민들의 분노가 점점 한계점에 도달할 때의 작품이고, 결국 농민들은 92년부터 대규모 시위를 벌이지만 93년 12월 UR 협상은 타결되었고 94년 국회에서 비준되었습다.

▲ 이종구 <땅 - 평등> 1997년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 x 170 cm
ⓒ 이종구

UR 협상이 끝나 더욱 황폐해진 농촌의 현실. 그래도 달리 할 일이 없는 농부와 아내는 땅과 몸이 하나가 되어 열심히 농사를 짓습니다.

이종구 화백은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렇게 농부의 얼굴과 땅이 결합된 <대지 연작>을 발표하면서,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농사일 밖에 없어 '죽으나 사나' 농사를 지어야 하는 농민들의 절실한 표정을 화폭에 옮깁니다.

위의 작품은 이마의 주름과 밭고랑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농민의 힘든 삶의 모습이 느껴지는, 우리나라 민중미술의 화격을 한단계 올린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땅-평등'은 고향의 친척아저씨 부부의 초상입니다. 인간과 대지를 동일시하여 땅은 곧 모성의 대지라는 점에서 부부 초상을 인체의 얼굴과 대지(밭고랑)의 육신으로 결합하여 그린 것입니다. 땅과 인간의 평등, 부부(남녀)의 평등, 노동의 평등. 그런 생각으로 그린 것입니다.
-화가와의 인터뷰


▲ 이종구 <다시 오지리에서> 2003년 종이에 아크릴릭, 포스터 215 x 391 cm
ⓒ 이종구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를 거치며 문화 에술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민중문학, 민중미술의 깃발이 내려지고, 민중작가와 민중화가들은 자신들이 앞으로 나아가야할 창작방향에 대해 진지한 고민합니다. 그러나 이종구 화백은 고향과 농촌을 버리지 않고 꿋꿋하게 고향을 가슴에 품기로 결단합니다.

그동안 내가 천착해온 민중미술이니 민족정체성이니 하는 용어는 아주 촌스럽고 퇴색해버린 반시대적인 개념이자 용어로 취급받기도 했다. 도도한 세계화의 물결에 합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퇴행일 뿐이었다. - 중략 -

다시 '오지리 사람들'을 내보인다. 세계화로 가는 시대에 역행하여 고향으로 가는 것, 영상문화시대를 거슬러 낡은 그림을 들고 귀향하는 것, 시대정신의 대척점으로 역행하는 꼴이다. -중략-

이제 오지리를 포함한 우리 시대의 고향 농촌의 풍경은 그저 스산하기만 하다. 그래서 고향으로 가는 길은 두렵다. 그러나 나는 늘 뜨거운 마음으로 그 길을 지향한다. 동시대 세계화의 중심이 아닐지라도 내 삶과 그림의 중심이 되는 곳, 그 지점으로부터 세계화가 비롯되었으면 희망하는 곳, 그래서 언제나 나는 행복하게 귀향한다.
-이종구 위의 책 112 - 119쪽


위의 작품은 앞에서 소개해드렸던 <오지리에서>(1988년 작)와 연속성을 갖는 그림입니다. 세월이 15년 지나는 사이에 맨 오른쪽에서 담배를 피우던 아저씨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세번이나 바뀌어도 농촌의 현실은 좋아지기는 커녕 더욱 악화되었고, 농산물 개방이 더욱 거세졌습니다.

그래서 화가는 화폭에다 외국 개를 큼지막하게 그려 앞쪽에 배치했고, 우리의 황소는 뒤편에서 겁을 잔뜩 품고 슬금슬금 외국 개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2000년대에 만나기 쉽지않은 통렬한 사회비판정신이 가득 담긴 작품입니다.

▲ 이종구 <다시 오지리에서 - 말마구지 사람들> 2004년 한지에 아크릴릭, 포스터 200 x 250 cm
ⓒ 이종구

대통령 선거가 끝났어도 계속되는 국회원선거, 지방선거. 그러나 그런 선거와 정치가 농촌을 풍요롭게 해주지 못한다는 듯, 선거 포스터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웠습니다.

궁극적으로 내 그림의 꿈이 농촌의 희망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로 되어버렸다. 미술의 사회적 기능과 힘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내가 작업해온 결과가 오직 문화적 가치로서밖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새삼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나마 내가 아직까지 그려왔고 또 앞으로도 그려갈 세계란 오직 땅의 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일 수 밖에 없다.
-이종구 위의책 92쪽


▲ 이종구 <대지의 손 - 삽> 2004년 종이 부조에 채색, 삽 113 x 75 x 15 cm
ⓒ 이종구

삽보다 더 큰 농부의 손. 시간이 지날 수록 처참하게 붕괴되는 농촌이지만, 그래도 농부의 손과 땅을 파는 삽을 사랑하고 그들이 땅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길 바라는 화가의 메세지가 담겨있는 힘찬 작품입니다.

고향을 사랑하고, 농촌을 사랑하고, 농민을 사랑하여, 20년이 넘도록 농민들의 삶을 그려온 이종구 화백.

옹골찬 역사인식과 함께 재료와 형식과 기법에 대해 끊임없이 실험하고 도전하여 우리나라 현대미술에서 '농촌미술'이라는 또 하나의 독창적 세계를 만들었기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그를 <2005년 올해의 작가>로 선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명예에 안주하지 않고 보다 넓은 작품세계를 꿈꾸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나는 상처난 세계를 그리는데 내 작업의 중심을 둘것이다. 그것이 우리나라 농촌이든, 국토의 전반이든, 제3세계의 현실이든 지역적 삶을 중심으로 대등하고 동등한 세계화를 위하여,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엄과 평등한 세상을 향한 나의 작업은 게속될 것이다.>
-이종구 위의책 131쪽

덧붙이는 글 | 사진의 색상이 원화와 가깝게 보일 수 있도록 도와주신 박희주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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