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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트로이카>의 작가 안재성이 2년 만에 새로운 책을 펴냈다. 그는 경성 트로이카의 생존자 이효정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1930년대 사회주의운동가 이재유의 삶을 복원해낸 바 있다.

이 책 <이관술 1902-1950>(사회평론, 2006)은 그 후속작이자 형제작라고 할 수 있다. 이재유의 삶과 죽음이 담긴 <경성 트로이카>가 소설의 형식을 빌었다면, <이관술 1902-1950>은 평전의 성격이다. 장르는 달라도 한국 현대사에서 사라진 '왼쪽 사람들' 이야기의 연작인 셈이다.

정치지도자 5인으로 선정되었던 이관술

▲ <이관술 1902-1950> 표지. 1932년 반제동맹으로 수감되었을 때의 사진이다. 모진 고문을 받고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 사회평론
이 책은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로 경성 트로이카가 무너진 후에도 끊임없이 조직의 재건을 꾀하며 불굴의 의지를 보였던 활동가 이관술의 일대기를 담았다. 이관술은 고물장수, 솥땜장이, 넝마주이 등으로 위장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흩어진 조직원들을 규합하였다. 그는 외모가 수수했고, 성품은 장난꾸러기처럼 재미있고 소탈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는 수수한 생김새처럼 비정치적 성향을 지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가 높았다. 해방 직후 여론조사에서 이관술은 '가장 뛰어난 정치지도자 5인'으로 선정될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

"우익성향의 단체인 '선구회'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이 뽑은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는 여운형으로서 33%를 차지했고, 2위 이승만 20%, 3위 김구 17%, 4위 박헌영은 15%를 차지했다. 이관술은 13%로 5위를 차지하는데, 지지율로만 보면 김구, 박헌영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신망 높던' 지도자 이관술은 1946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50년 6·25전쟁 직후 처형당한다.

의혹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 정판사 위폐사건으로 재판정에 나온 피고인들이 고문을 당해 허위자백을 했다는 내용이 실린 <현대일보> 1946년 8월 24일자. 이 신문은 미군정에 의해 폐간되었다.
ⓒ 사회평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흔히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의 명령으로 남한 경제 교란과 공산당의 재정난 타개를 위하여 정판사에서 위조지폐 1200만원을 찍어낸 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 사건에 대하여 강한 의혹을 제기하며 미군정과 친일경찰에 의한 조작 가능성을 말한다. 이 책의 저작 이유도 혼신을 다 바쳐 활동한 이관술의 누명을 조금이나마 벗겨주고자 함이다.

작가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수사 기록, 재판 기록 그리고 언론보도를 꼼꼼히 수집하고 당시 정황을 추적한다. 그 결과, 피의자 증언 외에 유죄가 될 만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결론을 얻는다. 유죄판결의 유일한 단서인 피의자 증언도 신빙성이 적다. 공산당의 명령으로 위폐를 찍었다고 말했던 인쇄기술자들이 고문에 못 이겨 허위 자백하였다고 재판정에서 토로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관들은 피고인들에게 중형을 선고하는데, 이관술에게는 위조지폐 발행의 총책임자로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온 국민의 관심 속에서 진행된 이 사건의 재판은 모든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우익신문들은 공산당의 위조지폐 범죄를 기정사실화하여 기사를 썼고, <현대일보> 등 진보 언론은 사건 자체에 대하여 많은 의문점을 제기했다. 이에 미군정은 피고인들의 고문 주장 등의 공판내용을 가감 없이 보도한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을 폐간해 버린다.

기관지 <해방일보>에 이어 '3대 진보신문'이 사라짐으로써 조선공산당은 대중에게 직접 호소할 언로가 봉쇄되어버린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은 남한 대중에게서 지지를 잃게 되고, 급격하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재유와 함께한 일제하 사회주의 독립운동

▲ 1946년 <조선일보> 10월 18일자 기사. 이관술이 일관되게 '모르겠소'라고 답했다는 내용이다.
ⓒ 사회평론
고물장수, 넝마주이, 솥땜장이 등 보잘 것 없는 행색으로 반평생을 살았지만, 이관술은 울산의 부유한 양반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동경고등사범을 졸업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사람이다. 졸업 후에는 동덕여고에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1932년 교사신분으로 '반제동맹'을 결성해 활동하다 체포되면서 고난에 찬 운동가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 후로 구속과 고문, 도피, 지하 활동이 평생토록 반복된다. 그는 세 번 체포되었고 10년간 옥살이를 했다. 1934년 경성트로이카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이재유를 만나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재건그룹'을 만든다.

이재유와는 아주 특별한 관계다. 1935년부터 2년간 이재유와 함께 도피생활을 하는데, 경기도 양주군 공덕리(지금의 서울시 창동)에서 숨어들어 농사꾼 '김대성, 김소성 형제'로 위장하여 산다.

나이가 많은 이관술이 형이었고, 이재유가 아우였다. 이름이 '대성'과 '소성'이니 '큰별, 작은별 형제'였던 셈이다. 지명수배자와 탈옥수 신세였던 이들이 백척간두의 위기 상황에서도 발휘했던 유머와 재치에 웃음이 나온다.

이관술은 이재유와 함께 지내던 이 시기에 힘겨운 농사일을 하며 '엘리트 지식인' 때를 완전히 벗는다. 그리고 이재유에게 위장술을 배워 해방 이후까지 경찰의 체포망을 비웃는 '위장의 달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한때는 구두닦이로 위장해 경찰서 앞에서 구두를 닦으며 오히려 경찰의 동태를 감시하기도 했다. 1936년 이재유가 체포되면서 공덕리 농사꾼 생활은 막을 내린다. 이재유가 고문을 버티며 시간을 벌어준 덕에 이관술은 무사히 강원도로 피신한다.

1939년 서울로 다시 돌아온 그는 흩어진 동지들을 규합하여 '경성 콤그룹'을 결성한다. 연말에 박헌영을 영입하여 그를 조직의 지도자로 세운다. '경성 콤그룹'은 일제하 국내에서 펼쳐진 최후의 조직적 저항운동이었다. 1941년 이관술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고문으로 얻은 폐병이 심해져 병보석으로 3개월간 가석방된다.

▲ 동덕여고 교사시절 교무실에서. 왼쪽 가운데 양복 입은 사람이 이관술이다.
ⓒ 사회평론
그는 3개월간의 가석방 기간 동안 고향 울산에 내려가 있었다. 교사로 부임하면서 고향을 떠난 이래 감옥살이와 오랜 지하활동과 도피생활 끝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귀향한 것이다. 이 짧은 석 달이 생애 마지막으로 고향에서 가족과 오붓하게 지낸 시간이 된다. 병보석 기한이 만료되고 재수감 명령이 내려오자, 그는 사라져 버린다.

이관술의 큰 딸 정환은 훗날 자신의 딸 박경희에게 아버지가 사라지던 날 밤의 기억을 들려주었다.

"큰 딸 정환은 이미 전날 저녁 아버지가 집을 떠나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평소보다 밥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먼 길 떠나는 남편에게 주먹밥을 만들어주기 위함이었다. … 이관술은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주먹밥 보따리를 든 채 아내와 딸들이 잠든 방에 들렀다. 그는 어둠 속에서 딸들의 머리를 하나씩 쓰다듬어 주었다. … 어린 딸들은 잠들어 있었지만 부인 박가야와 큰 딸 정환은 깨어 있었다.

작은 딸들의 머리를 하나씩 쓰다듬어주던 이관술은 큰 딸의 머리를 유달리 오랫동안 쓰다듬어 주었다. … 이관술이 뒷마당 장독대 주위에 가득한 대나무 숲으로 사라져버린 후에야 박가야는 자리에 누운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저리 나가시면 이제 영영 몬 들어오실기다.' 정환도 비로소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함께 흐느껴 울었다. … 정환은 유난히 대나무 숲이 울던 그날 밤을 평생 잊지 못했다."


이관술이 사라진 탓으로 집안은 풍비박산 난다. 이관술의 가솔과 친척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주재소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이관술은 일년 반 동안 은신해 있다가 1945년 8월 대전에서 넝마주이로 해방을 맞는다.

같은 해 9월, 그와 동지들이 그토록 세우고자 했던 조선공산당이 재건되고 그는 당의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을 맡는다. 그러나 1946년 5월 정판사 사건으로 수배령이 떨어지고 7월에 체포된다.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1947년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이관술은 일제시대 고문 경찰로 악명 높던 노덕술에게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고, 동지의 이름도 대지 않았다.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죽다

이관술은 감격의 해방을 맞았던 대전으로 옮겨져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이 나자 처형된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좌익사범과 보도연맹 가입자 등 수천여 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기결, 미결, 잔여 형기에 관계없이 모두 처형된다.

헌병들은 이들의 눈을 가리고 2명씩 등을 맞대게 한 후 손을 묶고 트럭에 2중 3중으로 태웠다. 그리고 대전의 외곽지역인 산내면 골령골로 데려가 총살하기 시작한다. 시체는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묻거나 태웠다. 이같은 학살이 열흘간이나 계속된다. 3천 명에서 최고 8천 명까지 죽었다는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최초 희생자는 이관술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서울에서 발간하는 북한 신문에 이관술이 제1호로 처형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안락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갖은 고생을 하던 이관술, 일신을 조국과 조선 민중에 바쳤던 이관술이 캄캄한 산 속에서 죽음을 맞을 당시 나이는 48세다. 그 후 역사는 그를 파렴치한 위조 지폐범으로 기록한다.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 동덕여고 교사시절 이관술은 지리와 역사를 가르쳤다. 얼굴이 검어 '물장수'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 사회평론
이관술이 남긴 흔적은 많지 않다. 고향의 유품은 일제 경찰이 진즉에 압수하여 파괴하였고, 활동시기엔 위험을 무릅쓰고 <적기> 등의 팸플릿을 만들기도 했으나, 저작자임을 밝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일하게 남긴 글은 해방 후 현대일보에 연재한 짧은 회상록인데 그 제목이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이다. 48년의 생애 중 20년을 혹독한 고문과 감옥살이, 밑바닥 생활을 하며 활동하고 도피했던 그에게 조국의 인상은 '감옥'이었는가 보다. 더구나 해방된 조국마저 그를 감옥에 보내 최후를 맞게 하였다.

일제시대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만주에서 무장투쟁하기도 했고,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세우기도 했고, 혹한의 러시아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멀리 바다건너 미국에서 '외교적으로' 독립을 꾀하기도 했다. 독립운동에 바친 삶은 어느 하나 가시밭길 아닌 것이 없고, 어느 하나 값지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활동은 그야말로 호랑이굴 안에서의 투쟁이 아니었나 싶다. 가가호호 감시하던 일제 치하, 숨 쉬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하던 땅에서 방어벽 하나 없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몇 배로 힘들고 위험했을 것이다.

더구나 외국인 선교사나 교회의 힘을 빌릴 수도 없었던 사회주의 노동운동가들이 의지할 데라곤 농사꾼이나 노동자로 위장하여 사람들 속에 묻히는 것 밖에 없었다. 체포와 고문과 감옥과 죽음이 시뻘건 호랑이 아가리처럼 벌리고 있던 조국 땅에서 변절하지 않고, 해외로 도피하지 않고, 끝까지 남아 의기를 지켰다는 것만으로 공을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조국을 단 한 번도 '감옥'으로 느끼지 않고 호의호식했던 친일파가 해방 후 대한민국의 주도권을 쥐고 흔들었다. 독립운동가의 자손들이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는 반면, 친일파의 후손들은 재빨리 우익인사가 되어 부와 권력을 잡았다.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오랜 세월 고통 받았던 이관술의 가족들은 최근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 '정판사 위폐 사건'의 재조사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60년의 세월이 지났고 이관술은 이미 처형당했지만 명예만이라도 회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전거를 타고 짐칸의 폐품과 솥단지 밑에 소작쟁의 소식이 담긴 기관지를 남으로는 마산에서 북으로는 함흥까지 페달을 밟으며 날랐던 이관술. 모진 고문을 받은 후에도 사진기 앞에서 엷은 미소 한 가닥 지을 줄 알았던 그에게 역사는 과연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안재성 지음 <이관술 1902-1950> (사회평론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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