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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송사 가는 고갯길에서 내려다 본 추성리 마을.
ⓒ 안병기
경남 함양군 마천에서 추성리 가는 버스를 탔다. 시내를 흐르는 물이 마치 말이 급히 뛰어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하여 마천이라 부쳐진 이름이다. 함양 쪽으로 달려가던 버스가 우회전하여 의탄교를 건넌다.

의탄교는 소박하게 멋을 부힌 아치형 다리다. 길은 겨우 버스 한 대 지나가기조차 버거울 만큼 좁은 일차선 도로다. 마침 칠선계곡 쪽에서 내려오던 관광버스와 만난다.

이 좁은 길에서 어떻게 비켜갈까 걱정스럽다. 그러나 두대의 버스는 서로 조금씩 비키더니 금새 재 갈길을 달려간다. 시골살이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툼이 드물다. 사물도 사람에게서 마음을 배우는가 보다.

길 오른쪽으로는 칠선계곡으로부터 구비구비 흘러내려온 계곡물이 흘러간다. 버스에서 내려 물줄기를 바라보며 걸어가고 싶어진다. 이런 곳에서는 길이 계곡에 세들어 살아야지 계곡이 길에 세들어서는 안된다.

계곡이 길에 세들게 되면 환경을 부수고 풍경을 망치게 된다. 버스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아 추성 삼거리에 닿는다. 지금은 등산객이나 피서객들을 바라고 민박을 치고 가게를 내고 살고 있지만 예전에 이 마을 사람들은 칠선동, 두지터, 광점동, 얼음터 등과 더불어 화전으로 생계를 꾸려갔던 모양이다.

추성리 삼거리에서 왼편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간다. 고갯길이 사뭇 가파르다. 고개 아래를 내려다보니 추성리 마을이 천왕봉 올라가는 길이 언뜻언뜻 보인다.

당장이라도 뛰어내려가 그 길로 가고 싶다는 충동이 인다. 군데군데 늘어서서 나그네를 맞는 장승들과 바위에 새겨넣은 사천왕상이 그런 내 마음을 알리 있을까. 1km쯤이나 올라갔을까. 마침내 벽송사가 키만 꺼정한 느티나무 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들이민다.  

민중의 얼굴을 보여주는 나무장승과 가루지기

ⓒ 안병기
벽송사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경남 민속자료 제2호인 나무장승 한쌍이다.  왼쪽 장승은 몸통 부분에 '금호장군' 이라 음각돼 있고, 오른쪽 장승은 '호법대장군'이라 음각돼 있다. 약 70년 전에 세워졌다고 하며 재질은 단단한 밤나무라고 한다.

산불에 머리가 타버린 금호장군.  이 여장승의 모습은 마치 한국여성의 수난사를 말해주는 듯 애처롭다. 남장승인 호법장군은 원상태를 거의 잃치않고 있는 상태다. 제 혼자만 버젓하게 살고있는 남장승이 슬며시 얄미워진다.

호법장군의 눈은 툭 튀어나온 왕방울눈이다. 무지하게 큰 주먹코에다 입은 합죽하다. 입 아래에도 수염이 나있고 턱 아래에도 수염이 나있다. 먹은 것이 모두 수염으로 간 모양이다. 사실을 과장한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예전 순천 선암사 앞에 있었던 나무장승을 떠올리 만큼 조각솜씨도 뛰어나다.

판소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벽송사를 신재효가 지은 판소리 가루지기타령(변강쇠타령)의 주무대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평안도 월경촌에 계집 옹녀와 삼남에서 빌어먹다 양서로 가던 변강쇠는 오가다가 청석골 좁은 길에서 만난다. 단박에 눈이 맞은 두 사람은 오만 잡거리로 살아가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

그런 그들이 마지막에 삶의 터전으로 택한 곳이 지리산 산중이었다.

"토후하여 생리(生利)가 좋다 하는 남지리"다. 또한 옹녀 등쌀에 못이겨 나무하러 나온 강쇠가 산에 나무하러 온 초군아이들의 노래 소리를 듣는 곳도 "둥구마천 백모촌"이며,  게으른 강쇠가 나무 대신 군불을 때버린 장승도 "경상도 함양군에서 산로 지키던 장승"이다.

결국 장승의 원혼은 장승 우두머리인 대방에게 억울한 사정을 고하게 되고 대장은 통문을 돌려 팔도 장승들을 불러들여 대책을 세운 끝에 변강쇠를 혼내준다는 것이 가루지기 타령의 대강의 줄거리다.

가루지기타령은 성을 매개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중의 원초적 생명력에 관한 패러디이다. 가루지기타령이 핍박받는 민중들을 장승에 비유하고 변강쇠를 기성권력으로 풍자한다. 그러나  떠돌이 생활에 지쳐 갈 곳이 없던 변강쇠 부부 역시 유랑민들이다. 지리산이 기층문화의 산실이 된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의 일인 것이다.

벽송사가 겪은 곡절

▲ 벽송사 전경
ⓒ 안병기
벽송사는 언제 지었는지 정확한 역사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옛절터에 있는 삼층석탑으로 미루어 볼 때 신라말이나 고려초에 지어진 게 아닌가 추측한다. 조선 중종 때 절을 중창했던 벽송 지엄선사의 이름을 따 벽송사가 되었다고 한다.

몇차례의 폐사 위기를 겪었던 벽송사는 1900년경 경허스님이 선원을 개설하고 구하스님이 안거하면서 다시 선원의 맥을 이어간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에 은거하던 인민군 유격대의 병원이 되면서 국군 토벌대에 의해 전소되고 만다. 이후 폐허로 남겨졌던 사찰을 원응스님이 중창하고 선원을 개원하면서 다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현재 전각은 법당인 보광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장선원과 간월루가 있으며, 전면에는 산문과 종루를 배치하였고 후면에는 산신각이 있다. 지은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고졸한 맛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뒷편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시퍼런 대나무숲은 이 절이 가진 약점을 상쇄시켜준다. 마치 서슬푸른 수좌스님들의 기상을 보는 것 같다.

▲ 추계 산철 결제를 위한 선회
ⓒ 안병기
마침 내가 그곳에 들렀던 14일에는 선회가 열리고 있었다. 선회란 안거가 끝난 산철결제 기간 동안에도 실참을 병행하면서 교헉강의와 논강으로 선과 교를 닦는 것.

휴정 서산대사의 '선시불심 교시불어(禪是佛心 敎是佛語)'라는 선교겸수의 전통이  불립문자와 선이 강조되면서 해방이후 한국선원에서 사라졌던 것.

한국불교에서 사라졌던 선회를 벽송사가 9월 8일 부터 18일까지 산철 결제 기간 동안에 복원하는 것이다. 최근 들어 선사들의 간화선 법회가 늘어나는 추세지만 선을 주제로 강의와 논강이 이뤄지는건 백송선원이 유일하다고 한다.

강의하시는 스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 다른 절에서 오신 듯한  비구니 스님 두 분도 배롱나무 아래 앉아 열심히 논강을 듣고 있다. 집은 옛스럽지 않으나 선풍만은 옛날 그대로를 따르려 애쓰는 모양이 보기 좋다.

3층 석탑이 있는 옛 절터에 가려면 현재의 절에서 나와 약 50m가량 더 위로 올라가야 한다. 왼쪽에 우거진 대숲을 끼고 올라가면 3층석탑과 3기의 부도 그리고 절 사람들이 도인송과 미인송이라 부르는 소나무 몇 그루가 나그네를 맞는다. 

▲ 보물 제474호3층 석탑과 부도
ⓒ 안병기
석탑은 2층 기단위에 3층의 몸돌을 세운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보이고 있다.

바닥돌과 아래층 기단의 사이에 높직하게 딴 돌을 끼워놓은 형태가 특이하다. 위층 기단의 맨윗돌은 한 장으로 된 널돌이다.

몸돌 각 층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으며 지붕돌은 추녀가 얇고 반듯하며 마무리 부분에서 치켜오른 정도가 완만하다. 탑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머리장식받침)과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있다.

벽송사의 창건연대를 16세기로 보면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신라양식 탑이라는 게 주목을 끄는 대목이다. 일반적으로 법당 앞에 탑을 두는 것과 달리 탑을 절 뒤쪽의 언덕 위에 세운 점도 특이하다.

잘 생긴 소나무 몇 그루와 대숲, 그라고 뒷편에 우거진 작은 소나무 숲이 어울린 이곳은 참 고요하고 아늑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이 고요를 깨지 않으려고 바람마저 에돌아서 멀리 불어간다. 

고졸한 맛을 잃어버린 현재의 절에서 느낀 상실감을 이곳에서 보상받을 수 있다. 다시 절 입구로 내려와 석조로 흘러드는 약수를 한 모금 마신다.

폐부를 찌르는 듯 시원하다. 이 약수 한 모금 맛보려고 산사에 오른다고 했던 친구가 생각난다.

민족상잔 비극이 서린 벽송사 루트

▲ 지리산 공비 토벌 루트 가는길.
ⓒ 안병기
절을 내려오기 전 완쪽 산자락으로 접어드는 길에서 멈춰서서 안내판을 읽는다.  안내판은 "여순 반란사건 잔당 200여 명이 지리산으로 입산 좌익 세력과 함께 제2 병단 지리산 유격대를 결성허였다. 이들 빨치산은 한국전쟁 당시 후방 교란을 목족으로 경찰서와 군부대를 습격하고 민가에 피해를 주는 등 그 폐해가 심했다"라고 전한다.

이 벽송사 근처에선 수년간에 걸쳐 빨치산과 토벌대의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1953년 8월 병단장이었던 이현상이 사살되고나서도 계속되었다.  한국전쟁 당시에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던 벽송사는 국군에 의해 방화되는 비극을 겪게 된다. 아무리 전쟁중이라지만 어떻게 환자들이 생활하는 병원에까지 불을 지를 수 있었는지!

가락국 양왕이 성을 쌓았다는 추성 3거리에서 시작되는 벽송사 루트는 빨치산 야전병원을 비롯 산죽사이로 몸을 숨기던 산죽비트 낙엽비트(빨치산이 땅속으로 들어가고 위를 낙엽으로 덮은 은신처),바위비트(은신하던 바위틈), 굴비트 등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예서 조금만 더 가면 지리산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10년간이나 숨어살았던 선녀굴이 나온다고 하는데 시간이 없어 가보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다. 루트를 따라 몇 걸음 들어가다가 어둡고 컴컴하여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아 금새 포기하고 되돌아 나왔다.

길을 잃기 쉬운 칠선계곡과 역사

▲ 추성리 칠선계곡 초입. 천왕봉에서 추성리에 이르는 지리산에서 가장 험하고 긴 계곡이다.
ⓒ 안병기
버스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걸음을 재촉하여 추성리로 내려온다. 버스 시간이 30여 분가량 남아있다.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끼고 있는 칠선계곡은 천왕봉 정상에서 마천면 의탄까지 장장 18km에 이르는 유장한 계곡이다. 폭포와 그 아래로 깊은 소가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계곡으로 손꼽히는 칠선계곡에 와서 탁족 한번 없이 간다는 건 나 개인적인 서운함은 제쳐두고 계곡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물 속에 잠시 발을 담그고 앉아서 이성부의 시 '칠선골'을 생각한다.

처음이 골짜기 찾았을때는
내려가는 길 잘못 들어 헤매다가
되돌아 올라오고 말았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천왕봉을 올랐다고
여운이가 어이없는 듯 투덜거렸다
혼자서 두번째 왔을 때는
잘 내려가다가 또 길을 잃었다
성깔이 많은 골짜기다
그만큼 칼칼한 정신들 우글거려
길 잃음도 복이라고 믿었다
바웟돌들이 한사코 나를 떠다밀므로
이 어려움도 머지않아 기쁨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잘 참아내며 오르막 내리막
수도 없이 되풀이되는 길
우리 삶의 고단한 한나절 또는 한평생
깊게 가르치는 길
점필재에서 정순덕이까지 또 누구 누구
이 길로 오르내렸음을 떠올리면서
나도 산과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고마워하는 법을 배웠다
추성리 다 내려온 돌담 아래에서
살모사 한 마리 본다
그늘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는
햇별 한 줄기 본다

이성부 시 <칠선골_내가 걷는 백두대간11>


이성부 시인은 누구보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의 시의 소재 가운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산'이다. 그렇기 때문에 "길 잃음도 복이라고 믿"고 산을 오르는데서 느낀  어려움도 "머지않아  기쁨이 되리라는 것" 을 안다.

여행이 남기는 무형의 재산이 있다면 아마도 고생스러웠던 장면들을 기쁨에 찬 장면으로 치환해서 간직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길은 삶을 "깊게 가르친"다. "삶을 깊게 가르치는 길"이란 어떤 길을 말하는 걸까. 점필재 김종직이나 빨치산 정순덕도 걸었던 천왕봉에서 칠선계곡까지의 길을 따락 걸으면서 시인은 아마 역사의 길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처음이 골짜기 찾았을때는/ 내려가는 길 잘못 들어 헤매다가/ 되돌아 올라오고 말았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잘못간 산길은 되돌아나올 수 있지만,  역사의 길은 한 번 잘못가면 되짚어 나올 수 없는 길이다.

버스가 떠나려는지 부릉부릉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가을이 가기 전에 이곳에 다시 와서 천왕봉을 올라야겠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4일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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