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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인권실천시민연대 등 35개 종교·인권단체의 연대체인 '강남대 이찬수 교수 부당 해직 사태 해결을 위한 대책위원회'와 공동으로 강남대 이찬수 교수의 재임용 거부와 관련된 기획기사를 내보냅니다. 이번 기획에서는 우리 사회에 만연된 '종교적 배타성'과 족벌 사학의 문제를 심층 취재합니다. 홍세화 <한겨레> 시민편집인이 인권실천시민연대측에 보내온 글을 전재합니다. <편집자주>
▲ 대책위 소속 김완수씨가 지난 14일 오후 강남대 정문에서 '이찬수 교수 복직을 위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는 "학교가 우원정신, 즉 타 종교를 인정하는 자세를 더 배워야한다"고 촉구했다.
ⓒ 안윤학

강남대 이찬수 교수 파문은 한국 사회 기독교계의 일부세력이 중세의 주류로 행세하려는 게 아닌지 묻게 한다. 그들이 이 교수에 대한 재임용 탈락의 근거로 내세운 게 아주 노골적인데, 그만큼 그들이 종교적 자만과 오만에 빠져있음을 반영한다.

21세기 한국의 일부 기독교 세력에게선 똘레랑스를 찾기 어렵듯이 이웃사랑도 찾기 어렵다.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받는 피에르 신부는 "사람을 굳이 두 부류로 나누어야 한다면 그것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누어진다"고 했다. 한국의 일부 기독교 세력은 사람을 '믿는 자'와 '믿지않는 자'를 구분하는 데 매몰되어 이웃사랑에서 스스로 멀어진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하지 아닐까?

다른 종교에 대한 똘레랑스가 이단?

실제로, 그들은 나와 다른 남을 '악'이라 단죄하는 데 익숙하고, 다른 종교를 인정하려 들지 않으며, 이번 사태가 말해주듯이 다른 종교에 대한 똘레랑스를 이단인 양 금기시한다.

모든 종교는 완전하지 못한 인간에 대한 회의와 성찰을 그 출발점으로 사랑과 인내와 겸손, 책임과 의무를 담은 계율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또 죽음의 두려움과 마주쳐야하는 인간 영혼을 위무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 공통점을 갖고 있는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의 표시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런데 강남대 사학재단은 이 교수를 우상숭배로 단죄하고 있다. 이 교수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부정한 적이 없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지배하면서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우상 숭배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물신 숭배다. 우리는 그 대열에서 강남대 사학재단을 쉽게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신앙의 차이를 '우월관계'보다 '선악관계'로 치환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나의 종교는 '선'인데 남의 종교는 '악'이라는 것이다. 악은 이 사회에서 사라져야 한다. E따라서 그 어떤 배제와 억압도 정당화된다. 16세기에 유럽을 피 비린내 나는 종교분쟁으로 몰아갔던 게 바로 신구교간 선악구분이었다.

잔인성과 집단 광기로 물든 암흑기를 마침내 마치게 된 것은 신구교가 하나로 흡수 통합되어서가 아니라 서로 차이를 용인해야 한다는 반성적 성찰을 통해서였다. 바로 똘레랑스다.

신앙의 증거는 신앙인 각자의 내면에 거처할 뿐이며 아무도 남의 신앙심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영화 <미션>에 등장했던 신부들은 모두 독실한 믿음의 소유자들이지만 각자 처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은 각자의 신념에 따라 달랐다. 총을 들었으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총알 없이 민중과 함께하다 죽어간 남미의 신부 이야기는 신앙의 힘에 존경을 갖게 할 뿐 의심과 비난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종교 앞세운 사학재단, 그 파국의 끝은?

▲ 강남대 정문의 커다란 '오메가(Ω)'. 그리스 자모의 맨 끝자로 끝 ·최후라는 뜻이다. 처음이라는 뜻을 가진 자모의 첫자 알파(α)와 대비되는 말로, 성서에 "나는 알파요 오메가니라"라고 지극히 높은 존재임을 비유한 말이 있다.
ⓒ 안윤학
이번 사태는 사학재단의 권력욕과 탐욕이 종교를 앞세울 때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들의 종교적 배타성은 신앙의 엄격함에서라기보다 권력욕과 탐욕을 은폐하려고 마치 종교적 배타성이 신앙적 순결을 의미하는 것처럼 호도하며 이를 이용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은 기독교의 이웃사랑과 똘레랑스 정신을 저버리면서 자신들의 사익 추구 관철을 위해 기독교를 빌미로 삼았기 때문이다.

창학 이념에 적합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재단 측의 주장은 그야말로 적반하장이다. 정작 창학 이념에 적합하지 않는다는 말은 독실한 불자의 기부라는 종교적 똘레랑스 정신으로 설립된 강남대를 장악한 후 윤도한 장로 자신을 거쳐 부인과 아들이 이사장과 총장을 역임하며 전형적인 족벌체제 사학으로 전락시킨 현 재단 측에 해당된다.

"남의 집을 방문한 사람이 그 집 가풍을 존중하는 예"를 갖추는 것이라며 대웅전 본존불 앞에서의 행동에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는 설립자의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이는 바로 이찬수 교수가 아닌가. 내 종교만이 '선'이라고 믿는 재단이야 말로 강남대의 창학 이념을 정면으로 배반한 사람들이다. 학교를 떠나야 할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다.

이찬수 교수 파문은 우리 사회에 반성적 성찰의 계기를 준다. 흔히 우리는 한국사회에서 여러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한다. 나는 그것이 일차원적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분단 상황이 빚은 이념의 차이와 지역의 차이와 같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차별·억압·배제로 이끌 수 있는 차이들이 있기 때문에 신앙의 차이를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을 뿐이다. 이번 사태는 우리 사회가 아직 종교적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가 아니며 우리의 다종교는 앞으로 사회통합을 가로막을 위험 요인인데 다른 차이들에 가려 잠복해 있을 뿐임을 가르쳐주는 예가 되지 않을까?

비판정신이 꿈틀대야할 대학, 무얼 하고 있나

또한 이런 일이 대학에서 발생하고 이를 법에 호소해야 한다는 점은 이 사회의 대학인들과 지식인들의 모습에 대해 돌이켜보게 한다.

대학은 비판정신과 인문정신이 꿈틀대야 하는 곳이다. 그래야만 대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변에서 용인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침묵하거나 방관한다는 것은 앵똘레랑스를 용인한다는 것이다.

하물며 대학에서 일어난 일이다. 볼테르의 '광신자들이 열성을 부리는 것도 수치스런 일이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이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오늘의 한국의 대학들은 다만 지혜롭지 못하거나 비겁한 대학종사자들로 가득한 것인가.

강남대가 이찬수 교수 재임용을 거부한 까닭

강남대학교는 지난 1월 이찬수(45) 전 강남대 교수의 재임용 계약을 거부했다. 학교측이 내세운 명분은 교양필수 과목인 <기독교와 현대사회>를 강의하는 이 전 교수에게서 '기독교 창학 이념에 부적합한 사례가 발생한다'는 것. 강의 내용과 행동이 기독교적 창학 이념에 적합하지 않다는 게 그 이유다.

일부 학생들이 "기독교의 근본 원리와 부합하지 않는 종교다원주의적 강의"라고 항의한 것이 '부적절한 강의'의 단서를 제공했다는 것이며, 2년 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보낸 항의 공문이 '부적절한 행동'의 증거자료가 됐다.

지난 2003년 10월에 방송된 EBS <똘레랑스>, '단군상, 이성과 우상의 경계에서' 편에서 이 전 교수가 불상 앞에서 절하는 장면이 비춰진 뒤 한기총이 강하게 반발한 것이다. 이 전 교수가 기독교와 토착 문화, 기독교와 타 종교와의 조화를 강조하면서 불상에 절을 한 행동이 재임용 거부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이와 관련 교육인적자원부 교원소청심사위원회는 지난 5월 1일 "학교 측 평가기준이 주관적, 자의적이라 불합리하므로 재임용 거부를 취소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강남대는 이 결정에 불복, 교원소청심사위원회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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