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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 AP/연합뉴스
"블레어 수상! 나는 당신이 수상 관저에 머무는 것이 우리 당이나 나라를 위해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야당인 보수당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여당인 노동당에서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나온 말이다. 노동당 하원의원이자 국방부 부국장인 톰 왓슨은 직위를 사임하면서 블레어에 위와 같은 내용의 공개편지를 썼다.

결국 현지 시간 7일 오후, 블레어는 지금으로부터 12개월 안에 수상직을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현재 영국 언론들은 기사들을 쏟아내면서 노동당과 토니 블레어의 미래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이전부터 계속되어온 블레어 퇴진 분위기

대처에서 메이저로 이어지는 18년 동안의 보수당 정권에 종지부를 찍고, 노동당에 정권을 안겨준 영국 정치계의 수퍼스타 토니 블레어. 똑 부러지는 고급영어 억양에 화려하면서도 날카로운 언변, 좌-우파를 넘나들었던 '제3의 길' 정책. 그동안 '블레어'란 이름은 노동당을 하나로 묶는 대명사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상황이 180도로 달라져 노동당은 블레어 때문에 분열되는 중이었다. 97년부터 노동당 3기 집권인 현재까지 9년간 계속 수상직을 맡아온 블레어는 그간 당내외에서 유무형적으로 거센 사퇴 압력을 받아왔다. 이에 그는 3기 집권의 마지막날까지 수상직을 수행할 것이라 말하며 버텨왔다.

사실 블레어의 입지는 지난 2005년 5월 총선 때부터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당내 두 계파인 블레어계와 브라운계의 대립은 이미 격화되었다.

94년 브라운의 양보로 수월하게 당 대표가 된 블레어가 당권 포기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2003년 이라크전 적극 지지로 인해 상당수 의원들은 이미 블레어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상태였다.

영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작년, 블레어가 이끈 노동당은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야당과의 의석차는 166석에서 55석으로 확 줄었다. 그 뒤로도 블레어와 노동당의 인기는 계속 떨어졌으며, 급기야 올 5월 지방선거에서는 보수당에 대패했다. 의석수는 제2당을 유지했지만, 정당별 지지율은 제3당으로 밀려났다.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공개편지 사건

▲ 블레어가 1년 안에 수상직에서 물러날 것임을 보도하는 <가디언>지 인터넷판. 블레어의 퇴진문제가 거론되자 브라운이 자연스럽게 비교되며 떠오르고 있다. 좌측이 브라운, 우측이 블레어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는 와중에, 6일 공개된 톰 왓슨의 편지는 메가톤급 폭탄이었다. 잉글랜드 중부, 웨스트 브롬이치 이스트 지역의 노동당 하원의원인 왓슨은 행정직을 떠나면서 자기 당 대표인 블레어에게 거의 원색에 가까운 비난의 말을 했다. 그는 더 이상 블레어를 신뢰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편지 전문은 언론에 공개되었으며, 이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블레어는 왓슨의 편지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답신을 언론에 발표하며 진화에 나섰으나, 이는 오히려 사태 확산을 가져왔다. 내무부에서 일하던 칼리드 마흐무드 의원도 블레어에게 수상직 사퇴를 촉구하며 사임했으며, 이어 웨인 데이비드 의원 등 수 명의 의원들이 줄줄이 뒤따랐다.

블레어 사퇴 압력은 걷잡을 수 없이 당내에서 퍼져나가는 형국이 된 것이다. 이는 50여명의 노동당 의원들이 최근 연판장을 돌리고 있다는 보도가 나간 지 채 하루가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였다. 이들 의원들은 24일부터 열릴 맨체스터 전당대회에서 블레어에게 향후 거취에 대한 입장을 빨리 표명하라고 압력을 넣을 예정이었다.

며칠째 공개적으로 당내의 공격에 시달리던 블레어는 결국 7일 오후에 자신이 1년내에 수상직에서 사퇴할 것임을 언론에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블레어는 "이번 전당대회가 자신이 수상으로 있는 마지막 전당대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정확히 언제 물러날 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블레어 사퇴 천명을 보는 여러 시각들

블레어의 사퇴 천명은 런던의 한 직업기술학교 방문시에 이루어졌다. 학교 방문시, 주변의 많은 학생들이 "떠날 때가 되었다"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해서 블레어에 대한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케 했다.

각종 인터넷 뉴스 사이트에도 블레어를 옹호하는 기사나 게시물을 찾기가 꽤 어려울 정도다. "블레어의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가득하다. 정말 물러날 때가 된 것 같다", "예전에 비해 블레어가 너무 고집 세어진 것 같다", "안타깝지만 잘한 결정이다", "1년은 너무 길다" 등 블레어의 퇴진을 대부분 반기는 분위기다.

또한 블레어는 최근 헤즈볼라-이스라엘 전쟁에서도 휴전 권고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처럼 노동당내는 물론, 사회 전반적으로 반 블레어 감정이 확산되는 상황이다. 반면 블레어의 옛 동료들은 블레어를 두둔하고 있다.

노동당 정권을 창출해낸 브레인이자 현 EU 무역담당관인 피터 만델슨은 "현재는 광기의 상황"이라 말했으며, 아일랜드의 버티 아헌 총리는 "블레어는 탁월한 정치인"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미국 백악관 대변인 토니 스노우는 "블레어는 부시 대통령에게 있어서 가치있고 믿을 만한 조력자"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현재로선 블레어의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게 될 가능성이 가장 큰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도 블레어를 두둔하고 나섰다. 7일 스코틀랜드 지역을 방문한 브라운은 "블레어가 수상직에서 사퇴할 때를 알아서 판단할 것이며, 그 때까지는 서로 도와 당과 나라를 이끌어 갈 것"이라고 말했다. 브라운이 차기 총선을 위해 블레어의 순조로운 사퇴를 원하고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영국 언론들은 대략 블레어가 늦어도 내년 6-7월 경에, 노동당의 잭 스트로 하원담당관은 블레어가 임기의 절반을 채우고 내년 5월 중에 수상직에서 사퇴하지 않을까라고 추측하고 있다.

민심 잡기 열중하는 보수당... 영국 정가의 향방은?

보수당은 현재 노동당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진보 성향을 과시하면서 그간 민심 잡기에 열중해 온 젊은 대표 데이빗 캐머런(40)의 최근 모습 홍보에 더욱 열중하고 있다. 노동당의 내분으로 보수당은 반사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8월말, 캐머런은 남아공 방문시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예전 보수당 대처 수상의 남아공 정책은 잘못되었다"고 발언해서 언론의 집중 주목을 받았다. 또한, 5일에 인도를 방문해서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은 여러 안 좋은 문제들도 함께 야기하므로 좋은 면만을 봐서는 안된다"라고 발언했다.

노동당의 우파적 정책들을 감안해 본다면, 최근 영국의 좌파는 우파 성향으로, 우파는 좌파 성향으로 향하는 모습을 어느 정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단합된 보수당의 이미지와 분열된 노동당의 이미지가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들끓고 있는 노동당내 상황이 이번 블레어 수상의 퇴진 선언으로 어느 정도 진정 국면을 맞게 될지, 아니면 24-28일 전당대회 이후로 더욱 확대될지는 현재로선 예측이 불가능하다. 노동당이 위기를 이겨내고 형편없이 떨어진 지지율을 다시 끌어 올려 보수당과 다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자웅을 겨룰 수 있을지도 현재로선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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