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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후배 녀석이 하나 있다. 몇 년간 두문불출 고시공부를 하다가 자신의 두뇌를 원망하며 중도에 포기했다. 그동안 여자친구는 그를 기다리지 못하고 '말쑥한' 엘리트 회사원에게 떠났다.

후배는 명문대 출신도 아니고 내세울 만한 재주가 없었던 탓인지 곧 청년실업자로 전락했다. 아르바이트를 하자니 공부는 해야겠고 부모님께 손 벌리기는 미안했기에 용돈은 늘 부족했다.

▲ 청년실업자는 자판기 커피조차 여의치 않았다.(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이주빈
그 후배는 취업준비를 위해 집 근처 도서관을 다녔다. 늦은 나이에 도시락까지 싸달라고 할 수가 없었는지, 늘 밥만 싸 갖고 나와 도시락 집에서 싸구려 반찬만 사다가 도서관 구내식당에서 먹었다. 어쩌다 돈이 생기면 시장에서 2500원짜리 된장찌개를 사먹기도 했다.

가깝지 않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을 다녔고, 어쩌다 버스를 타야 할 때도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꼭 마을버스를 타곤 했다.

가끔씩 친구들끼리 거금 3500원짜리 설렁탕을 먹을 수 있는 날은 특별한 날이어야만 가능했다. 그날은 용돈을 두둑하게 받은 누군가 '쏘는 날'이다. 그럴 때면 몸보신이라도 한 듯한 포만감에 행복했다.

식후 졸음을 쫓기 위해 먹는 자판기 커피조차 부족한 용돈으로 여의치 않았다. 그렇다고 커피를 마시지 않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제일 싼 봉지 커피 한 박스와 종이컵을 꾸러미 채 구입하여 물에 타 먹곤 했다. 자판기를 관리하는 매점 아줌마의 눈초리가 늘 따가웠다. 이렇게 취업을 위한 고달픈 나날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입사원서를 지참한 채 땀을 흘리며 시내의 한 회사로 향했는데 마침 근처에서 학교 여자 후배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녀는 막 식사를 끝낸 듯 보였고 곧바로 인근 유명 커피전문점에 들어가 '무려' 5천원짜리 커피를 마시더란다.

공부도 못하고 머리가 텅 비었다고 소문났던 그녀가 시내의 대형 커피숍에서 다리 꼬고 앉아 잡지를 읽으며 한가하게 커피를 마시는 모습은 마치 "고생 많다. 근데 난 니들과 다르거든?" 하며 비웃는 듯 보였다.

그 광경을 본 후배는 괜히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은근히 부아가 나고 눈에서는 불이 뿜어 나오는 것 같았다고 회고한다. IMF 시절의 이야기다.

우울한 20대 남성들의 슬픈 자화상, 된장녀

▲ 인터넷에 떠도는 된장녀 키우기 게임 화면 캡처
최근의 인터넷에서 퍼지고 있는 '된장녀' 논란을 지켜보며 이제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30대 중반에 접어든 후배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사정이 그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한다.

사이버 세상이 '된장녀' 논란으로 시끄럽다. 안티 된장녀 사이트가 생겨났는가 하면 '된장녀 키우기 게임'까지도 등장했다고 한다. 한 포털 사이트의 게시판에 '된장녀의 하루'라는 글이 올라오면서 촉발된 이 논란은 인터넷을 타고 급기야 남녀 간의 성대결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된장녀'가 신드롬으로까지 불리며 확산된 원인에 대해서는 저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는 '불편한 자기와 비교해 타인의 좋은 현실에 대해 가지는 열등감'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남성적인 시각이 너무 짙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일부는 지나치게 여성에게 가혹한 '된장녀' 신드롬을 두고 '한국사회의 남성 중심적인 사고'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혹자는 자기와 맞지 않는 소비스타일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는 행동심리라고 주장한다. 하나는 너무 광범위하고 또 하나는 너무 좁은 해석이다.

'된장녀' 신드롬의 원인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우리 사회 우울한 20대 남성들의 슬픈 자화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뉴요커 흉내를 내며 무작정 외국문화를 동경하는 허영심에 가득찬 여성'들에 대한 비난을 통해 역설적으로 우리나라 20대 남성 네티즌이 처한 비극적인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 청년실업을 강조한 궤도연대의 포스터
ⓒ 궤도연대
지난 IMF 이후 청년실업은 국가적인 골칫거리로 등장하였으며 그 후 20대 남성들의 삶의 질 또한 급격히 저하되기 시작했다. 대학은 진리의 전당이 아닌 직장인 양성소로 전락했으며 '졸업은 곧 백수'라는 암울한 공식이 생겨났다. 20대 젊은이들에게 여유와 낭만이란 좀 비약적으로 말하면 대한민국 1%인 이미 '그들만의 특권'이 되어버렸다.

20대 남성들이 겪는 입대와 청년실업과 같은 고민들, 더불어 진지한 내면의 소통보다는 외적인 조건을 좇는 젊은 여성들의 세태는 행복하지 못한 젊은 남성들을 양산하고 있다. 이로부터 이들의 불만족스러운 삶은 종종 인터넷상에서 집단적으로 난폭한 성향을 띠게 된다.

이들 20대 남성 네티즌들의 분노는 정치나 사회를 탓하는 수준을 초월한 지 이미 오래. 이들의 분노의 배출구는 오히려 '만만한' 여성을 향해 공격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있었던 군가산점 논란 사건에서도 보듯이 군 복무로 인해 여성보다 미래를 위해 투자해야 할 '알토란' 같은 2년을 더 희생당하고도 사회적으로 보상을 못 받는다는 이들의 상대적 피해의식은 이러한 분노를 더욱 돋우고 있다.

된장녀 기사에 달리는 폭탄 댓글들을 보라. 응어리진 분노와 불타는 적개심은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굶주린 병사들의 눈빛을 연상케 한다.

집단의 불만은 초고속 인터넷을 타고

▲ 한국은 인터넷 인프라가 세계 최고, 혹은 인터넷 속도만 초고속이 아니라 인터넷상의 의제 설정 및 확산 속도도 '세계 최고'에다가 '초고속'이다.(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남소연
된장녀는 20대 여성의 생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한 남성들까지 가세하여 지극히 평범한 20대 여성들조차도 그들만의 관점에서 '된장녀'로 낙인을 찍으며 자위하는, 악의적인 해석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군가산점 논란, 가수 유승준의 병역기피 사건 등 군대에 관한 의제라면 일사분란하게 단결했던 남성들에게 한국의 인터넷 문화는 정말 톡톡히 한몫을 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사실 한국은 인터넷 인프라가 세계 최고, 혹은 인터넷 속도만 초고속이 아니라 인터넷상의 의제 설정 및 확산 속도도 '세계 최고'에다가 '초고속'이다. 한 가지 구미가 당기는 먹음직스러운 주제가 식탁에 올라오면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이 포크로 마구 찍어댄다.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광속으로 확산된다. 전후 사정이나 사건의 본질? 고리타분한 그런 것들은 찾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무의미하다. 어떤 주제가 이들의 불만족을 충족시켜 주냐가 중요할 뿐이다. 이들의 집단적 불만과 공격성이 한국의 '초고속' 인터넷 문화와 결합하여 '된장녀' 광풍이 부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상대방의 성(性)을 씹는 것처럼 내부 단결을 꾀하고 절대적인 호응을 얻으며 두들기기 좋은 소재는 많지 않다. 제 정신 가진 남성들 치고 '된장녀'를 지칭하는 '외국문화를 좇는 허영심에 가득찬 여성'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녀들을 비아냥거리는 남성들의 목소리도 충분히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일부에 의해 자행된 과소비와 '문화적 허영'이 전체 젊은 여성들의 행태인양 '마녀사냥'처럼 매도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된장녀'는 여성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결합되어 공격적인 용어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TV에서 '할인카드' 발언으로,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갖가지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어 썼다는 억척 연예인이 '된장녀'가 되고, 재벌가와 결혼하는 여자 아나운서를 '된장녀'의 수뇌급 정도로 탈바꿈시키는 20대 남성 네티즌들.

지금 그들은 무언가 불만족스럽고 단단히 화가 나 있다. 이들이 100% 된장녀들만 두들기면 좋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일까? 화가 몹시 나 있는 남성 네티즌들. 개똥녀, 시청녀, 된장녀…. 이제 다음에는 또 무슨 '~녀'가 인터넷 세상에 등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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