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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에 얽힌 아스라한 추억

어렸을 적 5일장인 광주 서방면 말바우 장날이 돌아오면 온 동네가 들썩거렸다. 어른들은 저마다 쌀이나 보리, 콩 등 곡식 몇 됫박이나 계란 몇 줄 등 내다 팔만한 물건을 챙긴 다음 크고 작은 보따리를 싸 지게에 짊어지거나 머리에 인 채 새벽길을 나섰다.

우리 속담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는데 강남이란 어쩌면 장날을 가리키는 말인지 모른다. 내다 팔만한 물건이 변변치 않은 사람은 기어코 닭 한 마리라도 산채로 보듬고 장에 가는 일행을 따라가서 운동화나 고무신 따위를 사오는 일도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나도 가끔 겁 없이 할머니를 따라 나서곤 했다. 광주까지 가는 길은 구절양장의 길이었다. 채 동이 트기도 전에 서둘러 길을 나서 해발 400m가 넘는 뒷산 가내미재를 숨을 헐떡거리면서 넘는다. 가내미재를 지나고 나면 제법 평탄한 길이 이어지는 금단동 고개다.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으면 어느 결에 가내미재보다 훨씬 가파르게 치솟은 산길이 기다린다. 그만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달래가면서 각화재를 향해서 길을 재촉한다. 각화재만 넘어서면 말바우장은 거지반 다 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고개 마루에 올라서면 주루룩 땀방울이 흘러 내리는 사람들의 이마를 산들바람이 씻어주고 간다. 광주 시가지가 우중중한 모습을 드러낸다. 저 멀리 중앙여고 옆 전남제사공장의 시커먼 굴뚝이 가물거리는 모양이 마치 아지랑이 같다.

"저 공장에서 번데기가 나온단다"고 할머니는 거푸 일러주시곤 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번데기를 처음 맛본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광주 공원에서 열렸던 산업 박람회 견학 길에서였다. 삼각뿔 모양 접어진 신문지 속에 담긴 번데기는 얼마나 고소했던가. 고모들과 함께 누에를 직접 길러 본 적이 있는 나로선 징그러운 누에의 몸에서 그토록 맛있는 번데기가 나온다는 게 일종의 수수께끼 같았다.

말바우장은 물건을 흥정하는 소리로 지축이 흔들릴 정도였다. 장이란 무기물이 아니라 팔닥팔닥 살아 숨쉬는 유기체였다. <파장>이란 시에서 신경림 시인은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했지만 흥정을 앞에 둔 장터에서 만만하고 못난 사람이란 어디에도 없다. 장꾼이라면 5원이나 10원을 더 받고 덜 받는 일에 생사를 걸듯 매달리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까.

당시에 달걀 한 줄에 30원 이짝저짝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계란 한 줄에 단돈 5원이라도 더 받으려는 욕심에 할머니는 뙤약볕 아래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버팅기고 앉아 계실 때도 있었다. 가지고 간 것들을 다 팔고 나면 점심 시간이 한참 기울어 있기 일쑤였다. 뱃속 거지가 벌써부터 쪼르륵 소리를 내는 나를 데리고 할머니는 국수집을 찾아 들어가신다. 국수집의 삐그덕 거리는 긴 나무 의자에 여럿이 빙 둘러앉아 먹는 잔치국수 맛은 황홀 그 자체였다.

손님이 국수를 주문하면 주인 아줌마는 채반에 미리 받쳐두었던 여러 개의 국수 덩어리 중 하나를 투가리에 담는다. 그리고 양은 솥단지에서 증기기관차처럼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끓고 있는 멸치 국물을 퍼다가 국수에 내리붓는다. 담았던 국물을 한 차례 쏟아낸 다음 다시 국물을 담는다. 국수를 담은 투가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와서 실내의 공기를 덥히고 사람들의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힌다.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아, 잘 먹었다!"고 중얼거리는 사람들의 표정은 포만감으로 넘쳐난다.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싶은 사람은 추가로 사기 대접 한 그릇에 철철 넘치도록 왕대포를 따라 마시기도 했다. 어린 날 장터에서 먹었던 국수 맛은 기막히게 좋았다. 그러나 그 추억은 이제 한갓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남아있을 뿐이다.

▲ 대전 중앙시장 내의 허름한 국수집
ⓒ 안병기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 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치집 같아도
어느 곳에 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시 '국수가 먹고 싶다' 전문)


맛에 대한 최상의 기억을 만드는 것은 궁핍이다

어느 날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무렵 삶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마음을 다친 시인은 거리로 나선다. 시인은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어진다.

시인은 함께 국수를 먹고 싶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늘 울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이 함께 먹고 싶은 사람들의 목록에 올려진다.

유유상종이라고, 살아가는 처지가 엇비슷한 사람들끼리 빙 둘러앉아 추렴이라도 하듯 국수 한 그릇씩 말아먹으면서 더러 실없는 몇 마디 말이라도 주고받는다면 세상의 모서리에 다친 자신의 마음도 얼마간 위로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시인은 믿는 듯 하다. 스스럼없는 만남을 통해 '세상에 상처 입은 건 나뿐만이 아니구나'라는 걸 확인함으로써 새삼스럽게 위안을 받고 싶은 것일 게다.

세상은 늘 잔칫집 같이 떠들썩해도 한켠 구석에는 숨죽여 우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속이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다. 직선의 삶을 사는 힘없는 사람들이 위선의 삶을 사는 힘있는 자들에 맞서서 자신들의 삶을 지켜낼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은 법이다. 동병상련이란 가장 초보적인 연대의 감정이 그중 유효한 수단일 터이다. 지난 시절의 국수집 혹은 국밥집은 동병상련이라는 병을 앓는 사람들끼리 만드는 정다운 소통의 장(場)이었다.

소설가 황석영은 <맛과 추억>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든 맛을 잃어버렸다. 맛있는 음식에는 노동의 땀과, 나누어 먹는 즐거움의 활기, 오래 살던 땅, 죽을 때까지 언제나 함께 사는 식구, 낯설고 이질적인 것과의 화해와 만남, 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며칠,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궁핍과 모자람이라는 조건이 들어 있으며 그것이 맛의 기억을 최상으로 만든다."

뒤집어 말하자면 궁핍과 모자람이라는 조건이 들어 있지 않으면 맛의 기억은 최상의 것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허름한 국밥집이나 국수집 등이 점점 사라져 간다. 사람들은 저마다 대형 음식점으로 몰려가서 왁자지껄 떠들면서 식욕을 충족시킨다. 과연 그런 곳에서 맛의 기억이나 추억을 남긴다는 게 가능할까.

변덕으로 죽을 끓이는 세상이다. 변태가 정상을 찜 쪄 먹기도 하는 하수상한 세월이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 이래 허름한 식당에 대한 내 애정전선은 변화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시인처럼 어머니 또래의 여자가 끓여 주는 국수가 먹고 싶을 때나 삶에 지친 사람들과의 소박한 연대가 그리울 때 찾고 싶은 곳. 세상이 각박하다 말들 하지만 찾아보면 아직 어딘가에 마음이 닫히지 않은 식당이 있을 것이다. 사람 사는데 그다지 많은 위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국밥 한 그릇, 국수 한 그릇에도 마음이 따스해진다. 오늘 저녁은 그런 곳에 찾아가 국수나 한 그릇 먹으러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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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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