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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류산 정상에서 바라본 당동만
ⓒ 고성군
한 시대의 역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비롯한 그 시대 사람들의 삶에 따른 총체적 기록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조상들의 지혜를 배우기도 하고, 조상들의 어리석음을 통해 다시는 그러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수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역사는 한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자 그 시대의 사실적 기록이다. 근데 이러한 사실에 뿌리를 둔 역사가 잘못 기록되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한 제대로 기록된 역사를 후세 사람들이 잘못 해석하여 왜곡된 역사를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면 또 어떻게 해야 할까.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승자의 논리에 따른 잘못 기록된 역사는 후세 사람들이 반드시 바로 잡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적진포해전은 그 규모나 장소 등이 각종 문헌에 제대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해석을 잘못해 지금까지도 그 장소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 고성군 문화관광과 문화재 담당

임진왜란 때 해전 승첩지 중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경상우수사 원균의 연합함대에 의해 왜군 대, 중선 13척을 처부수고, 조선 수군의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적진포해전 장소가 경남 통영시 광도면 적덕해안이 아닌 경남 고성군 당동만 일대로 밝혀졌다.

▲ 당항포해전
ⓒ 이종찬
고성군(군수 이학렬)은 지난 3월1일부터 오는 8월31일까지 경남도와 경남 도내 20개 시군에서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 등에 대한 역사찾기사업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는 '우리 고장 임진난 역사찾기'에 접수된 자료에서 적진포해전 장소에 따른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최근 발견되었다며, 역사 전문가의 확실한 고증을 요구하고 나섰다.

고성군은 "임진왜란 해전 승첩지 중 적진포해전(赤珍浦海戰)에 따른 유홍렬씨(<고성신문> 투고)의 자료를 접수, 향토사학자로 구성된 고성군 심의위원회에서 상세히 검토한 결과 적진포해전 장소가 그동안 알려진 통영시 광도면 적덕 해안이 아니라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 일원으로 밝혀졌다"고 못 박았다.

고성군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앞 통영시 향토사학자 '김일룡'씨가 연구논문에서 적진포해전이 고성군 당동만 일원이었다는 것을 구체적인 연구사례를 들어 주장했다. 하지만 그 당시 김씨의 연구논문은 학계의 호응을 얻지 못한 채 기록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성군 관계자는 "각종 문헌 등에 적진향(당동)의 기록이 명백히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충무공의 장계, 난중일기, 선조실록 등의 기록이 뒷받침하고 있어 사실증명이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 이에 따라 "고성은 당항포해전에 이어 또 하나의 임진란 전승지로서의 빛을 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 노량해전 가상 전투
ⓒ 남해군
<통영지>에는 '적진포'라고 알려진 통영시 적덕은 조선 후기인 1890년까지도 행정동리명을 갖추지 못한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성군 문화관광과 문화재관리담당은 "적진포해전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각종 문헌에 잘 정리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후세에서 해설을 잘못 한 것 같다"며, "해군사관학교 이모 교수도 적진포해전을 고성 당동만으로 기록하고 있어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문화재관리담당은 "이번에 접수된 자료가 사학과 교수 등 전문가로 구성된 경남도 고증위원회의 심의를 거치고 나면 중앙의 해당 부처 등에 이 사실을 정식으로 접수, 고성군의 역사바로잡기운동을 한층 더 구체적으로 펼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고성군은 이 충무공의 1,2차 승첩지인 당항포와 더불어 또 한 차례의 승첩지인 적진포 해전지가 고성 당동만으로 밝혀짐에 따라 군에서 중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해군교육사령부 유치계획에도 한층 탄력을 받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유포터> <씨앤비> <시민의신문> <시골아이>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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