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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내버스 기사 시절 겪었던 이야기를 담은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를 쓴 안건모씨.
ⓒ 조성일
월간지 <작은책>의 편집장인 안건모는 내일모레면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인 소위 '58년 개띠'다.

잡지 편집장이란 직함에서 으레 '먹물'을 연상하겠지만 그의 이력은 우리의 '상식'을 배반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생활을 하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에 들어갔다가 2년 만에 중퇴하고 20여 년간 서울에서 시내버스를 운전했다. 시쳇말로 기름밥에 절은 베테랑 '운짱'이었다.

또하나. 현장 노동자에서 잡지 편집장으로의 변신을 '신분상승' 쯤으로 바라보려는 우리의 시선에 대해 역시 '상식의 배반 법칙'은 작동한다. 고상한 생활은 고사하고 수입이 반 토막 났다면 알만 하잖은가.

하지만 안건모는 여전히 활기차다. 6월 21일 오후 2시, 인터뷰를 위해 <작은책> 사무실로 찾아갔을 때 아직 점심 전인 그는 이것저것을 챙기느라 분주했다. 때마침 배달된 자장면을 먹고, 이번에 나온 그의 책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보리)>에 추천사를 쓴 일본 도쿄에서 시내버스를 운전하는 미야우치 마사요시씨와 함께 앉아 인터뷰 같지 않은 정담을 나누었다.

운명을 바꿔놓은 만화책 한 권

안건모는 나이 마흔 즈음에 '열심히 일만 하는 근로자'에서 '이 세상의 주인인 노동자'로 변신했다.

버스 운전을 하며 서울 홍제동 지하방에 살던 1992년, 동네 주민독서실에서 한 권의 책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제도권 교육을 많이 받은 건 아니지만 학교에서의 멸공 극우 교육 덕택에 '혁명'이란 낱말만 봐도 가슴이 벌렁벌렁하던 그가 집어든 것은 만화책 <쿠바 혁명과 카스트로>. 첫 장에 씌어 있는 글귀가 그의 삶을 흔들어놓았다.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서 마침내 승리를 쟁취한 쿠바의 민중들에게 뜨거운 마음으로 이 책을 바친다.'

"그 때 카스트로는 김일성만큼 무서운 독재자로 알고 있었는데, 엄청난 충격을 받았죠. 이 세상에서 북녘의 김일성과 쿠바의 카스트로보다 한국의 전두환과 쿠바의 바티스타가 먼저 없어져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하면서 이 책은 저를 어둠에서 끌어냈죠. 세상의 다른 한편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이같은 깨달음은 그로 하여금 <태백산맥> <체 게바라> <노동의 새벽>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같은 책을 골라 읽게 했다.

그는 독서를 통해 독재자들 뒤에 제국주의 미국이 있고, 그 독재자들 밑에서 멸공 극우 사상을 등에 업은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권리를 찾으려고 하면 '빨갱이 사상'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자신들은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아울러 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야 할 노동자들이 지옥같은 현장에서 죽도록 일만 하고 임금도 쥐꼬리만큼 받고 겨우겨우 살아왔다는 것도 알게 된다.

<작은책>이 키운 글 쓰는 노동자

▲ 노동자들의 잡지 <작은책>의 편집장으로 변신한 안건모씨.
ⓒ 조성일
"글은 배운 사람만 써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같은 문법을 먼저 알아야 쓰는 줄 알았죠.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삶과 일터 이야기를 쓰면서 가슴이 확 뚫리는 것 같았습니다. 어렵게 살아왔던 일터 이야기를 하면서, 사업주과 관리자들이 탄압하는 유치한 행태를 마음껏 비꼬면서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릅니다."

그의 활동무대는 그가 지금 맡고 있는 잡지 <작은책>이었다. 1995년 신문 광고에서 읽은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작은책>의 슬로건은 그를 '근로자'에서 '노동자'로 변신시키는 또 하나의 자극제였다.

"그때 <작은책>에서 원고지에 글을 써서 보내라고 했으면 아마 못했을 겁니다. 맞춤법이 틀려도 자기들이 다 교정을 보니까 걱정하지 말고 보내라고 해서 용기를 냈습니다. 제가 쓴 원고가 어떻게 고쳐져서 잡지에 실렸는지를 비교하며 글쓰기 공부를 했었습니다."

이렇게 글쓰기에 입문한 그는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 쓰기>나 이태준의 <문장 강화> 같은 책을 찾아 읽으면서 글쓰기 기본기를 다졌고, 물만난 물고기마냥 그의 글 솜씨는 일취월장하여 <작은책>에서 연재를 했다.

1997년엔 생활수기 '시내버스를 정년까지'를 써서 전태일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공인(?)받은 그는 드디어 일간지에도 진출(?), 1년 남짓 <한겨레>에 칼럼을 쓰기도 했다. 글쓰기가 곧 노동자 운동의 한 방법이라고 믿는 그는 1998년 버스 운전기사들의 모임인 '버스 일터'를 만들어 소식지를 펴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와 <작은책>의 인연은 이렇듯 독자로부터 시작됐다가 기고자로, 편집위원으로, 편집장으로 이어졌고, 2004년 12월 24일 시내버스 기사로서 마지막 운전을 한 후 객원의 신분에서 상근으로 신분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이 잡지의 모든 살림살이와 제작을 책임지는 발행인 겸 편집인, 편집장을 맡고 있다.

투박한 이류잡지 만들고 싶어

▲ 인터뷰 내내 함께 자리한 일본 도쿄 시내버스 운전사인 미야우치 마사요시씨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안건모씨.
ⓒ 조성일
"사실 20여년을 해오던 시내버스를 떠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급여가 줄어들고, 또 저를 믿고 함께 하던 동료들이 눈에 밟히고, 특히 제가 감히 잡지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컸습니다. 그러나 저같은 노동자들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진보 월간지 하나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제 한 몸 던졌죠."

안건모가 인터뷰하자는 요청을 대뜸 받아들였던 것은 자신의 책보다 잡지 <작은책>을 알리기 위해서다. <작은책>이 어떤 잡지인지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홍보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또 <작은책>은 그가 맡고 나서 지금까지 서너달 간신히 흑자를 내는 등 조금씩 나아지긴 하지만 여전히 적자이기에 많이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월간지들이 '자기가 양보하면 세상은 아름다워진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저희는 좀 다릅니다. 비판하고 싸워 극복해야 비로소 좋은 세상이 온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희 잡지에는 다른 잡지에 없는 비정규직 이야기를 비롯해 대추리, KTX 여승무원의 투쟁이 담긴 현실이 있습니다."

그는 <작은책>도 어느덧 많이 세련됐다며 지금보다 더 투박한 이류 잡지를 만들겠다고 했다.

다른 잡지에서 느낄 수 없는 <작은책> 만이 담을 수 있는 문체로 쉽고 재미있게 '일하는 사람이 글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신념을 실천하는 잡지를 위해 8월부터는 약간의 개편도 할 작정이다.

무엇보다 그는 관심은 있는데 용기를 내기 못하는 노동자들이 특히 적극적으로 기고해달라고 했다. <작은책>이 자신에게 글쓰기를 권유했던 그 정신은 여전히 그대로라면서 마음껏 써서 보내달라고 했다.

버스 승객과 기사에게 함께 요구되는 4가지 능력

▲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 겉그림.
ⓒ 보리
서울에서 시내버스를 타려는 승객은 적어도 4가지 능력은 갖추어야 한다. 첫째가 눈이 좋아야 하고, 둘째가 달리기 실력이 있어야 하고, 셋째가 눈치가 빨라야 하고, 넷째가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정도의 상식은 누구나 공감하리라 믿고 부연설명은 생략한다.

그런데 이 4가지 능력이 시내버스 운전기사에게도 똑같이 요구된다고 안건모는 말한다.

눈이 좋아야 함은 멀리 숨어서 단속하는 경찰관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고, 달리기 실력이란 운전하면서 옆 차 백미러와 내 차 백미러 사이에 두꺼운 도화지 한 장 끼우면 딱 맞을 정도의 사이를 두고 시속 70~80km는 시쳇말로 '조질' 수 있어야 종점에 들어가서 오줌이라도 눌 수 있기 때문이다.

눈치가 빨라야 함은 아무리 잘 조진다 해도 정류장을 무정차로 통과해야 그나마 밥 먹을 시간을 벌기 때문. 그러니 가뭄에 콩나듯 서있는 손님이 내 차를 탈 것인지 아닌지를 눈치로 잡아내야 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 인내심은 끝없이 싸우자고 덤비는 옆 차 기사들, 손님, 그리고 회사와 일일이 맞설 수만은 없기에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내버스 운전사가 하고 싶어서 난폭운전을 하는 게 아니라 구조적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은 없지, 운행탕수는 맞추어야지, 길은 막히지, 그 어떤 용뺀 재주를 가진 운전자도 별 수 없게 되죠."

현장을 떠났지만 그래도 20여 년을 시내버스 운전으로 밥먹어 온, 명색이 '시내버스 전문가'인 그에게 요즘 시내버스는 안녕한지를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다. 요즘 서울의 시내버스 기사 자리가 인기라는 얘기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한다.

"그건 다른 분야가 워낙 안 좋으니까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지, 시내버스가 엄청 좋아서가 아닙니다. 요즘 택시가 됩니까, 화물이 됩니까. 그나마 시에서 지원을 해주니까 시내버스가 상대적으로 나아 보이는 것뿐입니다."

상식 통하는 살맛 느끼는 세상 만들고파

시내버스 기사로 정년퇴직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잡지 편집장으로 변신했지만 여전히 마음은 시내버스에 가 있다는 안건모.

앞 뒤 사람이 모두 차출될 때 그 사이에서 끼어 팔자에 없는 보안부대에서 군대생활을 하기도 했던 그는 책읽기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과 인생관이 바뀌었듯 소박한 잡지 <작은책>으로 세상을 바꾸어 놓으려고 한다. 상식이 통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살맛 느끼는 그런 세상 말이다.

안건모는 이 인터뷰가 끝나면 인터뷰이에서 거꾸로 인터뷰어로 변신하여 <작은책> 다음호에 실릴 도쿄의 시내버스 운전기사 미야우치 마사요시를 인터뷰한다. 그리고 저녁엔 노동자들에게 글쓰기 강의를 하러 가야한다며 시계를 들여다본다.

인터뷰 내내 자리를 함께 했던 미야우치 마사요시씨가 그의 책 앞에 쓴 '추천하는 글' 일부를 인용하면서 인터뷰를 끝낸다.

"승객들 또는 동료들과 때로는 어울리며 때로는 비걱거리면서 진지하게 살아가려는 모습에는 공감이 가기도 하고 회사 관리자와 맞서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어용노조를 비판하는 모습은 속 시원하고 통쾌하기도 했다."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

안건모 지음, 보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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