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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우당은 지금 실록이 짙푸른 장원의 숲이다.
ⓒ 정윤섭
유독 비가 자주 내린 5월 탓인지 녹우당은 녹음이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실록이 절정을 이룬 요즈음의 녹우당은 ‘녹우(綠雨)’라는 당호의 뜻이 실감나게‘녹색의 장원’을 연출하고 있다.

녹우당의 당호가 지어진 것이 곡우에 내리는 비로 인해 모든 자연의 푸르름이 더해지고 곡식들은 이 비로 인해 잘 자라게 된다는 뜻을 담고 있어, 아마 이 당호를 지은 옥동 이서가 이때쯤에 백련동을 방문하고 푸른 실록의 장원에 터를 잡은 고택을 ‘녹우당(綠雨堂)’이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해남읍 백련동 종가에서 출발한 '녹색의 장원 녹우당'은 백련동의 입향조 어초은 윤효정의 자취를 쫓아 선조들이 묻혀 있는 강진 한천동, 덕정동을 더듬어 보았다.

윤효정은 그의 세거지인 강진 덕정동에서 해남의 향족인 정호장의 사위가 되어 해남의 현치소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는 해남현읍을 떠나 처가살이를 마치고 드디어 분가를 하게 되어 백련동에 새로운 터전을 잡게 된다. 남귀여가혼(南歸女家婚, 처가살이)이라는 당시 결혼 풍습 속에서는 결혼초의 처가살이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는데 어초은도 처가살이를 마치고 독립을 하여 일가를 이루게 된다.

대 향족의 사위가 되었던 윤효정은 분가를 하면서 얼마만큼의 재산을 물려받았을까? 당시는 남녀균분제(男女均分제)에 의해 딸에게도 재산을 똑같이 물려주었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해오는 말에 특히 윤효정의 부인이 된 정호장의 딸이 기지(아니면 떼를 써)를 발휘하여 더 많은 재산(땅)을 물려받았다고 해 나름대로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음을 알 수 있다.

▲ 어초은 제각앞에 조성된 차밭은 주변 자연의 숲과 잘 어우러져 있다.
ⓒ 정윤섭
그 땅이 녹우당 앞을 비롯한 옆 동네인 신안마을 앞 들판이었다고 하며 지금도 이곳 일대는 대부분 녹우당 종가의 땅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이후 해남윤씨가 기틀을 잡는데 중요한 기반이 된다. 어초은 윤효정이 터를 잡기 전 장원의 땅 백련동은 처음에‘도강김씨(道康金氏)’들이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이 터에 어초은이 들어 온 이후 이곳은 해남윤씨 마을로 변한다.

윤효정은 이곳 백련동을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을까, 고산 윤선도를 풍수의 대가로도 말하지만 전국에서도 최고 길지 중에 한 곳으로 말하고 있는 이곳 백련동을 선택한 것을 보면 윤효정의 안목 또한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가들은 풍수를 통해 하늘과 땅을 꿰뚫는 이치를 기본적으로 터득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성리학과 풍수사상의 결합

▲ 어초은의 성리학적 풍수사상이 반영되어 조성된 연지로 백련동이라는 마을이름이 이곳에서 유래하고 있다.
ⓒ 정윤섭
백련동 녹우당은 옛 선비(사대부)들의 이상향처럼 느껴진다. 어초은(漁樵隱, 1476~1543)은 1501년 26세에 성균관생원에 합격하는데, 벼슬에 미련을 버리고 오직 농업과 자손교육에 힘쓰며 살아간다. 고기나 잡고 땔나무를 하면서 살겠다는 어초은(漁樵隱)의 호가 이러한 사상을 잘 말해준다.

녹우당은 어초은이 자손들에게 바람직한 인격형성에 도움이 되는 성리학의 실천적 사고를 자연환경에 담아 이를 전통풍수 사상에 맞추어 백련지를 꾸미고 조성한 원림이라 할 수 있다. 녹우당은 어초은의 이러한 사상이 가장 잘 반영된 곳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가장 잘 계승, 발전시킨 것은 물론 고산 윤선도다. 우리나라 원림은 유교와 노장사상이 짙게 반영된 자연 순응형 정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녹우당 원림 역시 순수한 자연관과 성리학적인 사고에 근거하여 조성한 자연순응형 원림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정원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그러나 이 정원은 규모가 작고 정형화된 틀속의 정원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가원(家園), 임원(林園), 임천(林泉), 원림(園林) 등의 명칭이 쓰였다고 한다. 이중 녹우당과 가장 적절한 것은 원림(園林)또는 장원(莊園)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마을 뒷동산에서 놀았던 그 동산의 개념처럼 원림(園林)은 자연의 풍치를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과 정자를 배치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녹우당은 아마 이러한 동산의 개념이 잘 반영된 원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녹우당은 원림보다는 장원이라 더 부르고 싶어진다. 그것은 1만평의 집터에 50만평에 달하는 주변 자연과의 조화가 주는 호방함의 맛과 격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격은 건물 자체뿐만 아니라 고택이 자리 잡고 있는 터에서 전해지는 호방감이기도 하다.

집터의 규모는 1만여 평 되지만, 집터를 둘러싼 전체 터는 50만 평 정도 되는데 이곳에는 풍수에서 말하는 소위 사신사(四神砂)인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가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 포함된다.

녹우당이 녹색의 장원이라 불릴 수 있는 특징은 무엇보다도 사신사가 아주 훌륭하다는 점이다. 풍수적인 안목에서 볼 때 녹우당은 현무에 해당하는 뒷산부터 아주 잘생겼다. 뒷산인 덕음산(德陰山·192m)은 규모가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이다.
왜 이름이 덕음산일까?

해남윤씨가의 유거지를 보면 이러한‘덕(德)’자와 관련이 깊은 산이나 이름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어초은의 아버지와 선조들이 모셔져 있는 강진 덕정동(德井洞), 도선산인 한천동 영모당 뒷편의‘덕암산(德岩山)등에서도 이미 쓰여지고 있는 덕자 지명이다. 이러한 덕자 관련 지명은 여러 곳에서 쓰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덕음산은 중후하고 세련된 신사의 인품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덕음산은 굳이 해석하면 '덕의 그늘'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산 이름에 굳이 덕(德) 자를 집어넣은 이유는 풍수적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덕음산은 풍수가들에 의하면 토체(土體)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산의 정상 부분이 한 일(一) 자처럼 평평한 산을 풍수에서는 토체라고 부르는데, 흔히 두부를 잘라놓은 것 같다고 해서 일컫는 것 같다.

그런데 음양오행에서 토(土)는 덕을 상징하며, 토는 어느 한쪽에 치우지지 않으므로 균형 감각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토를 덕이라고 표현하는데, 무조건 후하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균형 감각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게 덕의 덕목이기 때문이다. 덕음산은 돌출된 바위나 울퉁불퉁한 기복이 없는 산이다. 전체적으로 단정함과 깔끔함이 돋보이는 산이다. 한마디로 덕스럽게 생겼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일설에 의하면 덕음산의 중턱에 조성된 비자나무 숲(천연기념물 제241호) 또한 고산 윤선도가 돌출된 바위나 나무가 없는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비자나무숲을 조성하였다고 하여 풍수적 조영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적어도 이곳 녹우당은 자연을 통해 거의 완벽한 원림자연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천문과 풍수의 조화

녹우당에 서서 주변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면 오른쪽 방향의 산봉우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주변 봉우리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봉우리인데, 바로 문필봉(현지인들은 말뫼봉 또는 호산이라 부른다)이다. 문필봉은 유교사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봉우리다. 이는 많은 학자를 배출할 수 있는 형국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일제하에 일본사람들이 인물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필봉 정상부분을 깎아내렸다고 한다.

▲ 녹우당은 풍수의 사신사가 완벽하다고 말하고 있다. 덕음산 정상에 서면 좌우 신사와 문필봉, 안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 정윤섭
실제 해남윤씨가 인물들을 보면 전 윤관 대법관을 비롯하여 그 일가에 법조인들이 많다. 또한 감사원장 후보 물망에 올랐던 윤성식씨 등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많아 이같은 풍수적 영향을 생각해보게 한다. 후손들이 잘되려면 양택(집)과 음택(묘)의 자리를 잘 잡아야 한다는 말처럼 해남윤씨가 인물들이 모두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또한 남쪽의 주작에 해당하는 산을 보통 안산(案山)이라고 부르는데 안산은 좌정하고 앉아 있을 때 정면에 마주 보이는 산이다. 안산은 너무 높아도 안 되고 너무 낮아도 안 되며 적당한 높이가 좋다고 한다. 안산이 너무 높으면 위압감이 들고 답답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반대로 너무 낮으면 허한 감이 들어서 안정감이 적으며,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차단하는 기능이 약해진다. 녹우당의 안산 높이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당한 높이다.

녹우당에서 바라다 보이는 안산인 옥녀봉은 ‘옥녀탄금형’의 해남현치소의 풍수에서도 한 가운데인 중요한 핵심에 위치하고 있다. 옥녀봉이라는 지명은 풍수와 관련되어 지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옛 도읍지나 현치소에 이러한 옥녀봉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녹우당의 안산인 옥녀봉은 고대(마한시대 추정)의 토성이 존재하고 있는데 고대인들에게도 이곳은 지정학적으로 군사적 요지라는 것을 알게 했던 모양이다.

연꽃마을 백련동(白蓮洞)

녹우당이 있는 연동마을은 ‘하얀 연꽃이 피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본래 ‘백련동’이라 불렀다. 녹우당 입구에는 ‘백련동’이라는 이름을 짓게 한 백련지가 잘 조성된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연지는 녹우당 사랑채에서 환하게 내려다보이는 장원의 중심에 덕음산의 기운이 합일되는 장소에 자리 잡고 있다. 녹우당 앞의 훵한 발판을 가로막으며 조성된 비보 기능의 소나무 숲을 보면 이러한 것을 더 느낄 수 있다.

▲ 녹우당 연지의 백련
ⓒ 정윤섭
연지는 윤효정이 유교적 철학 사고는 마음에서 생겨난다고 보고' 이(理)와 기(氣)'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덕음산을 바라보기 가장 좋은 위치에 마음 심(心)자 동산을 쌓아 올려 어진 덕(仁德)의 기상이 물처럼 내면의 일상생활과 행동에 함께 스며들도록 조영하였다고 한다.

또한 동산의 연지에 백련을 심었는데 이는 맑고 깨끗한 기품과 향기로 심신을 맑게 하여 자연을 닮고 싶은 기원을 담기위해 백련을 심었다고 한다. 후대사람들이 모든 것을 성리학과 풍수적 관점으로만 해석해서인지는 몰라도 듣고 있으면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산 윤선도의 대표적인 원림지이자 은둔처인 보길도의 ‘부용동’과 ‘세연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산은 그의 은둔처마다 연지를 조성하고 이곳에 연을 키웠다. 풍수적 관점으로 해석되는 연을 상징하는 이러한 지명들은 해남윤씨가의 여러 유거지에서 발견되는데 백련과 인연이 깊은 해남윤씨가의 독특한 취향이라고 할 수 있다.
어초은이 백련동에 터를 잡은 것은 아마도 물외한정(物外閑情)속에서 명리(名利)의 세속에 쫓김이 없이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자연을 벗하며 마음과 세상과 자연이 하나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실천하고자 함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속으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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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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