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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규 선생.
ⓒ 박현령
'호사유피 인사유명'이라 했다. 시대의 광대 허규(1934~2000)는 이름과 더불어 극장 하나를 남겼다. 창덕궁 옆구리에 고즈넉이 붙어있는 북촌창우극장. 고인의 땀 냄새가 짙게 스민 곳이다. 허규의 투병과 죽음 속에서 극장도 주인 따라 몸살을 앓았다. 주인과 함께 공연이 사라진 극장은 더 이상 극장이 아니었다.

고인의 병세가 악화된 1998년 이후 운영에 파행을 겪었던 북촌창우극장이 오는 6월 3일 인형극 전문극장으로 재개관한다. 고인이 민예극장 시절 <꼭두각시 인형극>을 연출하는 등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인형극 분야 전문 극장으로 재탄생 한다고 하니 그간의 서운함을 씻고 흡족해 하리라.

북촌창우극장은 북쟁이 허규의 분신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의 권력이 하늘에 닿았던 1981년. 허규는 40대 후반의 나이로 국립극장장이 된다. 문화계는 민간이 맡아야 한다는 여론으로 군부를 압박, 허규가 천거된 것이다.

1989년까지 국립중앙극장장을 맡으면서 내부 개혁과 밖으로는 우리나라 마당극, 축제, 창극을 재정립하는데 일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연극 극본집 <물도리동> 출판기념회에서 가족들과 함께(1998).
ⓒ 박현령
퇴임 후 1992년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현대사옥(현 해양수산부), 김수근의 공간스페이스, 창덕궁 등 꽤 유명한 건축물과 가지런한 곳에 5층짜리 건물을 짓고 지하에 북촌창우극장을 들였다. 바로 북촌한옥마을 입구다.

북촌에 있는 창우(倡優), 즉 창극을 하는 배우들의 놀이터란 의미에서 극장 이름을 지었다. 몸짓을 통해 시대를 표현하려는 광대들에게 재정적 부담 없이 끼를 발산할 수 있는 오롯한 공간을 준비한 것이다.

극단 <민예>를 만든 실험정신과 30년 연출인생을 마지막으로 수렴하기 위한 공간에서 허규는 몸을 아끼지 않았다. 오랜 지병인 당뇨는 그를 살판에서 뒷방으로 주저 앉혔지만 북채는 끝내 놓지 않았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을 일찍 깨우친 그는 우리 고유의 몸짓과 소리에 천착했다. 그러는 사이 몸은 조금씩 사위어 갔고 극장에 내려가는 시간보다 병원에 가는 시간이 많았다.

▲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연극인장을 치러진 영결식(2000.3.31)
ⓒ 유성호
이미 죽음을 예감했고 육체의 쇠잔함을 슬퍼하며 몇 년간 더 살아서 하던 일을 정리하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허규는 북채를 쥐고 지난 2000년 3월 쇠약해진 몸을 영원히 누였다.

허규의 죽음 이후 북촌창우극장은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얼마 전까지 공전을 거듭했다. 정동극장이 임대를 했지만 정기공연을 띄우지 않고 대관사업이나 연습실로 사용하는 등 고인의 뜻을 잇지 못했다. 또 문예진흥원(현 문화예술위원회)에서 나서기로 했지만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아 홀로 남겨진 미망인 박현령(시인)씨를 우울증에 빠지게 했다.

'우리 것'에 천착한 인생...2000년 65세 일기로 영면

▲ 북을 치고 있는 허규와 부인 박현령씨(1982)
ⓒ 박현령
허규에 대한 박씨의 그리움은 남다르다. 박씨가 엮어내는 망부가는 남은 이들에게 허규를 오래도록 추억하게 한다. 2003년 펴낸 허규에 대한 봉헌시집 <대청마루에 북을 두고>는 연극문화예술 현장에서 격렬하고 치열하게 살다간 그에 대한 그리움이 짙고 뜨겁게 담겨 있다.

“한달에 한번씩 은행에 가면/그가 거기에 살아 있다/은행원이 남편의 이름을 부르고/내가 그의 통장에/신용카드 쓴 값을 입금시킨다/은행원들은 참 고맙다/그를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으로/살아서 신용카드를 쓰고 있고/매월 신용카드값을 갚아가고 있는/산 사람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나는 비로소 은행에 가서/살아 있는 그를 만나고/아직도 그와 가족으로 묶여서/가족카드를 같이 쓰고/그가 서울시내 어딘가에서 소줏잔을/기울이고 있겠지 하는 생생하고도/타당하기 그지없는 실감 속에 빠져서/그의 이름이 적힌 통장을 들고 ”이름을 지워주세요. 그는 돌아가신 분이세요.“/라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다짐한다/은행통장에서 아직도 살아 있는 그와/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저녁때가 되면 연극판에서 파김치가 된/그가 돌아오겠지 하는 기대감 속에서/내 마음은 그제사 이름 모를 평안 속으로/ 깊이깊이 빠지고 만다. - <한달에 한번 은행에 가면>

▲ 허규에 대한 그리움이 녹아 있는 박씨의 시집과 엮은책들.
ⓒ 유성호
한국방송공사 PD 시절, 연출가인 허규를 만나 결혼했다. 이후 박씨는 시사통신사 기자를 거쳐 미당 추천으로 시인이 됐다. 박씨는 허규가 세상을 등진 이후 그에 대한 학술총서, 시집, 추모문집 등을 엮는 등 고인에 대한 기억의 끈을 이어가는데 노구를 아끼지 않고 있다. 또 건물 5층에 여전히 살면서 북촌창우극장을 지키며 허규의 체취를 간직하고 있다.

인형극 전문극장 선언...김종구씨의 <목각인형이야기> 공연

▲ 북촌창우극장 전경
ⓒ 유성호
지난 5월 초, 북촌창우극장의 새 주인이 나타났다. 토속인형극 <애기똥풀>로 유명한 극단 아름다운세상이 3년간 극장을 임대해 쓰면서 인형극전문극장으로 꾸려가기로 했다. 박씨는 인형을 좋아했던 허규의 맥을 잇는 듯해서 파격적인 조건으로 빌려줬다고 밝혔다.

개관 기념공연으로는 국내 마리오네트 인형극 1인자인 김종구씨의 <목각인형이야기>를 무대에 올린다. 김종구 씨가 직접 한달 보름 동안 관객들 앞에서 인형들을 조작하고 연기를 펼친다.

대가의 숨소리와 땀 냄새를 아주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무대다. 미망인 박 씨는 이 공연에 과거 허규와 인연을 맺었던 연극계 인사들을 대거 초청할 계획이라고 밝혀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할 예정이다.

허규가 떠난 지 6년. 병상에서 떠올린 아이디어인 왕궁 수문장 교대식은 어김없이 계속되고 있는데, 허규는 없다. 북촌창우극장도 제자리를 잡았는데 그는 자리에 없다. 그런데 극장에 홀로 있으면 심장소리 같은 꿈틀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둥둥 낙랑 둥~ 둥둥 낙랑 둥~. 허규가 북채를 쥐고 어디선가 걸어 나올 것만 같다.

허규 약력

1934년 경기도 고양 출생
1957년 서울대 농대 임학과 수료
1969년 극단 <실험극장> 창단 동인
1961~1972년 KBS, TBC, MBC 드라마연출
1973년 극단 <민예> 창단
1977년 제1회 대한민국연극제 <물도리동>(작ㆍ연출)으로 대통령상 수상
1981~1989년 국립중앙극장장 역임
1988~1991 판소리학회 회장 역임
1988년 서울올림픽 거리축제 총감독
1989년 축제문회진흥회 회장, 아리랑축제 총감독
1990년 대전엑스포 문화예술 전문위원
1991년 서울거리축제 총감독
1992년 북촌창우극장 설립, 축제예술연구회 회장
1995년 보관문화훈장
2000년 3월27일 22시40분 영면,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장동 선영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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