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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관장 류상영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은 광주항쟁 26주년을 맞아 1983년에 김대중씨가 광주의거 3주년 추도식을 앞두고 작성한 친필 추도사를 공개했다. 이 사료는 한민통 미주본부 사무총장과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던 재미인권운동가인 이근팔씨가 최근 김대중도서관에 기증한 사료 가운데 하나다. 이 사료는 8월에 재개관하는 김대중도서관 전시실에 전시될 예정이다. <편집자주>

김대중 전대통령이 지난 83년 광주의거 3주년 추도식에서 읽은 추도사 육필원고. 밑의 화살표를 누르면 25매의 육필원고를 직접 볼 수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1983년 5월 22일 일요일 저녁 7시 프랜시스 하몬드 고등학교(미국 버지니아주 소재)에서는 워싱턴 교포 사회가 주최한 광주의거 희생자 3주년 추도식이 열렸다. 이 날 추도식에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씨가 참석하였다.

이날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광주 민중항쟁 관련 행사에 참석한 첫번째 날로 기록된다.

그는 1980년 5월부터 1982년 12월까지 투옥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가서야 광주항쟁에 관련된 정확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었고, 3주년이 되는 1983년에 가서야 추모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날 추도행사에서는 강연자로 한완상('광주의거의 정치·사회적 배경'), 문동환('광주의거의 역사적 의의')씨 등이 나섰다.

추도식 준비위원회 고문으로는 미국 민주당의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을 비롯, 민주당의 토니 홀 하원의원과 공화당의 짐 리치 하원의원 등 하원의원 7명이 참여했고, 페기 빌링스 연합감리교회 세계선교회 부총무 등 교계 및 시민단체 관계자 10명 등도 함께 했다.

미국인 고문은 이렇게 총 18명이다. 한국인으로는 조한용 한인회장과 강철은 전 한인회장 등 교포 8명이 참여를 하고 있었다.

이날 행사는 1500여명의 워싱턴 지역 거주 교포들이 참석하는 등 대규모로 열렸다. 추도식에서 김대중씨는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는 추모사 낭독 도중 오열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 미주 지역 교포 신문 중의 하나인 민중신문은 '김씨는 추도사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려 한참동안이나 중단되기도 했다'고 보도하였다.

김대중씨는 1987년 9월 8일 처음으로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참배할 당시에도 추도사를 낭독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등 행사 도중 여러 차례 통곡을 했는데, 1983년 5월 22일 행사도 이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김대중씨와 광주는 목숨을 걸고 전두환 정권에 저항한 민주화 운동의 '운명적 동지' 관계이다. 신군부의 회유와 협박에 "나는 광주시민과 같이 민주재단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말한 뒤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씨로서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고 눈물은 그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흘러내린 눈물에 중단된 23년 전 추모사

▲ 민중신문은 김대중 전대통령이 미국 망명중이던 지난 83년 5월 22일 미국 버지니아 프랜시스 하몬드 고교에서 열린 `광주의거희생자 3주년 추모식`에서 추모사를 낭독하던중 울먹이는 모습을 실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이날 작성된 김대중씨의 친필 추모사가 이번에 최초로 공개된다. 이 글은 그가 광주 민중항쟁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 최초의 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추도사에서 나온 내용은 이후 김대중씨가 광주항쟁에 관해서 언급할 때 지속적으로 나온다. 따라서 광주항쟁에 대한 그의 인식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이 추도사의 가치는 크다.

추도사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미국 책임론에 관한 것이다. 광주 학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미국에 대해서 국민들의 인식이 급격히 부정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을 김대중은 지적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김대중의 언급을 살펴보자.

"광주의거는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미군사령관의 무책임한 행동이 가져온 재난이 어떠한 것이며 이로 인하여 한국민의 미국에 대한 태도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오게 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광주 학살에 관한 미국 책임론을 지적한 이같은 인식은 1983년 국내 상황으로 볼 때 급진적인 성격을 띤다.

물론 광주항쟁 이후 학생운동권을 중심으로 해서 미국 책임론이 제기되면서 이전의 친미일변도의 사회 인식에 균열을 내고 있었지만 사회전반적으로 볼 때는 아직도 소수의 의견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그렇게 볼 때 미국 문제를 언급한 김대중씨의 시각은 당시 상황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성격을 띠었다.

김대중씨가 진보적인 시각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미국에서 있으면서 광주항쟁의 총체적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던 점을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1960년대 야당의원시절부터(더 거슬러 올라가면 해방공간 때부터) 현실주의적 국제정세 인식에 입각한 입장을 강조해왔는데, 이는 박정희 정권과 야당 주류의 이데올로기 편향성과는 다른 시각이었다.

미국책임론을 제기한다고 해서 운동 세력과 김대중의 입장이 100%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김대중씨는 반미을 강조하지 않고 미국의 대한정책 전환을 촉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한국의 독재 정권을 국내외에 걸쳐서 압박을 하기 위해서는 '투쟁은 강하게 하되 전략은 온건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상과 현실을 동시에 중요시하는 그의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작전지휘권을 가진 미군사령관이..." 추도사에 나타난 미국 책임론

또한 이 글에서 그는 광주 문제 해결을 위한 포괄적이면서도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한(恨)'을 통해서 이를 설명하고 있다. 한을 통해서 논리를 전개해나가는 부분은 이 추도사의 백미다. 그는 한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한은 민중의 좌절된 소망입니다. 한은 민중이 기다림 속에서도 쉬지 않고 그 성취를 바라는 민중의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한은 민중이 기다림 속에서도 쉬지 않고 그 성취를 위해 조용히 전진하는 민중의 몸부림입니다."

여기서 보면 김대중씨는 한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 한의 담지자는 바로 민중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그가 규정한 한은 슬픔·분노·격정 등 어둡고 불안정한 속성을 띠거나 혹은 막연히 침체된 정적인 속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극복 의지와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동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는 광주항쟁을 역사적 한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우리 국민은 한의 국민입니다. 오늘 우리의 한은 38년 동안 계속된 조국분단의 한, 건국이래 거듭된 독재정치의 한, 1961년 이래 계속된 군인정치의 한, 경제건설이 소수에게 집중된 빈부 양극화의 한, 그리고 언론·국회·사법부 등 민권의 보루가 무력해가고 타락돼 가는 것을 보는 한 등입니다. 광주의거는 이러한 우리의 한을 풀고자 일어섰던 것이며 그 한을 안은 채 좌절된 또 하나의 한의 사건입니다."

김대중씨는 광주의 비극이 왜곡된 한국 현대사의 구조적 산물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특히 그가 분단 문제를 지적한 것은 의미가 있는데, 분단 모순은 한국 현대사의 기본 성격을 규정하는 중대 요인으로서 한국 사회 성격 분석에 있어서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분단과 독재 체제의 상관성을 동시에 지적하고 있다는 점은 그의 역사 인식이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선진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증명한다. 더군다나 이같은 시각이 이미 1960년대에도 나타난다는 점은 주의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가 제시한 '광주 영령의 근본적 한풀이'

▲ 지난 2005년 9월 광주를 방문, 국립5·18묘지를 참배한 김대중 전 대통령. 김 전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 여사가 분향한 후 묵념을 하고 있다.
ⓒ 광주드림 안현주
역사구조적인 관점에서 광주 문제를 이해하고 있는 김대중씨는 광주 문제의 근본적인 해법은 민주체제의 확립과 평화통일에 있다고 지적한다.

"광주의 한도 광주 영령 여러분의 소원이었던 민주회복과 그를 바탕으로 한 통일에의 전진으로만 근본적인 한풀이가 가능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기서 '근본적인 한풀이'라는 표현은 중요하다. 그는 정치 보복을 반대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사 청산에 관한 기본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언급이다. 추도사에 나오는 관련 언급을 살펴보도록 하자.

"춘향이의 한은 이도령과의 재결합을 통해서 풀렸고 변사또에 대한 보복을 생각하지 않읍니다."

"우리의 진정한 한풀이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복수에 있지않고 한을 맺히게 한 좌절된 소망의 성취에 있으므로, 우리는 내일의 국민적 화해와 생산적 전진을 위해서 만일 과오를 범한자들이 뉘우치고 여러분의 한풀이에 동참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정치보복도 엄중히 삼가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김대중씨는 우리 민족이 그동안 너무나도 많은 상호 반목과 갈등을 해왔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특히 권력을 가진 자들의 횡포와 탐욕으로 인해 수많은 민중들의 고난이 누적되었기 때문에 사회와 국가 그리고 민족이 치유하기 힘들 정도로 극단적인 분열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사회통합·국가통합·민족통합을 바라고 있었다. 김대중씨는 한을 체화한 민중이 권력을 잡은 후 관용의 정신을 보이게 되면 오히려 더 큰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처럼 화해와 용서를 강조하는 입장은 1980년 신군부에 의해서 사형선고를 앞두고 이뤄진 최후진술에서도 나타나고, 후에 1987년 9월 8일 망월동 묘역 추도사에서도 다시금 강조되는 등 김대중의 지론이다.

김대중씨의 용서와 화해의 정신은 그의 기독교적 가치에 기초한 부분도 있고 해방 이후부터 지속된 극단적인 갈등과 분열주의를 해소하고자 하는 자신의 정치적 역사적 경험에서 형성된 것도 있다.

이같은 그의 입장에 대해서 여러 논쟁이 있었는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의 입장이 자신의 역사관과 종교관 등에 근거하고 있고 오래 전부터 정립된 일관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추모사에는 용서와 화해의 정신이 있었다

▲ 김대중 전대통령이 미국 망명중이던 지난 83년 5월 22일 미국 버지니아 프랜시스 하몬드 고교에서 열린 `광주의거희생자 3주년 추모식`에서 낭독한 추모사 육필원고와 당시 행사 팜플렛과 민중신문 복사본.
ⓒ 오마이뉴스 이종호
그리고 이 추도사에서는 김대중씨가 광주항쟁 발생을 처음 알게 된 시점이 1980년 7월 10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그동안 여러 차례 1980년 신군부에 조사를 받던 도중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언급했지만, 그 날짜가 7월 10일이라는 사실이 정확하게 언급된 것은 이 추도사가 처음이다.

지금까지 이 추도사에서 전체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점을 분석해보았는데, 이외에도 당시 김대중씨의 인식을 알 수 있는 여러 중요한 부분이 많이 있다.

이 추도사에는 자신이 죽음의 길을 선택하게 될 때 겪게 된 인간적 고민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는 부분도 있어 그의 인간적인 면과 정세를 분석하는 현실 정치가로서의 면모가 함께 잘 나타나 있는 명문이다.

광주항쟁 발생 26주년이 다가오고 김대중씨의 재방북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23년 전의 이 추도사는 여러 모로 많은 의미를 준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장신기 기자는 현재 김대중도서관 연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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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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