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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반이민법 저지 시위에서 수많은 남미국가 출신들이 라티노라는 이름으로 단결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이들의 축이라 할 수 있는 멕시코인들에 대한 관심 또한 늘어나고 있다. 멕시코는 미국과 2천 마일에 걸친 국경이 맞닿아 있는 인접국가로 미국에 들어오는 라티노들의 주요 통로 구실을 한다. 게다가 현재 1200만 명으로 추산되는 불법이민자들 중 절반이 넘는 620만 명이 멕시코인이라고 하니 그 영향력 또한 만만히 볼 수 없는 일이다.

라티노들이 대거 거주하는 캘리포니아, 텍사스, 애리조나, 뉴멕시코를 비롯해 네바다, 유타 등 서부 지역은 19세기 중반까지 멕시코 영토였다, 그러나 만주와 요동을 잃은 고구려 유민들이 그랬듯 알라모 전투로 유명한 텍사스전쟁 이후 광대한 영토를 잃은 멕시코인들은 자신들의 땅이었던 곳에서 불법이민자의 낙인이 찍힌 채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스페인 식민시대

1546년 스페인군대가 들어오기 전 지금의 멕시코땅의 주인은 인디오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아메리칸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소수민족으로 전락해 역사의 뒤안길에서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다. 정복자 스페인은 섹스와 종교라는 양날의 칼로 그들을 다스렸다. 남자들은 노역을 시켰고 여자들은 향락의 도구로 삼아 인구의 태반이 넘는 혼혈족 '메스티조'를 만들어냈다. 인디오도 백인도 아닌 이 메스티조들은 지금도 멕시코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멕시코는 1810년 독립을 선포하기까지 3백년 가까운 세월 동안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장장 12년 동안 전쟁을 벌여 가까스로 독립을 쟁취했다. 당시 미국엔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개발된 이후 미시시피강을 넘어 서쪽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멕시코영토였던 텍사스에도 미국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처음 멕시코 정부는 1823년 스티븐 오스틴에게 개척지를 만들 수 있는 권리를 주기도 했고 산타페에 무역 거래소가 설치하기도 하는 등 텍사스 이주를 희망하는 미국인들을 환영했다.

하지만 멕시코인들보다 미국인들이 10배 이상이 되던 1827년 들어 멕시코 정부는 기존의 우호적인 태도를 버리고 더 이상의 미국인 이주를 금지했다. 이미 거주하고 있던 미국인들에게는 멕시코 법을 따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텍사스 공화국의 탄생

▲ 멕시코의 독립과 종교, 그리고 동맹을 의미하는 삼색기
하지만 미국인들의 이주가 계속되자 멕시코 정부는 이들을 저지하기 위한 군대를 파견하기도 하고 멕시코에 유입되는 모든 상품에 세금을 매기기도 하는 등 강경 조치를 취했다. 이런 강경책으로 인해 미국인과 멕시코인과 관계는 점점 악화됐고 1836년 텍사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미국인들은 텍사스 공화국을 세워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멕시코 정부가 이를 용납할 리 없었다. 멕시코 대통령은 이들의 독립 선언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직접 군대를 몰아 진압에 나섰다. 처음에는 멕시코 군대가 알라모와 골리아드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기세를 장악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미국인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멕시코 군대는 산화킨멕 전투에서 대패했을 뿐 아니라 대통령까지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은 후 리오 그란데 강을 국경선으로 하는 텍사스 공화국을 승인한다는 내용의 벨라스코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텍사스의 미연방 합병과 멕시코 전쟁

이후 텍사스 공화국은 우여곡절을 거쳐 미연방에 가입하게 됐다. 처음에는 노예주가 늘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북부 자유주의 주대표들의 반대에 의해 바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계속되는 합병 요구와 거대한 영토의 편입에 매력을 느낀 연방 상하원에 의해 1844년 텍사스의 연방 가입이 승인되자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했던 멕시코 정부는 주미 멕시코 대사를 소환하고 미국과 공식 관계를 끊는 등 강력히 항의하고 나섰다.

이에 미국정부는 재커리 태일러 장군을 텍사스로 급파했고 특명 대사 존 슬라이델을 통해 텍사스 문제 해결과 더불어 뉴 멕시코와 캘리포니아 매수를 제안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양국의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멕시코 군대가 리오 그란 데 강을 넘어 먼저 공격을 개시한 1846년 4월 이후 이를 기다리던 미국은 바로 반격을 가해 짧은 시간 동안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미국인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내정이 혼란스러웠던 멕시코는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점령당한 후 '과달루페 힐다고' 조약을 통해 지금의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아리조나, 뉴멕시코 등의 광대한 영토를 단돈 1500만 달러를 받고 미국에 할양해야 했다.

'싱코 데 마요'와 멕시코독립기념일

다른 남미인들과 마찬가지로 멕시코인들은 피에스타(Fiesta), 즉 축제를 즐긴다. 물론 가장 유명한 축제는 프랑스와의 승전을 기념하는 5월5일 싱코 데 마요(Cinco de Mayo)와 독립기념일인 9월16일이다. 말 자체가 5월5일라는 뜻인 '싱코 데 마요'는 1862년 멕시코의 민병대가 푸에블로에서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군대와 싸워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날이다. 축제의 중심지는 푸에블로지만 멕시코인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이 날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린다. 아마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추수감사절 등을 제외하고는 아일랜드인들의 축제인 성패트릭축제와 더불어 가장 널리 알려진 이민자들의 축제일 것이다.

간혹 이날을 멕시코의 독립기념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멕시코는 1810년 9월16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으며 '싱코 데 마요'는 1862년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기념일이지 독립기념일이 아니다. 스페인 독립전쟁(1810~1821) 당시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해 백인, 인디오, 메스티조 등 다양한 인종과 정치그룹들은 단일군대를 형성하면서 하나의 종교를 바탕으로 모든 멕시코인들의 동맹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독립 군주국을 세운다는 내용에 합의를 했다. 그리고 멕시코의 삼색기는 이 합의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멕시코 국기는 3개의 동일한 수직선으로 나누어진 직사각형으로 구성되며 색깔은 왼쪽부터 녹색, 흰색, 적색의 순서로 배열된다. 녹색은 독립(for independence), 백색은 종교(for religion), 그리고 적색은 동맹(for union)을 각각 의미한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녹색은 독립과 희망과 천연자원을, 백색은 종교의 순수성과 통일과 정직을, 적색은 백인, 인디오, 메스티조의 통합과 국가 독립을 위해 바친 희생 등을 나타낸다. 가운데 문장은 아스테크 건국전설에 나오는 "독수리가 뱀을 물고 앉아 있는 호숫가의 선인장이 있는 곳에 도읍을 세워라"는 신탁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삼색기는 1810년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시작하면서 처음 사용됐고 1821년 공식국기로 제정됐다.

덧붙이는 글 | 애틀랜타에서 발행되는 유에스 코리아 데일리뉴스에 게재된 특집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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