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정릉 금천교.
ⓒ 한성희
성북구 정릉동 주택가 구석진 곳에 정릉으로 올라가는 좁은 언덕길이 있다. 주택가 한가운데 있는 9만여평의 정릉이 아니라면 진작에 도시에 침범 당해 자연을 느낄 숲이 존재할 수 없었으리라. 골짜기마다 맑은 냇물이 흐르고 산책로와 약수터가 곳곳에 있는 정릉은 지역주민들의 소중한 휴식처이기도 하다.

정릉(貞陵)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1396) 강씨가 잠든 곳이다. 강비는 태조 이성계의 경처(京妻)였다. 당시 풍습대로 향리에 두는 향처(鄕妻·신의왕후 한씨)와 개경에 처를 두는 경처가 있었는데 강비가 경처였다.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이 개국하기 1년 전 죽었고 이듬해 1392년 7월 17일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강씨는 8월 2일 현비(顯妃)로 책봉된다. 강비는 조선 최초의 공식 왕비였다.

8월 8일, 태조는 방원을 4대 선조 능실에 제사 지내고 능호를 지으라며 동북면(함흥)으로 보내버렸다. 방원을 함흥으로 보낸 것은 방원이 없는 틈을 타서 강씨 소생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려는 의도였다.

8월 20일, 세자책봉이 논의에 오르자 나이와 공로로 세자를 세워야 한다는 방원 편을 든 대신의 주장이 있었으나 태조는 이를 무시했다. 사랑하는 강비 소생을 세자로 책봉하기로 작정하고 있는 터. 강비의 두 아들 중 맏아들 방번은 경망스럽고 인물이 볼품이 없다 하여 막내아들 방석이 11세로 왕세자로 책봉됐다.

아버지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일등공신이었던 36세의 펄펄한 호랑이였던 방원이 강비와 정도전이 손잡은 세자책봉에 밀려나고 말았으니 이는 태조와 강비가 장차 일어날 비극을 자초한 일이었다.

▲ 정릉의 능상에서 바라보는 아파트 건물은 현대와 과거가 한눈에 들어오는 묘한 감흥을 자아낸다.
ⓒ 한성희
태조는 강비를 무척 사랑했다. 궁궐에서 잔치를 벌일 때 강비는 주렴을 드리우고 뒤에서 항상 참석했으며 절을 찾을 때든 어디를 가든 강비를 동행했다. 강비가 아프면 승을 궁궐에 불러들여 기도를 드리게 했으며 지극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1396년 8월 13일 강비가 병으로 앓다 죽자 태조는 대성통곡하며 슬퍼했다. 원래 정릉은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었고 태조가 강비에 대한 사랑을 다 바쳐 지은 능이었다. 고려왕릉을 본 떠 조성한 정릉은 조선 최초의 능이었다. 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근처에 화려하게 세운 정릉사(흥천사)의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 만큼 죽은 강비를 생각하는 태조의 사랑은 지극했다. 이 흥천사는 중종때 화재로 소실됐다.

강비가 죽은 후 태조는 툭하면 눈물을 흘리는 이빨 빠진 늙은 호랑이에 불과했다. 강비가 죽고 2년 뒤에 1차 왕자의 난으로 방석과 방번이 죽음을 당하자 태조는 눈물을 줄줄 흘린다.

2대 정종이 왕위에 오르며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 개경으로 가는 날, 태조는 정릉을 바라보며 차마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살피다가 눈물을 흘리며 떠났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릉은 파괴되기 시작했다. 정릉 코앞까지 집을 지으라고 허가를 내준 태종의 저의는 뻔했다. 공신들이 정릉 앞에서 집을 짓는 공사가 한창일 때 정릉을 찾은 태상왕 태조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르는 눈물을 그치지 못하고 또 하염없이 울었다.

▲ 복원된 청계천 광통교의 석물은 정릉 병풍석이다.
ⓒ 한성희
태종은 태조가 죽은 다음해인 1409년, 도성 안에 능이 있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이유로 정릉을 양주 사한리(沙閑里·현 성북구 정릉동)로 이장해버리고 강비를 후궁으로 강등해 묘로 격하시켰다. 이때 묻은 병풍석 등 석물은 이듬해 흙으로 만든 다리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로 유실되자 석물을 다시 파내 다리를 만드는데 썼다.

지난해 청계천 복구 때 드러난 광통교의 석물은 바로 신덕왕후 정릉에 있던 병풍석들이다. 60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나타난 화려한 석물의 정교한 무늬들은 생생하게 살아있어 당시 태조의 애정을 생각하게 한다.

▲ 청계천 광통교에 가면 조선 최초로 조성된 능 정릉의 석물을 볼 수 있다.
ⓒ 한성희
송시열과 신덕왕후 복위

방석과 방번이 죽었으니 신덕왕후의 후사는 끊겼고 단지 한식 때 제사를 올릴 뿐이었다. 이장된 정릉은 돌보는 이 없이 버려진 무덤이었다. 선조 때 정릉을 복위하자는 양사의 상소가 오르나 선조는 "오늘날 신하는 단지 이 시대의 일만 논하라"며 완강히 이를 물리쳤다.

신덕왕후를 종묘에 올리는 것은 태종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기에 선조는 이를 거부한 것이다. 단지 이때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던 정릉을 다시 찾아 제사를 지내게 했다.

▲ 정릉의 장명등은 고려왕릉을 본 뜬 형식이다. 정릉의 석물 중 본래 있던 것은 장명등과 혼유석밖에 없다. 문인석과 무인석 등 나머지 석물은 조선 후기 현종대에 복위되면서 새로 상설했다.
ⓒ 한성희
정릉이 이장되고 260년이 흐른 현종 10년(1669년) 1월 4일, 돌연 송시열이 신덕왕후 복위를 들고 나온다. 현종 역시 선조와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뿌리쳤다. 그러나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의 상소는 집요했다. 송시열은 무엇 때문에 죽은 지 270년도 넘은 신덕왕후를 종묘에 부묘하라고 요구했던 것일까.

말이 270년이지 270년이라면 한 왕조가 일어나고 사라질 만큼 긴 시간이었고 보통 오랜 세월이 아니다. 더구나 태종의 핏줄을 이은 선대 왕들이 정릉을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이를 들쑤시고 나온 송시열의 저의가 무엇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정릉은 세종 즉위년에 나라에서 지내던 제사를 폐하고 족친에게 지내게 했으며, 세종 8년에는 신덕왕후의 영정을 불살라버리라는 명을 내렸었다. 즉, 세종도 신덕왕후를 정비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현종이 태종이 일으킨 왕자의 난을 모를 리도 없었고 신덕왕후를 인정한다는 것은 태종의 죄업을 인정한다는 일과 같았으니 송시열과 서인의 주장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수백 년이 지난 현종대에 그를 뒤집는 일은 선대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일과 같았다.

송시열과 삼사는 수십 차례에 걸쳐 신덕왕후를 복위할 것을 재차 상고하며 현종을 들볶는다. 현종대는 송시열의 권력이 왕을 능가했고 신권이 왕권을 압도해 왕의 권위가 형편없이 추락한 시점이었다.

지독한 숭명사대주의자 송시열의 의도는 분명했다. "신덕왕후가 정비(正妃)였고 죽어서 존호를 받았으며, 중국으로부터 고명을 받아 성조(태조)와 짝하였는데 유독 태묘(太廟)에 배향되지 못한다면 어찌 인정에 거역되고 천리에 괴리되어서 성조의 궐전(闕典)이 되고 천고의 유한이 되지 않겠느냐"고 현종에게 예학을 내세워 압박했다.

다시 말해서 중국에서 인정한 왕비였으니 조선 왕조의 지난 일이야 어쨌든 다시 종묘에 올리라는 말이었다. 1월부터 시작된 서인의 상소는 8월까지 수십 차례 이어졌다. 8월 1일과 2일, 4일 연이어 영의정 정태화, 행 판부사 정치화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신덕왕후 부묘를 허락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현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대 송시열의 주장은 사림에게 곧 법이었다. 왕보다 송시열이 사림들에게는 더 위엄있는 현인이자 성인이었다.

▲ 혼유석 북석(받침돌)이 네 개중 두 개밖에 없는 특이한 능이다. 대강대강 옮겼던 태종대의 이장 분위기를 알게 해준다.
ⓒ 한성희
8월 4일부터 현종은 병이 났다. 5일 또다시 정태화가 백관을 거느리고 병석에 있는 현종에게 압박하자 허락하고 말았다. 정릉이 복위된 과정을 보면 송시열과 서인의 협박에 가까운 압박이 아니었다면 이뤄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태종이 첩으로 규정한 신덕왕후는 이렇게 다시 사림의 대의명분에 의해 왕비로 복위됐다.

그해 8월 13일 신덕왕후 정릉 기신제가 200여년 만에 거행되자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실록은 전한다. 사실, 모든 사람이 아니라 왕을 꺾고 왕조의 정통성에 흠집 내며 주자학을 고집한 사림의 뜻대로 승리한 서인들이 기뻐했다고 해야 정확하다. 서인이 쓴 현종개수실록에 사관은 이렇게 평한다.

신덕 왕후께서 고명(誥命)을 받고 중궁의 자리에 올라 한 나라의 모후(母后)로 계셨으니, 신의 왕후(神懿王后)와 적서(嫡庶)의 구분이 없었다. 그런데 방석(芳碩)의 난으로 인해 마침내 깎아내려야 한다는 의논이 생겨났으니, 그 당시 의논을 제기했던 신료들의 죄를 이루 다 꾸짖을 수 있겠는가.

능묘를 버려둔 채 돌보지 않았고 제사 드리는 예절을 빠뜨리고 거행하지 않은 지 거의 3백 년이 되었다. 바른 논의가 한 번 제기되자 중외가 똑같이 주장하여 능묘를 수축하고 정자각을 건립하는 일들을 차례차례 거행하고, 마침내 종묘 제향까지 윤허하여 다시 인륜이 바로잡히니, 3백 년 동안 신령과 백성들이 가졌던 분한 마음을 풀어준 일로서 천하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식자들은 사직의 장구함이 반드시 이 일에서 힘입을 것이라고 하였다(현종10년10월1일).


정릉(능호는 왕과 왕비의 이름처럼 쓰인다) 복위는 이처럼 서인과 송시열의 치적으로 둔갑했고 내막은 왕을 이긴 사림의 정략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주자학에 근거한 유학은 이후 조선의 절대도덕성을 확고하게 차지했다. 이유야 정치적인 논리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 정릉 능상은 엄청 높고 가파르기에 오르려면 등산할 각오를 해야 한다.
ⓒ 한성희
후기 조선에서 공자의 유교란, '보수와 전통이며 유교적'이면 다 용납되는 '절대선'이라는 위치를 갖게 된다. '유교=민족 전통'이라는 공식이 조선 후기 서인들의 정치 목적에 이용당한 '이즘'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나라 역사가 반만년인데?

왕비에게 치성 드리는 할머니

정릉 비각 뒤 편 약수터에 가면 정릉에서 유명한 할머니가 오늘도 약수물을 뜨러 오는 사람들을 도와 약수를 뜨게 해준다. 할머니는 작은 구멍가게를 열고 있지만 가게는 뒷전에 미루고 약수터에 더 정성을 들인다.

30년 전 어느 날, 꿈에 신덕왕후가 선몽해 터를 잡은 뒤에 30년을 신덕왕비에게 치성 드리면서 이곳을 자신의 집이려니 살아온 할머니다.

"장사 잘 되세요?"
"안돼."

▲ 신덕왕후를 지키며 30년을 바친 할머니가 돌보는 약수터.
ⓒ 한성희
30세 갓 넘은 나이에 죽을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맬 때 신덕왕후가 현몽했단다. 이 약수터에서 왕후에게 기도하며 약수를 마시자 수술 받아야 산다는 병이 수술도 안 받고 저절로 다 나았다는 할머니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 약수가 어디에 좋아요?"
"위장병에 특효야."
"근데, 그게 정말이에요?"
"그럼! 이거 먹고 위장병 고친 사람 많아."

할머니는 저녁이 되면 촛불을 켜고 왕비님께 치성을 드린단다. 밤에 혼자 무섭지 않냐 하니 왕비님이 지켜주시는 데 뭐가 무섭냐고 반문한다.

"왕비님이 여기 떠나지 말라니까 떠나라 할 때까지 계속 모시고 살아야지."

젊을 때는 꽤 미인이었을 고운 자태가 남아있다. 거참, 수백년 전 죽은 왕비가 무덤을 지키라고 꿈에 나타났다고 30년을 지키는 할머니나, 고운 청춘을 다 바치며 무덤을 지키라는 왕비귀신이나 이해 안 가긴 매한가지다.

할머니 철학이 그러하니 왕비님을 지키는 건 사실이겠지만, 슬슬 장난기가 돌아 짓궂은 웃음을 물고 다시 물었다.

"젊고 고운 여자를 늙도록 여기에 붙들어둔 왕비님이 너무하지 않아요? 왕비님 지켜서 얻은 이득 있어요?"
"그럼! 건강을 얻었잖아. 건강이 최고지."
"왕비님에게 돈 좀 벌게 해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지키는데 가난하게 내버려두는 건 심하잖아요?"
"돈 생기면 여길 떠날까봐 안 주시는 거야."

하긴, 어떤 질문을 해도 할머니는 정릉에서 치성 드리는 데 합리화할 대답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할머니가 떠주는 약수는 시원하고 맛있었다. 왕비가 무슨 돈이 필요할까. 그러니 경제 관념이 없어 할머니를 도우려고 생각 못할지도 모르겠고, 왕비를 모시는 나인들이 다 처녀귀신으로 늙어죽는 궁녀들이니 할머니 청춘에 대해 생각조차 안 할지도 모르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며 실실 웃고 말았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