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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사원을 모두 폭파해 버리자"

▲ 2004년 7월에 방송된 <비밀요원> 프로그램을 설명하고 있는 BBC 뉴스 기사. 하단 사진은 시위에서 아시아계 무슬림을 공격하고 있는 영국국민당의 간부 스티브 바크햄의 모습으로, 방송된 장면이다.
"얼마 전 브래드포드에서 있었던 대규모 시위에서 나는 아시아계 무슬림을 직접 공격했다."

지난 2004년 7월 공영방송 BBC를 통해 영국 전역에 방영됐던 한 프로그램이 영국민들을 경악케 했던 적이 있다.

BBC의 제이슨 그윈이란 기자가 극우정당 '영국국민당(British National Party, BNP)'에 잠입해 이 정당의 내부사정, 당원들의 생각, 당의 활동사안 등을 모두 몰래카메라와 비밀마이크에 포착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비밀요원>이란 이름의 이 프로그램은 영국국민당의 핵심 간부들이 과거 시위에서 이슬람 교도들을 공격한 사실 외에도 "영국 내 이슬람 사원을 모두 폭파해 날려버리고 싶다"거나 "이슬람은 아주 사악하고 타락한 믿음"이라며 과격한 발언을 공공연히 말하는 장면들을 담고 있다.

게다가 닉 그리핀 당 대표는 "지금 내가 이 말을 밖에서 떠들고 다니면, 7년형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그같은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인종차별로 고발되면 최고 7년형을 받을 수 있는 법이 있다.

방송이 나간 뒤 영국국민당을 비난하는 여론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리핀은 "이슬람을 비판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고 맞서며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보기에 지나치게 극렬한 몇몇 당원을 제명했을 뿐이다.

그리핀 대표와 당의 핵심간부였던 마크 콜렛은 고발됐으나 작년 7월 리즈시 지방법정은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들의 발언이나 행동이 지나치긴 했어도 현행법 위반으로까지는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현재 이들의 발언과 행동에 대해 재심 청구가 되어있는 상황이지만, BBC 프로그램에 의해 촉발된 사건은 올 2월 사실상 종결됐다.

▲ 영국국민당 홈페이지. 맨 첫화면부터 영국이 문화다원주의로 찢겨지는 것을 보고만 있겠느냐고 강변하고 있다.
1년 전만 해도 1% 미만... 지지하는 것이 수치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최근 한 사회정책 연구단체가 다음 달 지방선거에서 영국국민당의 지지도가 지금보다 현저하게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해서 영국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주고 있다.

죠셉 론트리 개혁재단 사회정책 연구그룹은 "영국국민당이 오는 5월 4일 지방선거에서 런던 내 지지율이 25%에 이를 가능성이 있으며, 영국 전역에서 6명 중 1명이 영국국민당에 표를 줄 지에 대해 고려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이는 지난 수개월간 지속되어왔던 영국국민당에 대한 평판을 감안하면 놀라운 것일 수밖에 없다.

지난 17일 이 발표 이후 <더 타임즈>를 비롯한 영국의 주요 언론들은 이 내용을 일제히 헤드라인 기사로 크게 보도했다. 노동당, 보수당, 자유민주당 등 3개 주요 정당들은 발표 내용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사실 여부를 따져보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영국 사회가 바짝 긴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국민당(BNP)은 대영제국의 과거 영광을 신봉하는 민족전선(National Front)을 모태로 성립되었다. 1980년대에 영국국민당은 민족전선과 분리되어 탄생되었지만, 그 근간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최근 사망한 죤 틴달을 비롯, 민족전선 출신의 영국국민당 핵심 멤버들 대부분은 50~60년대에 대영제국 해체 반대 운동을 벌였던 인물들이기도 하다.

영국국민당은 극우 보수노선을 충실하게 걷고 있는 정당이다. ▲외부인들의 영국내 이민 반대 ▲불법이민자 즉각 추방 ▲유럽연합으로부터 영국의 국가정체성 보장 ▲범죄자들에 대한 강력 대응(신체형 부활) ▲영국 내 영국인들의 우선적 일자리 확보 ▲문화다원주의적 교육 내용을 철폐하고 영국적 내용 교육 강조 등을 주요 정치적 노선으로 내세운다.

국가적 긍지가 강한 영국인들이라곤 하지만, 이런 국가주의로 현대 사회가 지탱되어야 할 것이라 믿는 영국인들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이런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비록 지지도가 계속 상승해 오긴 했지만, 영국국민당에 대한 총선 지지도는 1%가 채 되지 않는다(87년의 총선 지지도는 0%, 2005년 0.7%).

그러나 이번에 발표된 분석은 이제 상당수의 영국인들이 영국국민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면이 들어 있다. 더욱이 힘든 현실 대신 찬란했던 과거 대영제국의 영광에 향수를 느끼는 편이 더 낫다는 면이 감추어져 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 영국국민당(BNP)에 대한 지지도가 증가하고 있다는 <더 타임즈> 온라인판 17일자 메인 헤드라인 기사. 사진이 당 대표 닉 그리핀이다.
노동자 계층이 극우보수화 되는 이유는

이번 25% 발표를 놓고, 영국의 각 주요 정당들은 진위 여부 판단에 상당히 고심하고 있다. 더욱이 공교롭게도 노동부 고용담당국의 마거릿 홋지 국장도 이번 발표 직전에 유사한 의견을 내놓아서 각 당들을 더욱 고민스럽게 만들고 있다. 홋지 국장은 런던 동부에 있는 많은 영국인 백인 노동계층들이 영국국민당에 표를 줄 분위기라며 우려하고 있다.

노동계층이 극우보수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이유는 여러가지로 분석될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수년 전부터 계속되는 노동당의 정책 실패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또한 립 서비스와 공약을 남발하는 두 야당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영국인들도 늘어나고 있다.

일각에서는 애매모호하게 끝나버린 영국국민당에 대한 BBC의 인종주의 고발이 오히려 영국국민당을 전국에 광고시켜 준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오히려 방송 전까지 주목받았던 극우정당은 총선 지지율 4위의 영국독립당(UKIP)이었으며, 8위의 영국국민당은 이에 훨씬 못 미치며 주목도 역시 낮았기 때문이다.

영국국민당은 현 상황에 대해 아주 고무되어 있다. 영국국민당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영국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우리들에게 영국인들이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더 나아가 아일랜드와 영국을 다시 합쳐 '영국섬 연방'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내세우고 있다. 또한 프랑스의 르펜과도 국가주의적 시각에서 연대하고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5월 4일 지방선거에서의 지지율은?

영국국민당이 이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자 3개 주요 정당은 이런 발표 내용이 나온 것 자체에 대해 망연자실해 하는 분위기다. 노동당은 노동계층이 이탈하고 있다는 것에, 보수당은 보수계층이 이탈하고 있다는 것에, 자유민주당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에 모두 우려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수당은 "영국민족당이 정국 구도를 바꿀 정도로 돌풍을 일으킬 것이란 예상은 기우며 이런 분석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정부의 노동 정책 실패가 있다"고 노동당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고 있다. 좌파 성향이 많은 보수당의 새 대표 데이빗 캐머런은 "다른 당을 찍는 건 좋다, 그러나 영국국민당을 찍어서는 안 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자유민주당은 "기존 두 거대당에 대한 불신이 영국국민당에 대한 관심이란 일시적 상황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며, 진짜 대안정당인 자유민주당에게 힘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라크전쟁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노동당에서 추방되어 현재 반전당(RESPECT) 소속인 죠지 갤러웨이 의원은 20일자 <가디언>의 기고문을 통해 “노동당은 실정을 깊게 인식하고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고 강하게 비판했다.

22일자 <인디펜던트>는 영국국민당의 공약과 정책이 대부분 잘못된 증거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안티 영국국민당 운동가들의 의견을 인용해 크게 보도했다. 영국국민당의 정책들은 이민자들이나 망명자들의 문제를 지나치게 부각하는 등 인종적 편견이나 비합리적인 공포를 유발하기 위한 거짓말들과 절반만의 사실들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상당수 영국인들은 영국국민당이 25%에 육박하는 지지를 받지는 않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재 염증을 느끼고 있다는 면을 이번 지방선거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22일자 <데일리텔레그래프>는 "영국국민당에 표를 준다는 것은 현 정치인들을 반대한다는 것에 표를 주는 셈"이란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5월 4일 지방선거에서 영국국민당이 변수로 어떻게 얼마나 작용하게 될지에 대해 영국 사회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영국인들을 하나로 묶는 정서, 대영제국의 영광

영국은 다른 유럽 나라들 보다 더욱 국가적 정서가 강할 수밖에 없는 나라다.

본래 영국은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란 4개 민족 왕국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유니온잭 깃발 아래 1800년대 초에 대영제국으로 뭉쳤다. 식민지 쟁탈전 시대, 대영제국은 전세계 방방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세계 최강대국의 위치를 차지했다.

당시 찬란했던 영국의 문화는 건축물들과 골동품 등으로 남아 현재에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으며, 지금도 상당수의 영국인들은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시대인 1800년대를 그리워하고 있다.

영국인들을 단일 정서로 묶는 힘은 5대양 6대주에 걸쳐 식민지를 건설하고, 양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게 패권을 내주기 전까지 100여년간 이상을 세계중심국가로 군림했던 대영제국의 역사다.

대영제국은 해체되고 식민지들은 모두 독립해서 주권국가가 된지 오래지만, 제국의 잔상은 여전히 '영연방(Commonwealth)'이란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53개 영연방 국가들의 수장인 동시에 캐나다·호주 등 16개국의 국가 수장의 지위를 지금도 갖고 있다. 4년마다 영연방 국가 전체가 참가하는 영연방 게임도 열린다.

또한 영국은 군주제와 더불어 귀족제도 여전히 존속시키고 있다. 비록 수가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세습 귀족들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으며, 군주는 매년 국가에 공헌한 사람들을 선별해서 비세습 기사 작위를 내리고 있다.

대영제국의 실체는 없어진 지 오래지만 외형은 지금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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