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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왕이 죽은 500주년 청명제에서 제관이 술잔을 올리고 있다.
ⓒ 한성희
12년 간 왕위에 있던 연산군이 여자와 사치, 향락을 일삼은 것은 사실이며 정치를 잘했던 통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모정에 굶주린 정신장애자로 강조돼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중종반정 이후 조선의 절대 왕권은 약해졌고 성공한 쿠데타에 맛들린 신권이 입맛에 안 맞으면 왕을 갈아치우거나 독살하는 일이 벌어진다. 신권이 커지면서 기득권을 이루자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매관매직을 일삼고 탐관오리들로 인해 백성들의 고초가 심해진 것도 사실이다. 중종반정은 민초들과 상관없는 지배층의 정권 다툼이었고 연산군은 실패한 왕이었을 뿐이다.

중종반정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역사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연산군을 성군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승자에 의해 기록된 실록에도 약육강식의 법칙은 철저하게 적용된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6년 9월 2일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돼 위리안치 됐고 9월 24일 폐세자와 창녕대군, 양평군 등은 반정 공신들의 주장에 의해 사사됐다.

겨울에 학질에 걸려 죽은 연산군

반정이 일어난 이틀 후부터 반정세력들은 중국에 보낼 사신에게 왕이 바뀐 연유를 고하는 시나리오를 짜기 시작했다. 9월 21일 병으로 인해 연산군이 중종에게 양위했다는 시나리오가 완성된다.

만약 전왕(연산군)의 병 증세를 물으면 어릴 때부터 풍현증(風眩症)이 있었는데, 세자가 죽은 뒤 애통과 상심이 정도를 지나쳐서 전의 증세가 다시 도져 심신이 안정되지 못하며, 공연히 놀라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혼미하고 현기증이 나며 방안에 깊이 거처하면서 창문도 열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만약 세자의 병 증세를 물으면 창진(瘡疹)으로 요사(夭死)하였다고 대답한다. 만약 전왕의 소재를 물으면, 별궁에 있다고 대답한다. 만약 전왕의 아들이 몇 사람이냐고 물으면 다만 딸 하나가 있는데 나이가 어리다고 대답한다.(중종실록 1506년 9월21일)


폐세자에게 아직 사약을 내리지 않은 때이지만 이미 죽이기로 계획한 게 이 기록에서 드러났다. 이로부터 2일 후 폐세자는 사약을 받고 죽는다. 반정 세력의 시나리오는 치밀했고, 연산군은 상국인 중국에서 쿠데타의 전모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죽어야 할 존재였다.

▲ 제를 올리기 전 손을 씻는 제관.
ⓒ 한성희
연산군이 역질(疫疾)에 걸려 눈도 뜨지 못하고 물도 마실 수 없이 괴로워 한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 1506년 11월 7일. 중종은 의원을 보내라고 했으나 다음 날인 8일 "연산군이 6일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온다. 유배된 지 겨우 두 달만에 30세 젊은 나이의 연산군을 죽음으로 몰아간 '역질'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정체는 12월 9일 기록에서 드러났다. 언제 장사를 지냈는지 기록에 나와 있지 않으나 왕자의 예(3달)로 장사를 치르게 했으니 장례를 마쳤을 때거나 아직 땅에 묻지 않았을 시기였다.

사위사(辭位使) 김응기와 승습사(承襲使) 임유겸을 중국으로 보낸 후인 12월 9일 혹여 중국 사신이 와서 폐주의 일을 물을 경우를 다시 대비하려는 논의가 벌어졌다.

공조 참의 유숭조가 중종에게 "폐주가 교동에 내쫓겨 죽었으니, 만약 중국에서 와서 그 이유를 묻는다면 미리 의논하여 대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아뢴다. 연산군을 내쫓은 이유를 그럴 듯하게 조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숭조는 모범답안을 내놓는다.

"지난날 총애를 받는 뭇 계집은 안에서 고혹하고, 아첨하는 자는 밖에서 비위를 맞춰 임금을 도(道)로써 인도하지 아니하였기에 크게 인심을 잃고 거의 종사(宗社)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연산군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민심이 쏠리는 중종에게 스스로 양위했다는 작위된 내용이다. 그리고 유배된 폐주에게 찬에 정성들여 몸을 봉양했다, 시종과 여자를 보내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호위까지 붙여 불의의 변을 막게했고 옷과 물품을 들고 연산을 찾아가는 사람이 줄을 늘어설만큼 보살폈다는 말도 나온다. 그런데도 연산이 병으로 죽자 중종이 밥도 먹지 않고 애통해 했다는 삼류소설이었다.

유배된 집은 몹시 좁고 열 자(3m) 떨어진 사방을 가시 울타리로 둘러 막아 해를 볼 수 없을 정도였고 음식 구멍만 뚫어 밥을 넣어줬던 유배, 이런 곳에 위리안치 당해 죽은 연산군이 들었다면 기가 막혀 관에서 벌떡 일어날 노릇이었다.

그런데 중국으로 보낼 모범답안인 소설 여기서 연산군이 독살 당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발언이 나온다.

"복어(服御)·물선(物膳)을 받들고 가는 자가 줄을 잇게 하였으되, 불행히 학질(虐疾)에 걸려 죽으니, 전하께서는 애통하고 슬퍼하여 수라를 거두고 정지했으며…."

학질(虐疾)이란 무엇인가. 학질모기에 물려 발병하는 말라리아를 학질이라 한다. 한방에서 말라리아를 학질이라 하며 이는 여름철에 걸리는 병이다. 연산군이 죽은 것은 11월 6일이고 실록은 음력으로 기재됐으니 대충 12월 초순이라 보면 추운 겨울에 돌연 나타난 학질모기에 물려 병에 걸려 죽었다는 말이다.

학질모기에 물리면 1주일에서 2주일 정도 병원체 잠복기간이 지난 후 증세가 나타난다. 학질에 걸렸다 해도 젊은이가 하루 이틀 사이에 죽지는 않는다. 학질의 특징은 하루아침에 돌연 급사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고 동의보감에도 나와있다.

겨울철에 학질이란 터무니 없는 병으로 젊은 연산군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죽었다는 기록은, 폐세자와 왕자들을 성급하게 죽여버린 반정세력들이 눈엣가시인 연산군을 독살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 지난 4월 2일 연산군 제사를 지내는 내내 추운 겨울바람이 손 시렵도록 불었다.
ⓒ 한성희
다음 해인 2월 15일, 연산군이 병으로 아우에게 양위하니 허락해 달라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중국에 갔던 김응기와 임유겸이 돌아왔다. 왕(연산군)이 죽기 전까지 허락해 줄 수 없다는 중국의 답변을 가지고 돌아온다.

연산군을 이미 죽인 후라 이에 걸맞는 핑계를 대면 될 일이었다. 어쨌든 중종과 반정세력들에게 연산군은 죽어줘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그날 김응기와 임유겸은 조선출신 태감(내시)들을 언급하며 뇌물을 주자고 청하고 중종은 이를 허락했다.

어린 세자를 성급하게 죽인 이유

연산군은 부인 신씨(1471~1537) 사이에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금슬이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산군이 죽을 때 남긴 말은 "폐비 신씨가 보고싶다"는 전언밖에 없었다. 연산군과 신씨 사이에 출생한 7남1녀 중 살아남은 아들은 폐세자 황과 창녕대군 이다. 연산군이 폐위되자 22일 만에 폐세자(10세)는 유배지 정선에서, 창녕대군(5세)은 황해도 수안, 양평군은 제천에서 각각 사사당했다. 서자 이돈수까지 그날 사약을 먹고 죽었다.

1506년 9월 24일, 영의정 유순·좌의정 김수동·우의정 박원종·청천 부원군 유순정·무령 부원군 유자광·능천 부원군 구수영 및 여러 재추(宰樞) 1품 이상이 빈청에 모여 왕자들을 죽이자 하자, "나이가 모두 어리고 연약하니,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다"는 중종에게 반정 공신들은 우리의 뜻은 정해졌으니 차마 못하겠다고 하면 안된다고 거의 협박수준으로 왕에게 압력을 가해 일어난 비극이었다.

폐세자 이황이 죽자 중종은 장례라도 후하게 치러주자 했으나 공신들은 이마저 '관곽이나 써주면 후한 것'이라며 묵살했다.

▲ 연산군(오른쪽)과 부인 신씨(왼쪽)가 잠든 묘.
ⓒ 한성희
반정 세력들이 나이 어린 세자와 왕자들을 죽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발 빠르게 사약을 내려 죽여버린 일은 조선조에서 유래없는 사건이었다. 단종을 폐위시킨 세조도 사육신과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사건이 일어나자 4개월 만에 사약을 내렸고,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은 천수를 누렸다. 광해군의 폐세자는 유배지에서 탈출하려다가 들키자 자살한 것이지 사약을 내려 죽은 경우가 아니었다.

왕이 병으로 아우에게 양위한다는 구실을 댔으니 세자가 살아있으면 중종은 왕위를 지킬 수 없었고, 반정세력의 쿠데타도 들킬 우려가 있었다. 폐세자와 왕자들을 황급히 죽여버린 반정 공신들이 젊은 연산군을 살려둘 리 없었다. 왕자들의 죽음으로 연산군의 죽음은 예정됐다.

▲ 연산군 묘 입구의 샘. 차고 강한 맛이 났다.
ⓒ 한성희
신씨는 연산군과 달리 반정 세력에게도 현숙하고 바른 왕비였다고 인정받았다. 연산군이 죽어 강화도에 묻히자 신씨는 1512년(중종 7년) 현재 자리로 이장하게 해달라고 중종에게 청했다. 중종은 죽은 형을 위해 콩과 쌀 100석, 면포 150필, 정포 100필, 참기름 2석 등을 내려주고 이장하게 했다.

연산군은 폐위되기 9일 전인 8월 23일, 그는 자신의 운명을 감지라도 했는지 이를 예고하는 시 한 편을 남긴다.

그날 후원에서 나인들을 거느리고 잔치를 하며 초금(草琴·나뭇잎·나무껍질·풀잎으로 만든 피리)을 두어 곡조 불고난 왕은 시를 읊으며 눈물을 흘린다.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人生如草露)
만날 때가 많지 않는 것(會合不多時)


왕으로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다 누렸던 연산군이 눈물을 흘리며 인생을 풀과 이슬 같은 것이라고 탄식하게 만든 이유는 인생의 무상함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운명을 예지했기에 그랬을까.

▲ 수령 800년이 넘은 은행나무(길이 25m)는 폐군주가 묻히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 지금도 연산군의 제사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다.
ⓒ 한성희
130여 편의 시를 남긴 연산군은 30세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500년이 지난 지금도 '왕의 남자' 주연으로 나올만큼 풍자되는 연산군의 실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셈이다. 왕의 묵은 한이 그리도 깊어 이렇게 500년 지난 제삿날인 4월에도 손 시린 겨울 바람이 몰아치는 것일까.

청명제가 끝나고 연산군 묘를 내려오자 구름이 걷히며 햇볕이 쏟아졌다. 이른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가는 밝은 햇빛이 눈부셨고 이내 4월의 기온으로 돌아갔다. 4월의 더위에 제사 내내 시린 바람에서 몸을 따뜻하게 보온해줬던 오리털 파카를 벗으며 '정말 연산군의 한이 그렇게 추운 바람을 제사에 몰고 온 것일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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