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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태인 전 청와대비서관.
ⓒ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난 3일 점심 무렵이다. 휴대폰이 "삑삑" 거렸다. 메시지가 들어왔다는 신호였다.

"괴롭네요. 기사내용은 살리되 (제목의) 대통령은 정부, 또는 참여정부로 바꿔주세요. 부탁입니다."

정태인 전 청와대 비서관이 보낸 것이었다.

그날 오전 9시30분께 그와의 인터뷰가 <오마이뉴스>에 실렸다. 지난달 30일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한 것이었다.

기사 제목은 "한미 FTA는 대통령 업적조급증 탓, 대연정 제안에 이어 제2의 패착될 것"이었다.

메시지를 받자마자 그대로 했다. 수정을 요청한 이유도 묻지 않았다. 제목의 '대통령'을 '참여정부'로 바꿨다.

당사자 요청이 있으면 인터뷰는 수정해주는 법이다. 또 우리 사회에는 동양적 '의리' 문화가 남아있다. 그는 '대통령의 측근'이었다. 이제는 비판자의 위치가 된 그의 괴로움을 감안해서다.

"대통령은 역사에 관심이 많다"

인터뷰 전부터 기자의 궁금증은 간단했다.

칠레와 한국 경제는 비교할 것도 없다. 그런 칠레와의 FTA에 2년 걸렸다. 그런데 미국과는 10개월만에 끝내겠단다. 대체 어떻게 그런 발상이 가능했는지 였다.

자문자답도 해봤다.

내 생각에 노 대통령은 역사에 관심이 많다. 그냥 역사 그 자체가 아니다. 역사책에 자신이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에 주목한다. 거의 집착 수준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임기는 이제 2년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해 놓은 게 없다. 청와대는 업적 많다고 자평할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기억될 만한 것은 별로 없다.

남북 관계 잘 해봐야 결국 DJ의 공이다. DJ하면 또 하나가 있는데 IT다. 대통령은 황우석의 BT(생명공학기술)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논문 조작으로 '꽝'이 됐다.

권위의 해체는 좋다. 그러나 정부의 자화자찬일 뿐이다. 체감 경제가 안 좋으니 국민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FTA로 경제를 업그레이드했다는 것밖에 없다.

기자는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핵심을 치지 않는다. 부차적인 것에서 핵심으로 간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는 달랐다.

처음부터 FTA가 시작된 배경을 물었다. 정 전 비서관은 시원시원하게 답했다.

"YS하면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척결, DJ하면 6·15 정상회담이 떠오른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이런 게 없다. 한미 FTA는 임기 안에 뭔가 업적을 남기려는 조급증 때문이다. 여기에 관료들의 한건주의가 한몫 했다."

솔직히 의외였다. 대통령과의 관계 때문에 말하기 힘들 것으로 예단했기 때문이다. 또 내가 미리 생각했던 것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4대 선결요건 해체는 대통령의 뜻"

가장 놀란 것은 이것 이었다. 전략적 유연성이나 FTA 추진 과정이 붕어빵처럼 똑같이 졸속이었다.

"최측근이 대통령을 비판하니 레임덕이구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그의 위기의식이 심각하다고 봤다.

그는 한미 FTA 절대 반대론자는 아니었다. 치밀하게 준비해서 하자는 것이었다. 군사작전하듯 밀어붙여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정 전 비서관은 이런 말도 했다.

"스크린쿼터 축소·의약가 조정문제·자동차 배기량 문제·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등 4개는 각 부처가 다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10월부터 올 1월까지 불과 4개월 사이에 스크린쿼터 축소 등 4대 선결요건을 다 풀어버렸다. 이것은 대통령의 뜻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대통령의 뜻이 워낙 강력하니 각 부처가 반발도 못하고 풀어준 것이다."

<레디앙>에 실려 파문이 일었던 내용도 대부분 말했다.

정치권과 관료 사회를 장악한 삼성, 대통령과 김현종 본부장의 직거래 등 말이다. 외환은행 매각은 이헌재 사단의 작품, 친 FTA 관료에 대한 직설적 평가 등도 있었다. 대통령이 'FTA 마지노선'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는 말도 했다.

정 전 비서관은 "나는 386이 아닌 475"라고 했다. 그는 78학번이다. "386들은 무능하고 아는 게 없다, 그래서 관료들에게 휘둘린다"고도 했다.

기자는 86학번이다. 전형적인 386이다. 그러나 솔직히 그의 비판에 공감했다. 무능하면서도 '인식론적(또는 선험적) 우월성'에 빠진 386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는 대부분 '오프'(비보도)를 전제로 얘기했다. 그래서 지켰다. 오프를 걸지 않은 말도 있었다. 그러나 민감한 부분이 있어 걸러냈다.

이수일과 심순애의 신파극으로 전락

인터뷰가 나간 뒤 대부분 언론의 반응은 '역시나'였다.

측근이 대통령을 비판한 '이유'는 몰라라했다. 측근이 대통령을 '비판'했다는 것에만 눈길을 줬다. FTA 만세론자들이 졸속 추진을 문제 삼을 리 없다.

"한 '왕의 남자'가 배신을 때렸다"는 논조였다. '이수일과 심순애'식의 신파극이 됐다. '정태인' 이름 석자는 포털 검색 순위 4위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네티즌 '산장지기'는 "자기를 키워준 대통령에 대한 배은망덕"이라고 비판했다. 뉴라이트닷컴에 실린 이 글을 <조선닷컴>은 대서특필했다.

맹자는 "패도정치를 하는 왕은 축출해도 된다"고 했다. 맹자는 기원전 4세기, 2400년전 인물이다. 21세기 민주국가 대한민국에서 '봉건적 충성론'이 횡행한다.

이 논리라면 김일성의 유훈이 살아있는 북한은 제대로 된 나라다.

7일 <동아일보>의 한 여성 논설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청와대를 떠나자마자 '그들은 미쳤다'고 공격하는 조직에서 일말의 남자다움을 바라는 게 잘못이다".

남자다움이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 단어가 아닐 것이다.

같은 신문 10일자 칼럼도 마찬가지다.

"권력 밖에 나가 생각이 바뀌었다면 공식 회견 등을 하고 당당하게 그 이유를 설명해야지, 뒤에서 비수를 꽂는 방식으로 비난하는 것은 비겁하다"

인터넷 신문과 한 인터뷰는 공식 회견이 아닌가?

신문 1면 놓고 격론을 벌인다면서...

<조선일보>는 5일 사설을 썼다. 제목이 '청와대가 자주파와 동맹파의 패싸움장인가'다.

<조선닷컴>에 '갈아만든 이슈'(갈슈)라는 코너가 있다. 지난해 5월 6일 '갈슈'는 창사 85년만에 최초로 편집국 회의를 공개했다. 사전 설명문에 이런 말이 들어있다.

"매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열리는 편집국 회의는 다음날 신문에 어떤 기사를 담을 것인지를 정하는 핵심회의. 각 부장들의 기사 보고와 1면부터 주요 면에 어떤 기사를 배치할지를 놓고 국장단과 부장단 간에 격론이 벌어진다."

<조선> 사설의 논리대로라면 위 설명은 바뀌어야 한다. "<조선> 편집국 회의는 강경파와 온건파가 매일 지지고 볶는 난장판"이라고.

일간지는 1년이면 300일 넘게 나온다. 일개 신문의 1면 기사, 1년이면 300개나 만드는 것을 놓고 격론을 벌인단다. 그럼 국가 운명을 가를 FTA를 놓고는 패싸움보다 더 한 짓이 벌어져야 정상 아닌가?

"권력에서 밀린 반미 자주파가 친미 실용파를 향해 반격에 나섰다"

"행담도 사건 때 쌓인 386에 대한 감정 표출"


언론의 해석과 분석은 구구했다.

"여전히 손가락만 보니..."

정 전 비서관은 인터뷰 때 유시민 장관 얘기도 했다. 그와 유 장관은 서울대 경제학과 78학번 동기다. 절친하다.

유 장관에 대한 얘기는 화젯거리는 될 만 했다. 그러나 정말 부차적이고 정황적이었다. 그래서 쓰지 않았다.

만약 <오마이뉴스>가 이 내용을 실었다면? 신문 지면은 '유시민'으로 도배됐을 것이다.

정 전 비서관은 7일 글을 냈다. '견지망월(見指望月)을 자초한 나를 자책한다'였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본다"는 것이었다.

한미 FTA의 위험성을 알리려 했는데 대통령 비판으로만 기억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견지망월'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그래서 이왕 시작된 한미 FTA 협상이 충분히(꼭 미 무역대표부가 밝힌 만큼) 공개되고 국회에서, 또 시민사회에서 진지하게 토론되어 언제가 되든 우리의 국익, 나아가서 동북아 공동체 형성에 도움이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지난 7일 밤 12시가 넘어 정 전 비서관의 술 자리에 끼었다. 그는 술은 안 마셨다. 대신 물만 큰 통으로 3개를 마셨다.

"견지망월에 대해 언론들이 뭐라고 한지 아세요"

"응 대충 들었어"

"꼬리내린 정태인 대통령에게 사과 이런 식입니다. '손가락을 흔든 것은 정씨 자신'이라는 사설도 있던데요…"

"달을 보라고 했더니 또 손가락만 보는군…"

이런 저런 상황에 대해 많은 말을 했다. 그러나 결론은 똑같았다.

한미 FTA는 공론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1 대 1 토론을 하고 싶다고도 했다.

CBS·<오마이뉴스>·<레디앙> 의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다. 각 내용이 아주 비슷하다. 심지어 문장 자체가 복사한 듯 똑같은 경우도 있다.

이게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정신 나간 사람'이라면 이렇게 일관될 수는 없다.

정태인은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참담하다. 한미 FTA는 국가 존망이 걸린 문제다. 그런데 한 개인의 아파트 전세 계약만도 못하게 처리되고 있다.

'갈슈' 2005년 5월 6일 동영상을 보면 앵커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갈슈가) 발걸음을 뗐는데요 앞으로는 사고 좀 치겠습니다. 논쟁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니까요"

'갈슈' 앵커의 말대로라면 대한민국은 죽은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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