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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에 정착해 새만금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는 최병수가 새만금 해창 갯벌에 세운 작품.
ⓒ 허철희
올해로 미술(?) 인생 20년을 맞은 '한열이를 살려내라!'의 걸개그림 작가인 현장미술가 최병수(47)가 책을 냈다. <목수, 화가에게 말 걸다>(현문서가 펴냄). 미술평론가이자 목수김씨인 김진송(48)이 산파역을 맡아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글을 썼다.

출판사의 권유로 10여 년 전에 책을 내려고 했다가 여의치 않아 그만뒀던 그가 위암과 교통사고까지 겪고 나서 이번에는 먼저 책을 내자고 했다는 후문이다.

목수김씨와 출판사 편집진이 강화도로, 대추리로, 마석으로, 여수로 근 1년 동안 최병수의 동선을 따라 함께 움직이면서, 그의 말을 녹취하고 기록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세상에 대해, 사회운동에 대해, 지구환경에 대해, 미술에 대해, 그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고 한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듣고 그를 인터뷰해야겠다고 맘먹고, 그가 있다는 여수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갈등을 겪고 있을 때, 그가 서울에 올라왔다는 '초특급정보'가 입수됐다. 그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저편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와의 인터뷰는 식목일 낮, 인사동에서 있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약속장소인 찻집에 온 탓에 창가 자리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찻집 앞에서 서성이는 이가 눈에 들어왔다. 빡빡머리에 검정고무신을 신은 품새가 영락없이 최병수였다. 약간의 장난기가 발동하여 그에게 전화를 넣어 다짜고짜 지금 찻집 앞에서 두리번거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느닷없는 공격(?)에 화들짝 놀란 그가 찻집 위를 한번 쳐다보곤 곧바로 올라왔다.

최병수와의 인터뷰는 이렇게 의도하지 않았던 가벼운 퍼포먼스로 시작했다.

20년간 시대의 들판을 달리다

"아, 이제야 졸업했습니다."

10년 만에 책을 낸 소감을 묻자 최병수는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얘기했다. "졸업!" '졸업' 하면 흔히들 '끝'을 생각하지만 '시작'이란 의미도 함께 갖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서야 그가 말한 졸업의 의미가 조금 이해됐다.

▲ 식목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최병수.
ⓒ 조성일
상급학교에 진학해 치르는 입학식은 바로 전에 졸업식을 가져야 가능했던 것처럼 그가 말한 '졸업'은 뜻하지 않게 '관제화가'가 되어 숨 가쁘게 앞만 보고 달려온 20여 년을 되돌아보고, 다시 새로운 20년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리라. 물론 10년 전에 내지 못했던 책을 드디어 냈다는 의미가 더 크겠지만 말이다.

한편으론 혹시 큰 병을 얻고 난 뒤라 신변을 정리하는 의미를 담아 졸업이란 표현을 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묻질 못했다. 대신 자신도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는 목수김씨의 글에서 비슷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우아하게 다듬어내는 품성을 지니지 못했다. 다른 한편에서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끈을 풀어버리려고 안달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는 여전히 어리석게도 자신을 더 단단한 끈으로 동여매고 있었다."

그러면서 목수김씨는 "이제부터 최병수를 만나거든 제발 어떻게 살았는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어떻게 화가가 되었는지를 물어보지 마라"며 그가 이 책에서 죄다 들려줄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리고 혹시 책제목에 나오는 '목수'를 함께 작업한 '목수김씨'로 오해할까봐 미리 얘기하면, '목수'는 최병수가 화가가 되기 전, 중국집 배달부, 전기공, 웨이터, 막노동꾼 등 18개의 직업을 거친 끝에 가졌던 마지막 직업으로, 화가 이전의 최병수와 화가 이후의 최병수를 이어주는 고리이다.

피라미드에 무너지다

이 책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은 최병수는 그동안 자신의 몸 안을 휘젓고 다니던 나쁜 액운을 다 씻어버렸는지 경쾌한 소리를 냈다.

▲ 최병수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장산곶매>
ⓒ 최병수
그의 경쾌함은 10여 년 전, 책을 내려고 목수김씨와 여행을 하면서 삶과 예술, 그리고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녹취했었다가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던 심신의 상태를 생각하면 무척 반갑다.

"그때 신문 사회면에도 나고 했었는데, 이집트에만 있는 줄 알았던 '피라미드'를 했었습니다. 친구가 하도 권유해 신사동인가 어딜 갔는데, 거기서 서울대 운동권 선후배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안 믿을 재간이 있습니까."

그래서 시작한 피라미드. 하지만 한 달이 지나면서 이건 아니다란 생각이 들었고, 당시 결혼까지 생각하며 사귀던 여자 친구의 삶이 뒤틀리는 걸 보고 시쳇말로 '꼭지가 돈' 그는 석유가 가득 든 통을 배낭에 넣어 짊어지고 피라미드 회사 교육장으로 가서 기자들 불러달라고 난동을 피우다 업무방해죄로 철창신세를 지게 된다.

그러나 그의 이런 난동에는 피라미드에 대한 배신감만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말에 불어 닥친 거대한 세계사적 변화 이후 민중운동이 와해되기 시작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때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난리였잖아요. 끝나기는 뭐가 끝나, 지금 생각해도, 참, 사적인 감정을 왜 대놓고 얘기하고, 거기에다 문화유산 답사다 뭐다 해서 또 한바탕 몰려다니고…."

그는 이미 지쳐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 여차저차해서 피라미드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지금도 억울해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피라미드를 하고 있었으면서 안하는 척 쉬쉬했던 점이다. 더더구나 피라미드를 한다고 그를 벌레 취급하던 사람들도 알고 보니 이미 하고 있었고 구치소에서 서너 달 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가족들도
이미 피라미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김진송씨가 작업할 때 나보고 말하기 싫으면 피라미드 얘기 안 해도 된다고 했는데, 왜 안 해요. 얘길 해야 혹시 하려고 맘먹고 있던 사람들이 피해를 안 보죠. 그때 주변 사람들이나 가족들이 얘기했으면 저도 안 했었죠. 그걸 왜 얘기 안 해요."

환경에 관심을 갖다

"이 책이 그래도 그동안의 현장미술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현장미술은 아무렇게나 그냥 나오는 걸로 아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치열하고 세심한 기획과 작업과정이 요구됩니다. 그런 점에서 제 개인적 삶과 경험들을 풀어놓은 것이지만 이 책은 걸개그림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담고 있어 작으나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노동해방도> 작업 장면.
ⓒ 최병수
15년 전 '민중미술 15년 전'을 할 때다. 전시를 기획하는 측에서 '한열이 살려내라!'가 있느냐고 최병수에게 묻더란다. 그래서 그는 너무 당연한 물음이지만 "있다" 그랬다. 그랬더니 말 잇기 하듯 다른 작품들도 있느냐고 물었고, 그는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누른 듯 "있다"만 반복했다.

"전 그림을 거의 다 갖고 있습니다. 공동창작을 많이들 하는데, 공동창작은 공동책임이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말은 공동으로 책임을 안 진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아마 그때 제 그림 말고는 대부분 새로 제작해서 전시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윤리라는 기본을 무시하다 결국 엄청난 일을 저지른 황우석 사건처럼 우리의 운동도 기본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1988년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임금 투쟁 하는 기사를 보고 최병수는 진작부터 관심을 가져오던 환경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오염 사업장 노동자들이 자신의 폐를 녹게 만드는 공장시설 개선을 위한 파업이 아니라 임금투쟁을 하는 것을 보고 모순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물론 임금 투쟁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보다 기본적인 환경문제를 내걸고 하는 파업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요즘 여수에 정착(?)하며 새만금 반대 투쟁에 적극 나서고 있다.

펭귄이 녹아내리다

1980년대 미술운동의 하나로 벽화운동을 하던 친구들의 부탁으로 작업용 발판을 짜주고 시간이 남아 예쁜 개나리꽃 몇 송이를 그렸다가 경찰에 의해 화가가 되었다가 진짜 화가가 된 최병수의 관심은 <한열이를 살려내라!>를 시작으로 거침없이 시대의 들판을 달려왔다. 때로는 <노동해방도> <장산곶매>을 앞세우고 노동해방을 꿈꾸기도 하고, <반전반핵도>을 외치고, <성장한 야만>에 조소를 보내기도 했다.

▲ <목수, 화가에게 말 걸다> 겉그림.
ⓒ 현문서가
전쟁을 막기 위한 인간방패가 되어 <야만의 둥지> 속으로 서슴없이 들어가기도 했던 최병수는 사패산에도, 평택에도, 새만금에도 언제나 그를 필요로 하는 현장에 어김없이 있었다. 그건 더듬이를 항상 세상을 향해 열어놓은 그의 오감이 만들어낸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다.

최병수는 남태평양의 투발루공화국에 자유의 여신상을 세울 계획을 갖고 있다. 투발루공화국은 매년 수면이 상승하여 앞으로 100년 후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 처한 돈 없고 힘없는 나라다.

"자유의 여신상에 연도별 수위를 나타낼 겁니다.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점점 상승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의도죠. 그럼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미국 사람들도 기겁을 할 겁니다. 뉴욕도 지구 온난화의 위기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까요."

그렇다. 그의 작업은 우리 눈높이보다 딱 반걸음 앞에 있다. 2002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리우+10 세계정상회의'에서 보여준, 서서히 녹아 없어지는 얼음 펭귄 조각이 일으켰던 엄청난 반향을 상기해보면 알 수 있으리라.

오는 9월 부산비엔날레에 초대됐다는 최병수는 청계천과 연계된 작품을 구상중이라고만 밝히면서 인터뷰를 갈무리하며 이렇게 반문했다.

"노동자, 농민, 민중, 그리고 자연이 모두 한 덩어리가 아닌가요?"

▲ 최병수의 강화도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목수김씨 김진송(왼쪽)과 최병수.
ⓒ 현문서가

목수, 화가에게 말 걸다

최병수.김진송 지음, 현실문화(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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