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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책전문출판사를 지향하며 낸 첫책 <우리민족 장수비결>을 펴보고 있는 김성균 대표.
ⓒ 조성일
어떤 일을 추진할 때 회의(懷疑)에 회의를,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망설이는 사람을 '햄릿형 인간'이라고 한다면, 정의감에 이끌려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을 향해 돌진하는 사람은 '돈키호테형 인간'이다.

지금 우리가 만나려고 하는 김성균(42·도서출판 폄 대표)씨는 돈키호테형 인간이다. '북한책전문출판사'를 가꾸려는, 어쩌면 무모해 보이는 일을 저돌적으로 밀고나가는 그의 열정을 보면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모습과 너무도 닮은 꼴이다.

김성균은 최근 '북쪽에서 쓴 건강보감'이라는 부제를 단 북한책 <우리민족 장수비결>(강영철 외 18인 지음)을 내고 출판가 말석에 명함을 내밀었다. 그리고 책을 많이 팔기 위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고 있다.

출판사 대표가 책을 많이 팔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너무도 당연한 일을 굳이 입 밖으로 표현하는 것은 책을 많이 팔아야 하는 이유가 출판사 초보 대표에겐 아직 사치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출판을 통해 통일을 위한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하고 싶어서란다. 과거 운동권이었던 그의 전력을 들춰보면 그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돈키호테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는 마음이 몹시 급했다. 3월 30일 인터뷰 좀 하자는 기자의 전화에 "오늘 저녁 9시에 만나자"고 할 정도였다. 북한책을 알릴 수 있는 기회라면 하루를 최대한 늘려가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3월 말일 오전 10시, 김성균씨와의 인터뷰는 그가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점검 차 들린다는 서울 광화문의 교보문고와 인근 찻집에서 서너 시간동안 이루어졌다.

북측과 직접 저작권 계약

ⓒ 도서출판 폄
"저작권사무국은 저작권자의 승인 밑에 아래의 저작물들의 출판권한을 남측 '도서출판 폄'에 양도하였음을 확인합니다."

김성균씨가 낸 첫 책 <우리민족 장수비결> 앞날개에, 이름만 박은 정말 소박한 필자 소개 아래 인쇄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저작권 사무국'에서 발행한 '확인서' 내용이다.

그동안 남쪽에서 나왔던 북한 책들 대부분은 북쪽의 허락 없이 책을 낸 뒤 나중에 저작권 관련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었고, 일부는 아예 무단출판이었다. 중국측 대리인을 통해 저작권 계약을 하고 2004년에 나왔던 북 유명작가의 소설이, 저작권자인 북 작가가 남쪽 법원에 저작권 관련 소송을 내는 일까지 있었다. 이 책을 낸 출판사는 지금 북쪽과 직접 계약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책날개에 '확인서'를 싣는 것은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북측 저작권자의 확실한 승인 아래 책을 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식적인 통로를 거쳐 북쪽과 계약을 체결한 후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남쪽에서 책을 낸 것은 아마 이 책이 처음일 겁니다."

계약관계를 설명하는 김성균씨의 목소리는 여전히 들떠 있다. 통일을 위한 일을 해보겠다고 생각하다 찾아낸, 그것도 모든 사람들이 도시락 싸들고 따라다니며 말리는 출판사를 하기로 맘먹고 무작정 저작권을 위해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이하 경문협)을 찾아가 다짜고짜 북한책을 내고 싶다고 졸라댈 때만 해도 그 가능성을 크게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든 관심 가질 수 있는 건강책 선택

"우선 남쪽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을 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한 사람이라도 더 책을 읽게 되고, 책을 읽게 되면 자연스럽게 북쪽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이런 게 쌓이고 쌓이면 남북이 서로 이해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남북 누구에게나 관심사인 건강책을 선택했습니다."

▲ 김성균 대표가 앞으로 내고 싶은 북한책에 관한 것을 적어놓은 메모.
ⓒ 조성일
첫 책으로 하필 건강책을 낸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한 김성균씨는 지갑 속에 여러 번 접힌 종이를 꺼내 펼친다. 거기엔 그가 공식 채널을 통해 북에서 수입된 3000여 권의 책을 꼼꼼히 훑어보고 자신이 앞으로 낼 수 있다고 생각해 어렵사리 추려낸 10여 권의 목록이 적혀 있었다. 대부분이 사상을 다루고 있어 남쪽에서 내기가 적합하지 않았고, 그가 추려낸 것들은 건강에 관한 것들이 주류였다.

첫 책 <우리민족 장수비결>은 북한의 의학박사와 교수 등 18명이 구소련, 중국, 터키, 불가리아, 북한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868종의 건강 의학 관련 책과 8500여 건의 자료를 정리하여 고려의학을 집대성한 건강보감이다.

"서양의학과 한의학에다 민간요법까지 종합하고 있는 북 의학인 고려의학의 장수에 관한 연구 성과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북쪽의 내로라는 학자들이 북쪽의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쉽게 서술한 책이어서 남쪽 독자들의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민족 장수비결>에 나오는 건강 비결, 식전 물 마시기와 우유 다이어트를 권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책 설명하는 그의 열정의 이면에는 무려 10여 번의 교정 과정을 거쳐야만 했던 녹록치 않았던 제작상의 어려움이 있었다.

"원본에서 아주 불편한 표현만 약간 수정하는 수준이 아니라 내용은 건드리지 않되 남쪽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교열까지 해가며 작업했습니다. 나중엔 지칠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 김성균씨는 혹자는 북쪽이 우리와 같은 말을 쓰니까 다른 것보다 쉽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르는데, 그건 정말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덧붙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민주광장> 사건 주인공

김성균씨가 뜻하지 않게 출판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꽤 오래 해오던 고시 공부를 그만두면서부터다.

출세를 위해서라기보다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발판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아 고시의 꿈을 가졌던 그는 3년 전 2차 시험을 보고 난 후 휴식을 겸해 후배들과 중국 여행을 했다. 그때 그는 잘사는 나라 남한 사람들에 대한 중국 장삼이사들의 뜨거운 관심을 보면서 열심히 살려고 하는 대륙인들의 힘을 느껴졌고, 그 순간 몸이 오싹해졌다고 한다.

▲ 북쪽 필자를 직접 섭외해서 책을 내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김성균 대표.
ⓒ 조성일
"거대한 중국이 너무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우리가 과연 그 경제력을 얼마나 더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열심히 하지만 규모가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북으로 분단돼 있어 힘이 분산되잖아요. 그래서 그때 남과 북이 서로 장점을 나누며 화해협력해야 한다 그런 생각에서 통일을 위한 일을 해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김성균씨의 이름을 기억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1987년 학생운동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기억되는 고려대 총학생회 기관지 <민주광장> 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그다.

그는 특별한 의미 없이 법대에 들어가 우연한 기회에 가입한 서클을 통해 '지금 당장 해야할 일이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의식화(?)됐다. 그리고 보다 대중적인 기관지를 표방하며 창간된 총학생회 기관지 <민주광장>의 초대편집장으로서 '미국 포고문'과 '소련 포고문'을 비교하면서 쓴 글 '점령군인가, 해방군인가'라는 글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으면서 철창 신세를 졌다.

이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신문기자가 되려고 몇 군데 신문사 입사시험을 봤지만 2차에서 번번이 낙방했고, 전력 때문에 오직 한 두 신문사만 겨냥해 공부하는 그를 친구들이 극구 말리기도 했다. 한때는 사람이 많이 있는 곳에서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친구를 졸라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도매법인에서 일하기도 했었다.

책 정가 5%는 북 기초의료 지원금

김성균은 지금 당장 다음 책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 <우리민족 장수비결>에 좀 더 많은 힘을 쏟기 위해서다. 동생 사무실에 빌붙어 있는 말 그대로 '1인 출판사'이기 때문에 기획에서 영업까지 모든 일은 혼자 도맡아 하기 때문에 힘의 분산을 막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는 이 책을 한 권이라도 더 팔아야 한다. 앞에서 얘기한, 통일을 위한 밑거름이 거시적 목표라면, 선인세 형태로 지급된 저작권료와 별개로 정가의 5%를 북쪽의 기초의료를 지원하는 일에 쓸 작정인 미시적 목표 때문이다. 그는 지원의 공정성을 위해 북쪽 지원을 위해 여러 일을 하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을 통해서 한다.

"북쪽에는 아주 미약하지만 저작권료, 기초의료 지원 등 경제적 도움을 주고, 남쪽에는 건강과 장수에 관한 새롭고도 소중한 정보를 줄 수 있어 남북 모두에게 도움에 되는 그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일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작은 일들이 켜켜이 쌓이면 가능한 일 아닙니까?"

김성균씨는 꿈이 있다. 앞으로 지금 계획하고 있는 책 10여 종을 내고 나면 북쪽의 필자와의 직접 계약을 통해 북보다 남쪽에서 먼저 책이 나올 수 있도록 해보는 것이란다. 아울러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김성균은 자신이 하는 일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신명을 다 바치는 것은 경제성이 없지만 매우 의미 있는 일이고, 누군가가 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기에 그 누군가는 바로 자신이 아니겠느냐고 감히 말한다.

승산이 없는 싸움을 이처럼 즐겁게 하는 것을 보고 기자는 물을 만난 물고기라는 표현을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민족 장수비결 - 북쪽에서 쓴 건강보감

강영철 외 지음, 폄(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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