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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랑채 대문에 잡힌 영모당
ⓒ 정윤섭
한천동의 중심영역인 영모당(永慕堂)으로 가기 위해서는 왼편의 계단식 논을 지나야 한다. 입구의 연못을 지나 비교적 완만한 지형에 들어서 있는 논들을 지나면 '영모당'이 나온다. 이 논들은 영모당을 관리하기 위해 마련한 문중 답(畓)이라고 할 수 있으며 보통 제지기들이 이러한 땅을 관리하며 산다.

보통 제각이 마을과 떨어진 산중에 있기 때문에 '산지기(또는 제지기)'라는 호칭을 쓰는데, 한 문중의 묘와 산을 관리하며 살기 때문에 붙여진 호칭이다. 제지기는 보통 문중 답을 일정부분 양도받아 이를 기반으로 생활을 해결하며 살아간다. 예전에는 대부분의 제각에 제지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제지기가 살고 있는 곳을 찾아보기 어렵다.

예전에는 이런 문중 답을 서로 벌기 위해 나섰지만 이제는 문중 답을 벌며 제지기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은 농촌에서 소작으로 먹고살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열악한 주거환경 때문에도 제각의 행랑채에서 사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곳 영모당에는 행랑채에 제지기가 살고 있는데 그만큼 벌어먹을 수 있는 전답의 규모가 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바깥행랑채인 우사
ⓒ 정윤섭
이곳의 제지기는 80마지기 가량의 농토를 번다고 하는데 지금도 80마지기는 적지 않은 규모이지만 옛날 같으면 매우 큰 규모의 농사였다. 영모당의 바깥행랑채에는 제지기가 기르는지 개 한 마리가 주인 아닌 손님을 반긴다. 재미있는 것은 행랑채 벽면에 스카이라이프 안테나가 걸려 있어 오래전의 시간에 머물러 있는 듯한 이곳에서 묘한 문명의 이기를 느끼게 한다.

조상을 모시기 위해 지은 집 제각

제각은 보통 무덤 근처에 제청(祭廳)의 용도로 지은 집을 말한다. 제청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양반층에서 기제사를 지내기 위해 사당 옆에 지은 것을 말하는데, 이와 유사한 재실(齋室)도 무덤이나 사당 옆에 있었으며 제사를 지내기 위한 집으로 의례도구의 보관과 문상객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기후가 좋지 않으면 제청이나 재실에서 묘제를 지내기도 해 이 때문에 제각과 재실·제청을 혼동하여 부르기도 한다.

농촌에서 자란 사람들은 보통 추수가 끝나면 시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시제사가 끝나고 어른들이 나누어준 떡을 얻어먹은 기억도 아주 아득한 추억이 되어 있다. 지금은 시제사를 준비하는 제지기도 찾아보기 어렵고 참여하는 사람도 없어 대부분 간단하게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상을 모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유교사상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는 죽은 이를 모시는 공간으로서 제각을 지었는데 제각은 죽은 이를 기려 제사를 지내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각은 일정한 양식은 없으나 무덤의 뒤쪽에 지을 수는 없으며 대개 제청으로 사용하는 대청마루가 가운데 자리 잡은 4칸 규모의 맞배지붕 또는 박공지붕이나 합각지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 강진 한천동 제각
ⓒ 정윤섭
조상의 묘를 쓰면 보통 묘와 가까운 거리에 제각을 짓게 되는데 문중의 세력에 따라 제각의 규모도 차이가 있다. 이곳 해남윤씨가의 시조를 모시고 있는 영모당은 제각의 규모도 크고 웅장하지만 전체적으로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제각의 형식을 잘 갖추고 있다.

해남윤씨 영모당은 1687년(숙종 13) 건립된 것으로 광전, 원헌, 원학 3부자를 제향하고 있다. 이곳에 영모당이 건립되게 된 것은 한천처사 유익(唯益)이 이곳에 은둔한 것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유익은 어초은 윤효정(녹우당에 처음 터를 닦은 분)의 증손이자 행당 윤복(尹復)의 손자로 그의 형인 윤유겸과 함께 성균관 유생으로 학문을 연마하였다. 형이 이이담의 폐비상소에 가담하자 이를 만류하였는데, 이를 듣지 않자 강진 한천동에서 은둔하던 중 우연히 개간 중에 선대의 묘전지석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때 실전(失傳)되었던 윤광전과 두 아들 윤원봉, 윤원학 삼부자의 묘를 찾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유익이 중심이 되어 해남윤씨들은 묘소를 새롭게 수축하였으며, 1687년(숙종 13)에 영모당을 창건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광전, 원봉, 원학 삼부자를 제향하게 되었다 한다.

▲ 영모당의 행랑채 정면
ⓒ 정윤섭
영모당은 창건당시 5칸의 제각과 제직사 · 대문 · 자손 유숙실 등을 축조하였고 1812년(순조 12)에는 일부를 보수하였다. 현재 영모당은 정면 5간, 측면 2간의 단층팔작집으로 된 'ᄃ'자형 구조의 총 34간 규모의 큰 행각으로 행랑채와 양편에 2동의 바깥행랑채 등 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례의 기능을 충족시켜 줄 건물형태를 잘 갖추고 있다.

이 영모당은 최초 건립된 후 지금까지 거의 그 원형이 유지 관리되고 있으며 제각의 구조를 잘 갖추고 있어 건축뿐만 아니라 당시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영모당은 다른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규모를 잘 갖추고 있어 지방문화재 민속자료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배치에 있어 유교 건축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일축선기법, 대칭에 의한 정형화가 이루어져 있고, 특히 규모가 크고 부재의 결구기법이나 양식적인 면이 뛰어나다는 점 등에서 높이 평가받는 제각 건물이다.

이곳 영모당에서 재미있게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행랑채 지붕에 보이는 '환기용(換氣用)'의 솟을 지붕창 구조물이다. 녹우당의 안채 부엌지붕에 있는 환기용 솟을 지붕창 구조물이 이곳 행랑채 건물 지붕에도 있는 것이다.

▲ 행랑채 지붕에 보이는 환기용 구조물
ⓒ 정윤섭
이러한 환기용 구조물은 덕정동 '추원당'의 행랑채에도 나타난다. 해남윤씨가 관련 건축물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는 녹우당 사랑채에 보이는 겹처마(차양)양식이 관련건축물에도 나타나는 것과 흡사하여 해남윤씨가 건축 구조물의 공통성을 엿볼 수 있다.

행랑채 가운데의 높직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영모당이 나온다. 이곳은 행랑채의 구조가 영모당쪽으로 날개를 단 'ㄷ'자 형 구조여서 영모당을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따라서 자연히 그 사이에는 넓은 중정(中庭)마당이 형성되어 제례와 많은 문중인의 모임에 편리한 외부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중정의 양측으로는 각각 바깥으로 출입하는 협문(작은 쪽문)이 나있는데 우측을 통해서는 영모당 뒤에 모셔져 있는 시조들의 묘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영모당의 내부는 큰 강당 형식의 통간(通間)으로 되어 있어 널직한 대청마루를 연상시킨다. 이 때문에 문을 열어 위로 올릴 경우 밖의 공간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매우 시원하고 탁 트인 느낌을 갖게 한다. 여름에 이곳에서 강연회라도 연다면 안성맞춤일 것 같은 공간이다.

▲ 앞뒤가 확 트인 통간 형식의 영모당 강당
ⓒ 정윤섭
영모당이 위치한 주변은 그리 높지 않은 산들로 둘러져 있고 뒤편 우측의 산기슭에는 중시조 광전과 아들 단학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영모당 바로 뒤편은 시조 존부로부터 행적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을 모신 선대의 묘역이다. 일종의 신성구역이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생몰연대와 묘가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설단을 하여 묘비로만 대신하여 놓고 있다.

해남윤씨 시조는 고려 중엽 때 사람인 존부(存富)로 부터 시작하여 광혁(光奕), 형(衡), 효정(孝定), 천집(川집), 환(桓), 록화(祿和)로 이어진다. 하지만 7대손까지는 출생지, 거주지, 묘소 등의 행적을 알 수 없다.

▲ 해남윤씨 1대 시조부터 7대까지 모시고 있는 영모당 뒤 묘역
ⓒ 정윤섭

영모당의 중심인물 광전

기록을 통해 실존인물로 확인할 수 있는 인물은 중시조인 8대손 광전(光琠)으로, 중시조를 둔 것 또한 이러한 실존인물로서의 의미를 둔 것으로 보인다. 광전은 녹우당에 보존되어 있는 보물 제483호인 지정십사년노비문권(1354년, 공민왕 3)에 등장하는 인물로 이 문서를 통해 실존이 증명되고 있다.

시조 존부(存富)에서부터 9세 단학(丹鶴)까지는 묘가 실전(失傳)되어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순치연간(효종·숙종 연대)에 한 전부(田夫)가 밭을 개간하다가 광전과 그의 아들인 단학의 묘지석(誌石)이 개간하던 삽에 딸려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전부가 무지하여 내다 버렸기 때문에 지석을 찾지 못하여 광전과 단학의 신위(神位)를 정하지 못하고 묘를 썼다고 한다.

이곳 한천동의 중심인물은 광전(光琠)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시조는 물론 존부이지만 광전은 그의 존재가 당시의 <노비문서>를 통해 실존인물로 확인됨으로써 해남윤씨가의 뿌리가 확립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노비문서는 우리나라의 현존 노비문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이어서 그 문헌적 가치가 매우 높다. 또한 당시 고려말 노비에 대한 신부구조등의 생활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조선 500년 역사를 이어온 고산 윤선도 해남 윤씨가의 학문과 예술 그리고 자연친화적인 삶의 자취를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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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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