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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줄기세포' 논문 조작 사건 수사가 막바지로 치달아 가고 있지만 황우석 교수를 둘러싼 인터넷상의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일부 황 교수 지지자들이 서울대 연구처장에게 폭행을 가하고 분신·음독 등의 극단적인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는 '비뚤어진 애국주의'라는 우려도 많습니다. 그러나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는 "정체된 진보는 보수"라며 이 같은 우려를 반박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필자의 동의를 얻어 김씨가 23일 <딴지일보>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게재합니다. <편집자주>
▲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전국 35개 여성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1월 4일 오전 기자회견을 통해 황우석 교수팀의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사용된 난자 채취과정에서 윤리위반 여부도 조속히 가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내게 너무 아찔한 그녀"란 영활 봤다. 할리우드 하이틴 성장영화의 클리셰를 조금은 벗어난지라 제법 재밌던 영화 말미에 낯익은 동양인 단역 하나가 불쑥 등장한다. 누구지. 한참 생각했다. 앗, 노랑나비, 이승희. 대사 한 줄 없어 연기보단 논버벌(non-verbal) 퍼포먼스에 더 근사해 순간, 아주 순간 애처롭단 감상이 스치기도 했으나 연고 하나 없는 미국연예계에서 제 힘으로 살아 남아있구나 싶어 이내 대견했다.

그녀가 세계적 지명도의 <플레이보이>, 보다 정확하게는 그 자매지 <란제리> 커버걸이란 이유로 대한민국이 열광한 게 그러니까 7, 8년 전이다. 프로페셔널, 페미니스트, 국위선양이란 수사들이 남세스럽긴 했다만 그땐 거기 또 그만큼의 미덕이 분명 존재했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유연실의 국내최초 누드화보를 음란물로 발간등록 취소한 게 겨우 그 몇 년 전인 걸 생각하면, 누드로 그만한 대접까지 가능하단 인식전환만으로도, 그 전환의 폭만큼 내겐 진보였다. <플레이보이>에 기고하던 60년대 미국의 좌파들과 성의 정치성을 간파하고 포르노 합법화 이룬 유럽의 68세대들이 당대 진보에 기여했던 것과 '다이다이'였다. 386이 계면쩍어 손 못 댄 영역, 그녀가 몸 하나로 메웠던 게다.

한편으론, 건강한 생활인인 그녀를 폄훼하려는 뜻 추호도 없다만, 우리가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대리만족 느끼던 게 그 수위였던 것이기도 했다. 쭉쭉빵빵 백인들 사이에서 황색 숏다리들의 자괴를 그 정도 상쇄시켜준 공덕만으로도 그녀가 국위를 선양씩이나 했다 표현될 수 있었던 시절, 불과 7, 8년 전이란 말이다. 그녀 다시 와도 이젠 공항 기자회견은 없다. 지금은 <란제리>가 아니라 <플레이보이>에서 뛰는 박지성 정도는 돼야 한다.

'황우석의 유명세=박정희의 권력'이라는 로직에 화가 난다

검은 피부의 식민 지식인 파농이 갈파한 백색 가면 쓰고픈 포스트콜로니얼(post-colonial)의 열등의식이, 사회학 용어의 도움이나 먹물들의 계몽 없이, 그 키 작은 평발 축구선수 하나에 의해 그렇게 하릴없이 대중들 사이에서 해체되어 가는 걸 지켜보며 난 또 그만큼의 진보를 느낀다.

그렇게 더 이상 한·일전이 목숨 건 건곤일척이 아닌 게 되고 더 이상 올림픽 메달 개수가 우리 유전형질의 우수성 입증지수가 아닌 게 되는 게 내겐, 전 국민 모두 앉혀 놓고 스피박 세미나 백 번 해도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의 탈식민이다.

또한, 최신유행의 수입담론으로 무장한 대학교수들이 아니라 '소네다시'를 정장으로 채택하고 더 이상 각하에게 감사하지 않으며 경기 후엔 나이트 가기를 원하는 김남일을 보며, 더 이상 권선징악도 기승전결도 없이 교훈과 정형을 무시하는 실없는 개그를 보며, 식자들이 몸의 자기결정권을 관념으로 떠들며 안전하게 노닥거릴 때 대마초 처벌에 단신으로 맞부딪히는 김부선을 보며, 이 시대 진보가 누구에게 빚지고 있는 지를 문득문득 깨닫곤 한다.

난 그래서 화가 난다. 충분히 훈련된 이데올로그들이 황우석의 유명세와 박정희의 권력을, 그때 거론되는 국익과 박정희의 성장주의를, 그 지지자들의 오버와 박정희 지지의 파시즘을 그리도 손쉽게 등치시키는 그 나태한 로직의 관습성에 화가 난다. 게으르다. 오만하다. 방송국에서 쓰이는 빨간 마이크 보고 방송국에 침투한 빨갱이들의 적화를 떠올리던 한국논단의 자동연상과 본질적으로 무에 그리 다른가.

절대 소수를 위한 사익임에도 대중 통제를 위해 기만의 국익을 가공해내던 그 시절 캠페인에 진절머리가 나고 그리하여 국익이란 단어만으로도 무조건반사의 냉소부터 흘러나오고 그래봐야 부자들만 치료받을 거란 피해의식부터 스멀거리는 거, 백번 이해간다. 하지만 황우석이 외친 국익이 과거 위정자나 자본가들의 허구와 어찌 그리 손쉽게 등가인가.

자신들의 공부는 사기꾼처럼 생겼다는 인상비평 수준에 머물면서 그의 생래적, 기질적 보수성에 어찌 그리 자신 있게 시대착오적 몰지성이란 딱지 붙이는가. 그 진정성을 왜 인정해줄 수 없는가. 그 진정성을 인정해준다 해서 그 과를 덮자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황우석이 외친 국익이 과거 위정자의 그것과 등가인가?

▲ '황우석 박사 연구재개 지원을 위한 촛불행사'가 지난 4일 저녁 서울 광화문네거리 동화면세점 앞에서 '황우석 연구재개지원 국민연합' 회원 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게다가 사건 이면에 작동하는 기득의 역학은 정말 꼼꼼히 따져보기는 하고 그리 자신 있는가 말이다. 어느새 서울대가 피해자가 되고 미국이 정의가 되고 방송국이 약자가 되는 구도에 진보진영이 절대 기여하는 이 웃지 못 할 아이러니의 자초지종은 정말 제대로 헤아려보기는 했는가 말이다.

정치하지 못한 대중언어와 세련되지 못한 대중액션을 오로지 파쇼의 그것으로 해석하고 말아버리는 나태와 오만은 사태 초기 토해놓은 스스로의 말들 때문인가. 그거야 말로 진보진영이 그리도 학을 떼던 극우 꼴통의 단골 코스 아니던가.

조선일보 절대 강자의 시대는 갔다. 조선일보도 이젠 명퇴한다. 작년 말 두 번째 명퇴 있었다. 짧은 시간에 세상 참 많이 변했다. 하지만 힘의 균형이 기운다 싶은 쪽에 서는 것만으로 선명성을 확보하고, 박정희 시대를 해석하던 단어로 사회 제 현상을 온전하게 담론할 수 있는 시대도 동시에 가고 있다. 그럼에도 과거의 단어에 포박된 채 정체된 해석의 도식에 안주한다면, 내겐 그게 영락없는 보수다.

▲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알리바이부터 대자. 난 황우석 만난 적 없다. 그가 외친 국익도 사실 절대 관심사는 아니다. 하지만 난 황우석 사건이 이 땅의 좌우를 마구 뒤섞어 그 바닥을 여실히 드러내는 일대 사건이라 여긴다. 그래서 욕먹어 가며 쓰고 또 쓴다. 그리고 이 사건이 대한민국 기득 구조 한 편의 앙상하고 추한 몰골을 고스란히 드러낼 절호의 찬스라고 여긴다. 그래서 쓰고 또 쓴다. 내가 범 '우리편'이라 굳건히 믿는 한겨레, 오마이, 프레시안의 늙은 진보가 슬프다. 그래서 쓰고 또 쓴다. 황우석 구실 삼아 쓰고 또 쓴다.

정체된 진보는 보수다. 씨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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