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새로운 비전을 창출하고 있는 영화 <왕의 남자>의 인터넷용 포스터입니다. 조선 연산군시대의 궁궐을 배경으로 펼쳐진 광대들의 푸진 한판 놀음을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멋지게 만든 작품으로 오래도록 영화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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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8주째를 맞은 영화 <왕의 남자>가 드디어 관람객 1000만을 돌파하고 역대 최고의 히트작 <태극기 휘날리며>의 관람객 수를 넘어설 수 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우리나라 영화역사상 전통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로서는 거의 최초로 대박을 터트린 영화여서 더욱 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에는 탄탄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배우들의 혼신의 힘을 다하는 연기력과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이 어우러져 누구나 극찬하는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 매체에서 이 영화와 관련한 역사적 배경은 정말 귀에 못이 박일 정도로 많이 들었기에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간단히 보면, 이 영화는 조선 연산군 시대의 궁궐을 배경으로 펼쳐진 광대들의 푸진 한판 놀음을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멋지게 만든 작품이라고 하면 어울릴 듯합니다.

이처럼 사극영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와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한 영화 <왕의 남자>에서 옥에 티를 찾아 보려 합니다. 물론 지금의 열광적인 분위기에서 역사(무예사) 고증 부분이라고는 하나 1000만이 넘어가는 관람객수와 엇물려 이 글이 영화에 대해 누가 되지 않을까 내심 고심하며 몇 가지를 짚어 봅니다.

활을 등에 메고 다닌다?

 왕이시여, 어찌 활을 등에 메고 다니시옵니까? 이것은 무예사 고증에 맞지 않는 부분입니다. 고구려시대에도 활은 궁대라는 활집에 넣어 허리춤에 묶고 다녔습니다. 그것이 더 휴대와 사용에 효과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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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영총에서 발견된 기마무인도의 모습입니다. 궁대와 시복 즉, 동개 일습을 패용한 당당한 고구려의 기마무인을 그렸습니다. 무예사 고증은 몸의 역사의 연장으로 고증이 잘못되면 몸이 피곤해진답니다. 등에 활을 넣고 다니면 사용에 애로점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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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연산군을 비롯한 신하들이 광대들을 짐승의 모습으로 분장하게 하고 펼치는 일종의 모의 사냥놀이에서의 광경입니다. 이 장면에서 말을 탄 사람들은 전부 활과 화살을 휴대하였는데, 전부 등에 활을 메고 다니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만약에 활을 뽑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활을 어떻게 뽑아야 했을까요? 그리고 활을 모두 사용한 후에는 어떻게 다시 집어넣었을까요? 특히나 우리나라의 전통 활은 각궁으로 그 형태가 'W' 모양이라서 등 뒤로 넣고 빼기에는 상당한 애로점이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로 인해 등이 아닌 허리 옆쪽에 궁대라는 활집을 부착해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심지어 고구려 벽화에서도 이러한 활 패용 방식은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화살의 경우도 그냥 둥근 통을 말 옆구리나 혹은 등에 메고 다니는데, 말이 달리거나 사람이 몸을 앞으로 숙이면 어떻게 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그냥 쏟아져 나옵니다. 그래서 화살은 시복이라고 하여 화살집을 따로 가죽으로 만들어 한 개씩 낱개로 고정하여 사용하는 방식을 채택하였습니다. 요즘의 탄띠의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칼을 손에 들고 다녔을까?

 마상무예 중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사(騎射) 사진입니다. 궁대와 시복은 허리에 있어야 말을 타고 움직이기에 불편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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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거의 모든 사극에서 발생하는 치명적인 오류인데, 무관들이 칼을 손에 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왕의 남자>에서 또한 왕을 지키는 호위무관들이 단체로 칼을 손에 들고 다니는 광경이 곳곳에서 연출되었습니다.

만약 검을 뽑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도대체 그 검집은 어디에 둬야 할까요? 과거 어떤 사극이나 영화에서는 검을 뽑아 한 손으로는 검집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열심히 검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비춰볼 때 이것은 아니올시다! 입니다.

조선의 경우 환도(還刀)라 하여 칼집에 고리가 달려 이것을 허리춤에 묶어 활동성을 높이는 칼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칼을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칼 손잡이를 허리 뒤쪽에 돌려놓았고, 사용 시에는 검 손잡이를 앞으로 오도록 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장생이 줄타기를 하다가 위태롭게 줄에 매달린 장면입니다. 왕의 측근 호위 무관들이 전부 칼을 손에 들고 있습니다. 만약 칼을 뽑으면 칼집은 어디에 둘 것인가요? 더 이상 사극에서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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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야만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도 있었고, 전투가 끝나면 검집을 애써 찾는 것이 아니라 허리춤에 바로 꽂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별운검(別雲劍)이라 하여 국왕의 주요 행사시에 칼을 어깨나 가슴에 들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정2품 이상의 신하로 4명만이 왕의 주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심지어 별운검은 무관이 아닌 문관들도 종종 배치되어 호위무관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의례적인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왕의 남자'에 일본 사무라이가 출현했다?

 연산군과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대면하는 장생을 막는 호위무관들의 칼을 잘 보십시오. 영화 <킬빌>에서 여주인공이 사용하는 일본검이 연상되지 않으신가요. 비록 소품이지만 이러한 부분도 세심하게 살펴야만 우리문화를 더 바르게 알려 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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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은 등에 걸고, 일본식 검을 일본 방식대로 허리춤에 꽂고 왕을 호위하는 무관의 모습입니다. 만약 이렇게 칼을 꽂으면 말이 달려 나가면 칼은 어디론가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문화가 언제 저렇게 왜색으로 변질되었는지 아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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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이 또한 칼과 관련된 것인데, 임금을 호위하는 무관들이 일본식 왜검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장생이 처음으로 광대놀음을 하면서 취발이의 아들을 두 손에 들고 연산군과 가까이 대면하려 하자 호위무관들이 칼을 뽑아 막는 장면입니다.

전형적인 일본식 검으로 손잡이는 마름모 모양의 매듭에 칼날에는 피홈(혈조)이 있어 사진처럼 본다면 장생을 막는 사람은 일본 사무라이로 생각될 정도입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마름모 모양 매듭의 손잡이를 한 환도 또한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우리나라의 전통성이나 역사성을 강조한다면 이 부분 또한 어피(魚皮)로 손잡이를 장식한 전통방식의 조선검 혹은 환도를 사용해야 옳았을 것입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일본검의 전형적인 마름모 방식이나 패용법은 일본의 문화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인터내셔널판으로 새롭게 재편집하여 세계로 이 영화를 소개하겠다고 하는데, 비록 작은 소품이지만 이러한 부분까지도 섬세하게 고증하고 만들어가야 우리 문화를 좀 더 바르게 알려 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시대의 모의 사냥놀이?

 영화에서 모의사냥 놀이 중 공길의 모습입니다. 허리춤에 둥글게 보이는 것이 무촉전(無鏃箭)이라는 화살입니다. 그리고 오른편의 작은 그림은 무예도보통지의 격구 기구를 설명하는 부분에 '면포리말(綿布裏末)'이라 하여 '화살 끝에 무명으로 감싼 것이다'라는 무촉전을 설명하는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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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에 행해졌던 일종의 모의 사냥훈련인 모구(毛毬)를 훈련하는 모습입니다. 저렇게 앞사람이 털공을 끌고 가면 뒷사람이 활을 쏘아 맞추는 마상무예입니다. 시연-무예24기보존회 마상무예단 선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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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영화에서 모의사냥 놀이에서 사용된 화살과 관련한 부분인데, 이 부분은 영화적 상상력과 무예사적 고증이 교묘히 녹아 들어간 부분입니다.

그 장면에서는 살생을 금하기 위하여 화살촉을 무명으로 감싼 일종의 무촉전(無鏃箭)을 사용한 것인데, 사모구(射毛毬)라 하여 모구라는 털공을 말을 타고 가며 끌면 뒷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가 이를 쏘는 마상무예에서 소재를 얻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사모구에서도 앞서 달려가는 사람이나 말에 상해를 입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무촉전을 사용한 것입니다.

아무튼 아무리 광대지만 사람을 대상으로 그러한 사냥놀이를 펼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대로 영화적 상상력의 산물로만 본다면 이해가 가지만 조선시대에는 사모구(射毛毬) 혹은 모구(毛毬) 정도의 모의 사냥훈련이 펼쳐졌을 뿐입니다.

섬세한 역사적 고증이 전통문화의 핵심

역사에 대한 고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왜?' 그리고 '실제로 그 시대에 가능했을까?'라는 부분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한 것을 실제 역사자료에 맞춰서 고증하는 것이지요. 물론 <왕의 남자>의 출발이 단 몇 줄밖에 되지 않는 역사사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미 관객들은 그것이 역사의 진실인양 받아들일 수 있기에 늘 고증이라는 부분은 조심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활을 등에 메고 다닌다면 뽑기도 불편하거니와 사용한 후 다시 집어넣는데도 한참이 걸릴 것입니다. 또한 화살을 그렇게 통에 덩그러니 넣고 다닌다면 허리를 굽히는 순간 화살은 모조리 땅에 쏟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칼을 손에 들고 다닌다면 호위무관들은 전부 한 손만 사용하는 외수검법을 사용하였거나 혹은 싸움이 끝난 후 자기 검집을 찾으려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역사의 고증, 특히 몸의 역사에 해당하는 무예사의 경우는 더욱 치밀한 고증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그 부분을 보다 섬세한 시각으로 고증에 맞게 그려낸다면 세계에 우리문화의 아름다움을 더 멋지게 펼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덧붙이는 글 최형국 기자는 무예24기보존회 마상무예단 '선기대'의 단장이며, 수원 무예24기 조선검 전수관장입니다. 중앙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으로 몸철학과 전쟁사 및 무예사를 공부하며 홈페이지는 http://muye24ki.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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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의 역사와 몸철학을 연구하는 초보 인문학자입니다. 중앙대에서 역사학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경기대 역사학과에서 Post-doctor 연구원 생활을 했습니다. 현재는 한국전통무예연구소(http://muye24ki.com)라는 작은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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