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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서 사치와 허영의 낙인을 지워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살다간, 이른바 신여성(新女性)들이 외친 말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당시 이들의 삶을 디지털로 되살려 그러한 궁금증을 풀어주는 콘텐츠가 있어 흥미를 끈다. 사단법인 한국여성연구소가 1880년대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여학생들의 학교생활과 신여성들의 일상을 디지털로 개발한 '한국근대여성교육과 신여성문화(이하 신여성문화)'가 그것.

이남희 연구책임자는 "신여성문화는 정부 지원 하에 인문학연구자와 디지털작업자가 함께 진행한 독특한 사업"이라고 전제한 뒤 "식민지시대를 조명한 것들은 대부분 독립운동, 위안부문제 등 무거운 주제들이 주를 이루는데, 신여성문화는 조금 색다른 관점에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신여성들을 분석한 것"이라고 콘텐츠 개발의미를 설명했다.

▲ 최승희식 1930년대 원피스(왼쪽), 1910년대 양장(가운데), 숙명 명신여학교 시절 교복 1907년~1910년(오른쪽). 신여성문화콘텐츠는 15개 여학교의 교복과 신여성을 아바타로 개발했다.
ⓒ 한국여성연구소
신여성문화는 근대여성의 교육과 문화에 나타난 역사와 직업, 인물, 연애, 결혼 등을 다룬 '웹강의실', 여학교 풍경에 담긴 수업, 기숙사, 과외활동 등을 담은 '3D 학교생활체험관', <서울여학생만세운동>과 <마리아의 반생> 등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극장', 신문과 잡지 등에 나타난 신여성의 모습을 일기형식으로 담은 '사이버앨범&다이어리' 등 다양한 소재로 구성됐다. 한마디로 '신여성' 관련 자료를 망라한 디지털 도서관인 셈.

"사치와 허영에 물든 존재" vs "인간이고 싶은 여성의 몸부림"

콘텐츠는 크게 '근대여성교육'과 '신여성문화'로 나뉜다. 근대여성교육에서는 전통적인 여성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근대교육의 안팎을 보여준다.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한 당시 여학교 건물과 수업풍경을 그대로 복원한 것이나, 기숙사 생활과 과외활동 등을 2D와 3D로 복원한 것들은 시청각 자료로써 손색이 없다.

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등 15개 여학교의 교복과 체육복을 시대별로 구분해 아바타로 개발, 교복을 통해 여학생들의 교육사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한 점도 특이하다. 여학교 교복 아바타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복인 이화학당의 붉은 목면 치마저고리부터 1930년대 양장 교복 그리고 일제의 강요에 의한 왜바지까지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개발했다.

신여성문화에서는 당시 신문과 잡지에 실린 여성관련 문헌을 입체적으로 재구성, 자료의 신뢰도와 활용가치를 높인 점이 눈에 띈다. 1920~30년대 거리로 나온 여성들을 "사치와 허영에 물든 존재"로 깎아내렸던 남성지식인들의 비판과, "인간이고 싶은 여성의 몸부림"이라는 신여성들의 반격은 이들을 둘러싼 사회의 논란을 보여준다. 게다가 1920년대 대표적인 취미잡지였던 <별건곤>이나 <신여성> <여성> <신가정> 등에 드러난 근대초기 신여성들의 여가 문화도 살필 수 있다.

신여성일기, 100년 전 그들의 꿈을 엿보다

1920~30년대 거리로 나온 여성들은 남성지식인들에게 '위험한 여성'으로 비쳤다. 그녀들은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먼 듯 보이는 여성이었으며, 돈 많은 남성에게 언제든지 유혹당할 수 있는 존재로 보였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이들에 대한 비난이 얼마나 노골적이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조선일보> 1928년 2월 9일자 '꼬리치는 공작!'에 드러난 신여성 모습.
ⓒ 한국여성연구소
"사람의 인격이 그 외화에 있는가? 한 여성의 미가 그 난사 되는 색채로 거죽을 꾸미는 데에 있는가? 길로 지나가는 수레바퀴의 울림에도 쓰러질 듯 한다-허물어진 초가집에서 나오는 양장한 여자! 자기가 살고 있는 그 집값보다도 몇 배나 되는 그 옷을 입고 굶주린 사람들의 누더기 떼가 이 모진 바람에 날리어 찢어져 헤터지는 이 서울의 거기를 거닐 때에 그는 모든 것이 지푸라기같이 보일 것이다. 공작이여! 쇠창살 속에 화려한 저 꼬리를 펴 만족하는 동물원 창살의 공작이여. 달은 창살 속에서 울부짖는 새소리를 듣느냐?"
-'꼬리피는 공작!' <조선일보> 1928. 2. 9.

▲ <조선일보> 1930년 1월 14일자 '여성선전시대가 오면(3)'에서 비난하는 신여성 모습.
ⓒ 한국여성연구소
"육체미를 발휘하자! 이것이 현대인의 부르짖음이라면 만약 '여성 프로퍼갠더 시대'가 오면 모던 걸들의 옷이 몹시 간략해지겠다. 볼썽에는 해괴망측하나 경제상 매우 이로울 것이니, 실 한 꾸러미와 인조견 할 필이면 삼대를 물릴 수도 있겠음으로 이것이 간편한 생활방식의 하나-. 얼마 아니 있으면 모던걸들이 솔선하여 의복긴축 시위운동을 장대히 하게 되지 않을까?"
-'여성선전시대가 오면(3)' <조선일보> 1930년 1월 14일


신여성들은 외양에서도 새로움을 추구하며 문화를 선도해 나갔다. 이들은 '단발'을 유행시켰으며, 짧은 치마 등 개량한복을 입고 활동성을 추구했으며, 양산, 지갑, 구두 등 서양의 문물에 관심을 두고 멋을 부렸다.

하지만 신여성들의 이러한 변화는 남성지식인들에게 몹시 한심한 일로 보였다. 단발은 여성이 남성화되는 징조라고 우려했으며, 짧은 치마 등을 통한 노출은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바라봤다. 1920~30년대 걸친 신여성 비판은 이렇게 '사치와 허영' 문제에 집중되었는데, 이는 신여성들인 '모던걸'을 '못된걸'로 폄하시키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단발, 개량, 서양을 쫓는 모던걸=못된걸?

한편 <서울여학생만세운동> <마리아의반생> <학교를 파하고> 등의 동영상은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의 역사를 플래시 애니메이션으로 전달하고 있어 자료의 활용이 무척 쉽다. <서울여학생만세운동>은 일제의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에, 1930년 1월 15일부터 이틀간 이화 등 서울시내 여학교들이 주도적으로 조직하고 참여한 항일 시위로 여학생 운동의 정점을 이룬 사건이다.

<마리아의반생>은 1920년대 중반, 마리아라는 신여성을 통해 연애와 결혼생활의 우여곡절을 경쾌하게 그린 만화를 원작으로 했는데, 김해송의 <서울>과 김정구의 <세상은 요지경>이 배경음악으로 삽입돼 당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학교를 파하고>를 제작한 '하자비주얼레이브'의 레오(별명)는 "자료수집과 시나리오 작업 등이 매우 힘들긴 했지만, 스태프들이 직접 얼굴을 비추고 목소리로 출연하면서 1920년대를 살았던 신여성들의 삶을 대신 경험했다"며 "젊은 세대가 시공간의 벽을 깨고 사이버공간에서 신여성을 접속할 수 있는 것은 매우 큰 즐거움이다"고 말했다.

▲ 거리로 나온 신여성을 주춤하게 하는 것은 당신들의 희롱이다. 당신들은 청춘이다, 낭만이다 떠들어대며 자연스러운 남자의 본능이라 주장하겠지. 우리도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할 권리가 있다.
ⓒ 한국여성연구소
티켓걸, 카페걸, 개솔린걸, 버스걸, 교환수 등 이색직업에 관한 콘텐츠는 신여성의 사회활동이 매우 힘겨웠음을 보여준다. 그밖에 자유연애를 찾게 한 '노라'가 등장하는 입센의 <인형의집>, 혁명과 사랑을 연결한 투르게네프의 <전날밤(격야隔夜)>, 결혼에서 벗어날 자유를 말한 엘렌케이의 <연애와 결혼> 등에 대한 소개는 당시 신여성들이 가까이했던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주체적인 여성으로 거듭나는데
'새로움-신(新)'의 의미가 있다"


"우리는 신여성이다. 우리는 단지 인간답게 살고 싶을 뿐이다. 우리에게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했던 봉건사회를 거부하며,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거듭나고자 한다. 여기에 우리의 '새로움-신(新)'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콘텐츠를 개발한 한국여성연구소가 신여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이다. 이는 당시 신여성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에 대한 현재 여성들의 입장이기도 하다. 남성의 시선에 비친 신여성의 모습과 사치와 허영의 낙인을 지우라는 신여성들의 외침, 신여성추문록 등의 콘텐츠는 신여성을 재평가하는데 타산지석으로 삼으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 의도는 100년 전뿐만 아니라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신여성문화를 21세기인 오늘 꼼꼼히 들여다 볼 이유는 분명하다.

김활란, 박경원 등 신여성 대표 인물 10명 선정

신여성문화 콘텐츠는 '인물로 본 직업'이라는 항목을 통해 신여성을 대표하는 10명을 선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강경애(1906~1944) 억압받는 하층여성을 대변했던 식민지시기 최고의 소설가
김마리아(1892-1944) "고문으로도 조국사랑을 막을 수 없다" 민족해방운동가
김활란(1899-0970) 모든 여학생이 선망했던 지식인 여성의 새로운 모델
나혜석(1896-1948) 인형이 되기를 거부한 영원한 신여성
박경원(1901 또는 1897-1933) 한 마리 푸른 제비로 비상했던 최초의 여성 비행사

박에스더(1876-1910) 당나귀 타고 전국을 순회한 한국 최초의 여의사
윤심덕(1897-1926) 광막한 광야의 시대를 달린 성악가
최승희(1911-사망연도 미상) 춤으로 세상과 소통한 조선 여자
최은희(1904-1984) 뱃심으로 도전하는 신문계의 패왕이자 최초의 여기자
허정숙(1902-1991) 이론가의 냉철함과 활동가의 열정을 지닌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정미경 연구원은 "신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10명을 선정했는데, 최근 영화 <청연>으로 논란이 된 박경원과 역시 친일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은 김활란이 포함됐다"면서도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신여성에 대한 평가는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논란은 있더라도 조명 작업은 계속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그녀는 굳이 10명을 선정한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콘텐츠 개발기간과 예산의 한계 때문이었다"며 "신여성문화는 완료된 것이 아니라 진행형이므로 앞으로 계속 수정, 보완해 나갈 문제"라고 답하며 여러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덧붙이는 글 | ☞ 한국근대여성교육과 신여성문화 사이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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