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카자흐스탄의 구수도인 알마티
ⓒ 김준희
한우리 민박집 박 사장님은 글자 그대로 호방한 성격이었다. 훤칠한 키에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인상적인 박 사장님은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해서 몇 년 전부터 알마티에서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알마티는 1997년까지 카자흐스탄의 수도였던 곳이다. 카자흐스탄은 1997년 수도를 이전해서 현재의 수도는 알마티에서 한참 북쪽으로 올라간 곳에 있는 '아스타나'이다. 하지만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고 경제의 중심지는 구수도인 알마티라고 한다.

한우리 민박집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 가량이었다. 국경에서 버스를 타고 밤새도록 16시간 가량을 달려 온 것이다. 알마티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우리 민박집은 세 끼를 한식으로 제공하고 하루에 40달러다. 한우리 민박집은 넓은 마당에 2층 양옥집 두 채로 이루어진 곳으로 카자흐스탄으로 출장을 오거나 여행을 오는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다. 손님들은 주로 본채에서 묵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별채에 있는 1인실을 이용하기로 했다.

본채의 1층에는 넓은 거실이 있다. 편안한 소파가 있고 인터넷이 연결된 컴퓨터가 있고 한국방송이 나오는 TV가 있다. TV를 좋아하지 않지만 몇 개월 만에 한국어가 나오는 방송을 접하니까 반가운 마음이 들기는 했다.

아침에 도착해서 오랜만에 한식으로 밥을 먹고 박 사장님과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박 사장님은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었다. 내가 카자흐스탄에서 가보고 싶은 곳은 세 군데다. 천산에 오르고 싶고, 발하쉬 호수에 가보고 싶고 수도인 아스타나에 가보고 싶다. 카스피해에 가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거긴 워낙 멀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스타나와 발하쉬 호수는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다고 한다. 장거리 기차를 이용하면 이동과 숙박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만큼 돈이 절약될 수 있을 것이다.

▲ 메데우의 입구에서 바라본 아래의 모습
ⓒ 김준희
우선은 현지인들이 '메데우'라고 부르는 천산에 가기로 했다. 알마티의 뒤쪽에 위치한 높은 산인 천산에 오르는 방법은 간단하다. 해발 2500m까지는 차로 이동하고, 거기서부터 세 단계 리프트를 이용해서 '침블락'이라고 부르는 정상까지 갈 수 있다. 민박집에서 일을 하는 '아폴론'과 함께 차를 타고 천산으로 향했다.

알마티의 거리는 많은 자동차와 사람들로 붐볐다. 카자흐스탄 제1의 도시답게 활기찬 모습이고 시내의 중심부는 바둑판 모양으로 정리된 구역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티코와 다마스, 넥시아가 많았는데 알마티에서는 다국적의 수입차량들이 많고 한국차는 보이지 않는다.

좁은 차도에는 주차된 차와 거리를 달리는 차들, 그리고 수많은 크락션 소리때문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타슈켄트라는 도시의 느낌은 '거창하다'였는데, 알마티를 바라본 느낌은 많은 차와 사람들로 복잡하다는 것이다.

차로 한 시간 정도 달려가자 천산이 나타났다. 입장료는 700팅게(팅게는 카자흐스탄의 화폐단위. 1달러는 약 130팅게)이고 3단 리프트의 비용은 1200팅게, 거기에다가 두꺼운 옷을 빌려주는 비용이 300팅게. 모두 합쳐서 2200팅게다. 우리 돈으로 따지자면 약 1만8000원 정도.

▲ 1단계 리프트에서 바라본 천산의 아래쪽
ⓒ 김준희
첫번째 리프트의 밑에는 큰 호텔과 작은 민박집 같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정상에 올라가면 추우니까 이곳에서 옷을 빌려야 한단다. 두꺼운 점퍼를 빌려서 입고 리프트를 타고 출발했다.

리프트를 타고 오르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면 날씨가 좋아질 거라고 기대하고 참았지만 빗방울은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첫 번째 리프트에서 내려서 두 번째 리프트로 갈아타고 오르자 비는 어느새 작은 얼음으로 변해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점퍼에 달려있는 모자를 뒤집어쓰고서 몸을 적시는 비를 참아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상체에는 방수 방풍의 두꺼운 점퍼를 입고 있어서 괜찮았지만, 아무래도 다리가 문제였다. 내가 입고 있는 바지는 얇은 여름바지다. 이 바지를 뚫고 들어와서 허벅지를 적시는 것은 빗물이 아니라 얼음물이다. 머리와 얼굴에 떨어지는 얼음과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리프트에 느긋하게 앉아서 오르며 경치를 감상하려고 했는데 그 계획은 보기좋게 무너지고 말았다. 경치 감상은커녕 떨리는 몸을 주체하느라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왜 하필 오늘 그것도 지금 날씨가 이렇게 안좋은지 짜증이 났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뜨거운 태양이 문제였는데 카자흐스탄에 도착하니까 추위와 비바람이 문제가 되고 있다.

비를 맞으며 계속 올라갈 것인가? 두 번째 리프트에서 내려서도 비는 멎지 않고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아폴론과 이야기를 해보고 계속 올라가기로 했다. 비와 추위 때문에 머리는 텅 비고 다리에는 감각도 없어지는 것 같지만, 기왕 온 거 갈 데까지 가보자라고 작심을 했다. 여기서 되돌아가면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른다.

세 번째 리프트를 타고 오르기 시작할 때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카메라는 방수 가방 안에 넣어놓아서 문제가 없지만, 내 몸은 이미 홀딱 젖어 있었다. 물에 빠진 생쥐를 본 적은 없지만, 아마 그놈의 상태가 지금의 나보다는 좋을 것 같다.

결국 끝까지 도착했다. 정상에 도착하자 날씨가 개었다. 사실 여기가 정상은 아니다. 정상이라기 보다는 리프트를 타고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인 것이다. 비가 개이고 해가 보이기 시작하자 나와 아폴론은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서 햇볕으로 나아갔다.

정상의 좌측은 돌산이고 우측은 만년설을 이고 있는 봉우리다. 그리고 이곳에는 사방이 온통 돌투성이다. 주먹만한 작은 돌부터 집채만한 돌까지 다양한 크기의 돌들이 여기저기에 깔려있다.

이곳의 높이가 해발 3163미터라고 한다.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와 보기는 난생 처음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곳은 백두산 꼭대기일텐데 난 그보다도 더 높은 곳에 올라와 있는 것이다. 물론 두 다리로 걸어올라온 것이 아니라 리프트를 타고 올라온 것이지만 그거야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나. 여기에 온 것만으로 천산에 올랐다고 말을 하기는 쑥스럽지만 이곳에서 바라본 경치는 장관이었다. 산아래 저멀리 알마티가 보이고 그 앞쪽으로는 작은 집들이 모여있는 풍경이다.

▲ 3단계 리프트의 정상에서 본 모습. 멀리 구름 아래로 알마티가 보인다.
ⓒ 김준희
여기에서부터 정상까지는 다시 1000미터 가량을 올라가야 한다. 지금의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만년설을 헤치고 그곳까지 가려면 준비된 전문 산악인만이 가능할 것이다. 난 돌무더기를 밟고 돌아다니며 떨리는 몸을 녹였다. 삼각뿔 모양의 여러 봉우리에는 눈이 쌓여있었고 그 정상에는 구름이 끼어있어서 제대로 된 모습을 감상하기가 힘들다.

"한국은 얼마나 여행했어?"

여행 오기 전에 누군가가 나에게 했던 이 질문이 떠올랐다.

"글쎄요. 유명한 곳은 한 번씩 가보았죠."

그 질문을 받고서 난 그냥 이렇게 대답했었다. 웬지 그 질문은 '한국도 제대로 여행안하고 왜 해외로 떠나냐?'라는 투로 들렸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한국은 더 나이먹고도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말도 통하지 않고 정보도 없는 지역을 혼자 여행하려면 보다 젊을 때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천산에 올라서 햇빛 아래에서 만년설을 바라보고 있다. 비 때문에 젖어있던 얇은 바지는 어느새 말라있었다. 이곳에서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만년설을 바라보고 있자니 카자흐스탄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막 투성이인 우즈베키스탄과는 달리 카자흐스탄에는 높은 산과 커다란 호수와 넓은 초원이 있다. 이 넓은 카자흐스탄 땅덩어리를 제대로 여행하자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 구름아래 천산의 봉우리들.
ⓒ 김준희

▲ 만년설이 쌓인 천산의 봉우리
ⓒ 김준희
햇볕 속에서 몸을 말린 우리는 다시 3단 리프트를 타고 내려와서 밥을 먹고 기차역으로 갔다. 며칠 후에 발하쉬 호수로 가는 기차표를 구입하고 민박집으로 돌아오자 저녁이 되어있었다. 기차표의 가격은 1400팅게. 알마티에서 발하쉬까지는 꼬박 하루가 걸린다.

방에 앉아서 구입한 지도를 펼쳐서 보았다. 기차를 타고 발하쉬 호수에 가서 며칠 여행하고 나서 다시 기차를 타고 아스타나로 갈 계획을 세워보았다. 우즈베키스탄과 달리 카자흐스탄은 각 도시로 연결된 기차망이 잘 관리되고 있는 것 같다. 여행자에게 좋은 일이다.

밤에는 자기 전에 박 사장님과 함께 보드카를 한 잔 마셨다. 민박집 근처에는 천둥과 함께 비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역시 천산 밑이라서 그런지 날씨가 변화무쌍한 것 같다. 알마티를 떠나기 전에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2005년 7월부터 10월까지 4개월간 몽골-러시아(바이칼)-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키즈스탄을 배낭여행 했습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