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다룬 영화나 소설을 감명깊게 보고 나면 마치 그것이 실제 역사인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내 경험으로도 서양사 시간에 배운 것보다,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한 열 편 남짓한 영화(이 가운데 기독교 영화가 절반 정도)에서 받은 인상이 더 깊게 남아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나 소설이 고증을 거친 교과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고증 문제에 너무 매달리다 보면 재미를 놓치게 되니까. 제일 안전한 방법은 <벤허>처럼 역사 문제를 벗어나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지만 <벤허>도 따지고 들자면 문제점 투성이다.

한 가지만 예를 들겠다. 로마 전투선에는 노예나 죄수를 노잡이로 부리지 않았고, 따라서 족쇠를 채울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십여 세기 후 서양의 노예상들이 멀쩡한 아프리카인을 노예라고 잡아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실어갈 때의 방식일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들의 치부를 무의식 중에 내뱉은 셈이다.

역사 문제가 끼어들 경우에는 까딱 잘못하면 우스꽝스러운 영화로 전락한다. <쿼바디스>는 네로가 로마를 불질렀다는 '썰'을 채용함으로써, 기독교인에게 '기독교인은 착한 사람, 반대자는 미친 사람'이라는 자위적 사고를 안겨줬을지 모르지만, 역사를 아는 이들로부터는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

'<글래디에이터>는 <벤허> 부류에 넣을 수 있겠다'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이건 이류 첩보 액션물을 로마시대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어느 첩보기관의 1인자가 은퇴할 때 즈음. 2인자는 권력가의 빽줄을 타고 들어온 사람으로서 역시 권력욕으로 가득찬 사람. 1인자는 자식처럼 여기는 주인공(넘버 쓰리)에게 2인자의 문제점과 비리 사실을 알려준다. 이를 눈치챈 2인자는 1인자를 살해한 후 누명을 주인공에게 뒤집어씌운다. 주인공은 도망자가 되고… 결국 주인공의 기지로 음모는 밝혀지고 2인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너무나 뻔한 얘기다. 하지만 로마시대라는 장중한 장치에 의해 관객의 시야는 가려진다.

수년 전 텔레비전에서 방영됐던 < V >라는 SF물을 기억할 것이다. 이것 역시 레지스탕스물을 SF물로 번안한 것이다. 외계인이 인간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서 정권을 손에 넣는 초반부는 혼란기의 독일을 손에 넣는 히틀러의 집권 과정이고, 그 후의 얘기는 레지스탕스 투쟁 일화의 변환일 뿐이다. 이것 역시 우주영화라는 화려한 장치로 눈속임을 하고 있지만, 그 변신이 너무나 감쪽 같아서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뻔한 이야기"라면 식상해햐 할텐데, 관객은 오히려 열광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들의 머리 속에는 이미 그것이 정형화된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은 받아들여지기도 쉽다. 그렇다면 <글래디에이터>는 과연 변신에 성공한 영화일까? 미안하지만 내게는 아니다. 지금까지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사소한 문제점을 드러냈지만 이 정도까지 가지는 않았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나를 웃겼던 장면들을 소개한다.

1.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고 그 자리에서 체포해서 죽여라?

로마시대, 그렇게 명망있는 대장을 죽이려 했다가는 병사들이 그 자리에서 들고 일어났다. 그런데 막시무스 진영에서는 막시무스를 죽인 후 테러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명망있는 장군을 죽이고 황제에 취임하면 그 후의 신임은 어떻고?

아 참, 그 전에 한 가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재판에 의해서만 처벌할 수 있었다(쿠테타 성격을 띠었을 때는 학살이 이뤄진 적도 있었지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고 당장 죽여라? 로마를 중세 영국과 착각하고 있다. 나중에 황제 코모두스의 말에 의하면, 막시무스의 아내를 강간한 후에 죽였단다. 이 장면에서 배꼽 빠지는 줄 알았다.

참고로, 카이사르(시이저) 이후 실제적인 황제정으로 변하는데, 이때부터 원로원의 권한은 축소되지만 권위와 견제 기능은 남아있었다. 따라서 '제1인자(프린캡스)'라는 칭호로 불리운 실제의 황제도 원로원의 인정이 있어야 했다. 황태자로 있다가 아버지를 죽인 그날로 황제가 되는 <글래디에이터>의 설정은 중세 유럽 영화에나 나오는 장면에 불과하다.

 전장의 문제는 장수가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 로마의 방식이었다. 황제가 전장에까지 나와 장수를 독려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로마에서 갈리아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 유니버셜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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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막시무스는 농부 출신?

전장 속에서도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을 설정하려고 별 짓을 다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막시무스의 집은 로마와는 한참 떨어진 어느 농촌이다. 그런데, 특별 차출된 것도 아닌 아랍 상인이 거기까지 와서 쓰러진 막시무스를 발견해서 노예로 잡아간다. 그 상인 누군지 몰라도 간덩이가 한참 부었다. 고대 설화도 이렇게 설정과 비약이 심하지는 않다.

로마시대에는 점령지의 행정을 그 지역의 군사책임자가 담당했다(맥아더와 하지가 일본과 한반도 남쪽의 행정을 맡았던 경우와 유사하다). 따라서 주인공 막시무스 정도의 직위면 군사 뿐 아니라 행정면에서도 상당한 경력을 쌓았을 것이고 이미 원로원을 거친 정도라고 봐야 한다. 일평생을 오직 군인으로 지내는 오늘날의 직업군인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3. 로마의 전술은 다양했다

고대나 중세의 전쟁 장면을 보면 이건 완전히 떼거지 싸움이다. 일렬로 주욱 늘어서서 접근해 가다가, 활로 대충 죽이고 난 다음에는 보병끼리 엉겨붙어서 싸우는 싸움 말이다. 이건 고대의 전쟁을 우습게 보는 시각이다. 로마시대에는 이미 다양한 전술이 개발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술에 따라 움직이는 편제도 확립되어 있었다.

<글래디에이터> 초반에 보이는 전투는 숲과 적군의 복장으로 볼 때 갈리아 지방의 전투를 묘사한 듯하다. 원래 갈리아인들은 숲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런데 보병에서 열세인 갈리아인이 미쳤다고 벌판으로 뛰쳐나가겠나? 그래서 기껏 한다는 것이 기병에 의한 우회전술로 승리한다?

참고로 말하자면, 갈리아는 기병으로 용맹을 떨쳤다. 후에 로마에 편입된 후에는 로마군의 주력 부대로 인정받을 정도였다. 그런 갈리아가 전투 장면에서는 기병도 없는 야만족으로 등장한다. 로마만 잘났다.

4. 황제, 검투사로 변신하다

결국 끝장면은 갈 데까지 간다. 황제가 스스로 검투사가 되어 막시무스와 대결하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황제는 체면도 없는지 막시무스를 미리 칼로 찔러놓고는(물론 질까봐 그렇게 했겠지만), 호랑이도 막시무스에게 불리하게 풀도록 한다. 그런데도 관중들은 야유 한 마디 없고.

간단히 말해서 <글래디에이터>는 뻔한 줄거리에,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계속 갖다붙인 졸작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비판하고픈 생각이 없다. 할리우드가 소재 고갈로 자기 베껴먹기에 들어간 장사꾼이란 것은 이미 아는 바니까. 돈 좀 벌어보려고 온갖 궁리 다 해서 만든 리들리 스콧 감독도 비판할 생각이 없다. 감독도 입이 있고 영화사도 밑지면 안되니까. 다만 한 가지, 이 영화를 2002년 오스카상 12개 부문의 후보작으로 선정하고 작품상까지 안겨준 오스카상 위원회에게는 한 마디 하고 싶다. 정말 대단한 안목이라고.

덧붙이는 글 남들에겐 수작, 나에겐 졸작? 응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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