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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즈베키스탄의 아이들
ⓒ 김준희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로 가는 버스는 저녁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출발했다. 우즈벡과 카자흐스탄의 국경에서 출발하는 이 버스는 카자흐스탄의 도시인 침켄트와 타라즈를 거쳐서 알마티로 가게 된다. 거리는 약 900km.

이 버스는 우즈벡에서 탔던 누쿠스-타슈켄트 행 버스보다는 더 크고 깨끗하다. 하지만 역시 앞뒤 좌석의 간격이 좁아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카자흐스탄은 넓은 나라다. 면적은 세계 9위고 남한의 25배가 넘는 넓이라고 한다. 넓은 땅덩어리에 사는 사람들이 왜 버스의 내부는 이렇게 좁게 만들었을까.

이 버스도 마찬가지로 운전사 2명이 밤을 새우며 교대로 운전한다. 장장 15시간을 달려가야 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버스의 창밖으로는 넓은 카자흐스탄의 초원이 펼쳐지고 있다. 넓고 푸른 초원이 있고 그 위로 듬성듬성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선 모습이다. 그 주변으로는 작은 집들과 낮은 언덕이 보이고 풀을 뜯는 젖소들이 보인다.

흔히 말하는 목가적인 풍경이라는 것이 아마 이런 풍경일 것이다. 점점 날이 어두워지고 있고 달리는 버스 안이라서 사진을 찍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엽서나 달력에서 볼 수있는 초원의 풍경사진이 연상되는 그런 경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난 국경을 넘을 수 있을까 조마조마하며 머릿속으로 온갖 복잡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가롭게 버스에 앉아서 탁 트인 푸른 초원을 보고 있다.

▲ 우즈베키스탄의 여학생들
ⓒ 김준희
이 풍경을 보고 있자니 관현악곡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In the Steppes of Central Asia>가 떠올랐다. 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더 보로딘의 이 곡을 처음 들었던 것은 아마 고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내가 중앙아시아를 생각하고 여행지로 중앙아시아를 꿈꾸기 시작한 것은 이 곡을 처음 들었던 그 시절이었다. 당시에 난 중앙아시아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나중에 여행을 한다면 반드시 중앙아시아에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중앙아시아의 단조로운 모래투성이 초원에서 문득 이국적이고 평화로운 러시아의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멀리서부터 말과 낙타의 말굽소리와 함께 틀림없는 동양의 선율이 들려온다. 그리고 곧 대상(大商)의 행렬이 다가오고 이들은 러시아 군대의 보호아래 끝도 없는 사막을 통과하여 먼 여행을 계속한다.'

중앙아시아라는 곳을 어렴풋이나마 상상했던 것은 그 곡의 내용에 대해서 보로딘이 직접 묘사한 이 글을 읽으면서부터였다. 그 속에서 난 중앙아시아에 가면 넓고 푸른 초원과 모래투성이의 사막과 커다란 호수를 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던 것이다.

당시에 그 곡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 카자흐스탄의 이 초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오래 전부터 상상해왔던 중앙아시아의 초원은 바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런 모습이다. 막막하기 만한 몽골의 평원과는 달리, 카자흐스탄의 초원은 낮은 언덕과 다채로운 색의 집들과 줄지어선 키 큰 나무들이 조화를 이룬 풍경이다.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버스에서 내려서 푸른 초원을 가로질러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든다. 달려가다가 지치면 넓은 초원에 두 팔을 뻗고 누워서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쉬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달려가다 보면 붉고 푸른 지붕이 얹힌 작은 집들이 나오고, 그 뒤로는 낮은 언덕 위로 늘씬한 나무들이 줄지어선 모습이 눈앞에 나타날 것만 같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그 나무에 기대앉아서 작은 집들과 초원을 바라보면서 그저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보로딘이 보았던 초원에는 대상이 다녔을 테지만, 그로부터 100년도 더 지난 지금은 대상 대신에 포장도로 사이로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지금 난 여기에 와있다. 여행을 가는 사람들의 많은 수가 유럽으로, 북미로 동남아로 떠나지만 난 버스에 앉아서 카자흐스탄의 초원을 바라보고 있다. 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은 "왜 하필 중앙아시아냐?"라고 물었다. 그 이유를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다. 난 오래 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하고 공부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그냥 고전음악 한 곡을 들으면서 상상해왔던 것을 보고 싶어서 이곳을 택한 것이다.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그냥 별 생각없이 "거기가 물가가 쌀 거 같아서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이 말은 사실 농담반 진담반이었다. 유럽이든 남미든 동남아든 어딘들 가고 싶지 않을까. 다만 나에게 긴 여행의 일순위는 언제나 중앙아시아였다. 초원과 사막과 커다란 호수를 상상하며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장소, 그곳이 바로 중앙아시아였던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에세이집 <여행의 기술>에서 '가계에 파탄을 일으킬 긴 여행이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여행의 시작이 어찌 사진뿐일까. 그런 긴 여행은 나의 경우처럼 한 장의 음반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우즈베키스탄의 과일가게
ⓒ 김준희
초원에 어둠이 깔리고 있다. 흐린 날이라서 그런지 별도 없고 달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가 초원의 복판에 뚫린 도로라는 것은 알 것 같다. 멀리 낮은 언덕의 윤곽이 보이고 그 너머로는 지평선도 보이는 것 같다.

초원을 달리던 버스는 어느새 도시로 접어들었다. 도로 위의 간판을 보니까 여기가 침켄트인 모양이다. 카자흐스탄에서도 큰 도시로 꼽히는 침켄트의 밤은 우즈벡보다 활기찬 느낌이다. 커다란 레스토랑과 나이트클럽과 카지노장이 보였다. 그리고 무리지어 있는 젊은이들도 보였다. 편한 복장을 하고 한 손에 맥주병을 든 채 모여서 뭔가를 이야기하면서 웃는 젊은 남녀의 모습들. 카자흐스탄이 우즈베키스탄에 비해서 더 자유분방한 분위기다.

12시가 넘어서 휴게소처럼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커다란 휴게소에는 여러 개의 식당과 상점이 있고 크고 미끈한 외모의 대형버스들이 줄지어 서있다. '카자흐스탄은 잘사는 나라에요' 우즈베키스탄을 여행하면서 현지인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여행 가이드 북 <론리 플래닛>에서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곳'이라고 언급한 것도.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화장실도 가고 음료수도 하나 살 겸해서 버스에서 내렸다. 여기도 화장실은 유료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화장실 사용료가 100-200숨(숨은 우즈벡의 공식화폐단위, 1숨은 한화 약 1원)이었는데, 카자흐스탄에 오니까 15팅게(팅게는 카자흐스탄의 공식화폐단위. 팅게 곱하기 8하면 대충 한화를 알 수 있다)를 받는다. 같은 러시아어가 통용되는 곳이지만 화폐의 단위가 달라서인지 순간적으로 혼란스럽다.

국경을 넘은 이후로 내가 카자흐스탄에 왔다는 것이 처음으로 실감나는 순간이다. 화폐의 단위가 바뀌었기 때문에 난 여기서 잠시나마 문화적 충격을 겪고 있는 것이다. 500cc짜리 물 한 병이 우즈벡에서는 400숨이었는데 여기서는 50팅게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100-600에 해당하는 러시아어를 외우고 다녔는데, 여기서는 10-50에 해당하는 러시아어를 외우고 다녀야 할 판이다.

휴게소에서 30분쯤 정차한 후에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어두운 버스 안은 가끔씩 사람들의 말소리만 들릴 뿐 조용하다. 이제 나도 잠을 자기로 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카자흐스탄의 첫날밤을 보낸다.

▲ 중앙아시아의 일상적인 음식. 양고기 볶음밥과 양고기 국.
ⓒ 김준희

덧붙이는 글 | 2005년 7월부터 10월까지 4개월간 몽골-러시아(바이칼)-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키즈스탄을 배낭여행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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