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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말, 영국 공영방송 BBC의 자동차 비평쇼 <톱기어(Top Gear)>가 한국산 차를 세탁기와 냉장고에 비유하며 조롱하듯 비평했던 적이 있다.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내용 때문에 당시 국내에서 파장이 커지기도 했지만 영국 내에서 이런 식의 보도는 흔하다.

사실 이는 영국의 방송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영국 방송사들의 비평에는 성역이 없다. 종교, 미국 정부나 다른 나라의 상품, 영국의 왕실과 정치권도 문제가 된다면 방송 프로그램의 비판 대상에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 시청자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만들어진 영국식 독설쇼나 코미디 프로그램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하다.

영국의 방송사들은 국민들에게 공정하고 타당한 비평, 정보, 지식, 오락을 적절한 수준으로 제공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으며, '공영방송' BBC는 이런 방송문화를 선두에서 끌어가고 있다. 이 것은 BBC가 세계 최고의 공영방송 중 한 곳으로 손꼽히며 영국 사회에서 높은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 런던 BBC 본사의 TV 센터 건물.
ⓒ 오마이뉴스 권우성
BBC 채널엔 상업광고가 없다

영국의 공영방송 'BBC(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의 모체는 1922년에 세워져 첫 라디오 방송을 송출한 'BBC(British Broadcasting Company)'다. 이 회사는 1927년에 왕실칙허장을 받았으며, 이후 공영방송 BBC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BBC1 TV 채널은 1936년 11월 2일에 공식 첫 방송을 내보냈다.

현재 영국 내 일반 공중파 TV 5개 채널 중 BBC는 'BBC1'과 'BBC2' 채널을 갖고 있다. 이밖에도 5개의 디지털 TV채널('BBC3', 'BBC4', 'BBC뉴스24', 아동용채널 2개)을 갖고 있는데, 이 채널들은 '세트톱박스(Set Top Box)'란 장치를 구입해서 TV에 붙이면 추가비용 없이 시청이 가능한 프리뷰(Freeview) 형식으로 제공되고 있다. 그 외에도 BBC는 의회 상황들을 방송하는 'BBC의회' 채널을 운영하며, 10여 개의 라디오 및 디지털 라디오 채널을 보유하고 있다.

BBC의 모든 채널엔 일반 상업광고가 전혀 없다. BBC의 타 프로그램에 대한 광고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BBC의 수익은 영국에 거주하며 TV를 가진 사람들이 내는 수신료와 BBC가 벌이는 다양한 부대사업으로 메워진다. 'TV 라이선스'라는 회사가 수신료 수금을, 그리고 1995년에 만들어진 'BBC 월드와이드'란 자회사가 BBC 프로그램들을 전 세계에 파는 창구 역할을 담당한다.

BBC가 이 자회사를 통해 다른 나라에 판매하는 프로그램은 코미디와 드라마, 아동프로그램, 다큐멘터리가 대부분이며, 일반인들에게는 DVD를 만들어 판매한다. 'BBC 월드와이드'는 '플렉스테크(Flextech)'란 회사와 함께 UKTV란 유료 케이블 상업 방송 채널도 운영하는데, 역사 음식 등 채널이 10개나 된다.

'지식 창고'와 '자선가'로서의 공영방송

▲ BBC가 제작해서 방송한 몇몇 유명 다큐멘터리들의 DVD. 대부분 일반 상점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 김성수
상업광고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BBC의 모든 채널은 공익성을 최우선의 과제로 놓는다. BBC의 공익성은 영국의 다큐멘터리 전통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란 용어도 1930년대 다큐멘터리 운동을 주도한 영국 영화감독 존 그리어슨에 의해 만들어졌다. 영국은 세계에서 다큐멘터리 전통이 가장 깊은 나라로 인정받고 있으며, 영국의 각 방송사들은 지금도 양질의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제작해서 황금시간대에 편성, 방영하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ITV나 채널4, 채널5 등의 상업방송들은 흥미 위주의 다큐멘터리들을 제작하는 반면, BBC는 흥미보다는 자연 역사 과학 철학 종교 시사 등 지식 전반에 걸친 심도 있는 내용들을 많이 다룬다. 전문 기자와 스태프들에 의해 제작되는 고발성 프로그램도 많다. 방송 내용에 책임이 따르는 경우는 해당 분야 교수나 전문가가 직접 진행을 맡기도 한다.

70년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브로노프스키 교수의 <인간등정의 발자취>라는 BBC 다큐멘터리는 국내에서도 번역되어 책으로 출간되었다. 최근에는 런던 임페리얼 칼리지의 교수이자 과학자인 로버트 윈스턴 경이 <인간 육체> <인류의 선조들과 함께 걷다> <신들의 이야기> 등의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진행해서 좋은 반향을 얻고 있다.

BBC는 다큐멘터리 제작 기술 및 형식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왔다는 평으로도 유명한데, 이런 시리즈들을 방송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내용에 따라 일반 공중파 채널인 BBC1과 BBC2로 방송한다. 방송을 통해서만 이런 내용이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BBC는 다큐멘터리와 관련된 정보들을 모두 웹 사이트로 이식해 놓았으며, 그 밖에도 사회의 각종 상식들을 쉽게 정리하거나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또한 서적으로도 만들어 판매한다.

▲ 대중을 위한 클래식 음악회인 BBC 프롬스는 매년 여름 8주에 걸쳐 매일 저녁 개최된다. 사진은 음악회의 개최 장소인 영국판 예술의 전당인 로얄 알버트홀.
ⓒ 김성수
한편, BBC의 공익성은 BBC의 각종 사회활동 참가 및 연례행사 주최에서도 잘 드러난다. 가장 눈여겨 볼만한 두 행사는 매년 봄에 열리는 '빨간 코의 날(Red nose day)'과 가을에 열리는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Children in need)' 행사다. '빨간 코의 날'에 BBC는 코믹릴리프란 자선단체와 함께 아프리카 및 영국 내 빈민 구제를 위해 기금 마련 행사를 연다. 빨간 코를 붙인 피에로들이 전국의 거리를 활보하며 사람들로부터 기부를 받는 이날, BBC는 특별 프로그램을 편성해 이 행사를 고무시킨다.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란 행사는 BBC의 전 직원이 참여해 아동구호기금을 마련하는 자선 행사다.

블레어와 맞설 수 있는 '근거'

공익성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고 있는BBC에 정치적 중립성은 또 다른 생명이다. BBC의 정치적 중립성은 토니 블레어 수상의 이라크 전쟁 파병 당시 보도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특히 BBC는 지난 2003년 7월 영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데이비드 켈리 사건 이후, 블레어의 대외 정책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당시 영국 국방부의 생화학무기 자문위원 켈리 박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영국 정부의 이라크 전쟁 참여에 문제가 많았다"고 밝힌 뒤, 얼마 후 자살했다. BBC와 블레어 측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으며, 자살 여부에 대한 의문까지 제기됐다. 파장이 커지면서 청문회가 열렸고, 청문회가 블레어 수상의 손을 들어줌에 따라 BBC의 사장이었던 그렉 다이크가 사임했지만 둘의 관계는 여전하다.

▲ 2005년 9월, 블레어 수상이 BBC의 일요시사 프로그램 'Sunday AM'에 출연해서 최근 이슈들을 설명하고 있다. 블레어는 이때 자신의 발언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이 가운데 작년 9월에는 블레어가 BBC의 미국 카트리나 허리케인 보도를 문제 삼으면서 또 한번의 해프닝을 빚었다. 당시 BBC는 미국 뉴올리언스를 덮친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를 보도하면서 미국 사회시스템 문제와 미국 정부 및 부시의 대처가 아주 형편없었다는 보도를 연일 방송했다. 이를 두고 블레어가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에게 사석에서 "BBC가 너무 반미적으로 나간다"고 이야기한 게 기사화되면서 구설수에 오른 것. 결국 블레어는 BBC의 일요 아침 시사프로그램인 <일요 AM>에 출연해 "그건 그냥 내 개인적인 의견일 뿐, BBC의 비평에 간섭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다.

영국은 방송 내용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허용하지 않는다. 방송사들은 자신들의 주관과 철학에 따라 자율적으로 프로그램을 편성해서 운영한다. 선거 때에도 신문과 잡지는 자유롭게 특정 정당을 지지할 수 있지만, 방송사들은 엄정하게 중립을 견지해야 한다. 이런 상황이니 공영방송인 BBC의 정치적 중립성은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BBC는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 때는 철저하게 마거릿 대처 영국 수상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이를 두고 BBC가 중립성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영국인들은 많지 않다. 지금도 상당수 영국인들은 포클랜드 전쟁이 최근 이라크 전쟁과는 달리 국가 정체성과 직결되었으므로 공익 차원에서 BBC가 그 당시 전쟁의 당위성을 강조한 것은 옳았다고 호의적으로 평하고 있다.

수신료를 둘러싼 불협화음들

그러나 공영방송으로서의 BBC에 대한 영국인들의 신뢰와 달리, 공영방송을 지탱하는 TV수신료(TV License)에 대해서는 볼멘소리들이 많다. BBC의 방송 내용에 비해 수신료가 비싸다는 비판도 있으며, 수신료 거부 운동도 간헐적으로 벌어진다. BBC 채널을 거의 안 보고 상업방송을 많이 보는데, 왜 수신료를 의무적으로 내야 하느냐는 사람들도 있다.

BBC의 TV수신료는 물가에 비례해 해마다 조금씩 오르는데 2005년 기준 칼라 TV의 경우는 연 126.50파운드(약 23만원, 영국 물가를 고려할 때 한화 약 12만원 수준)이며, 흑백TV는 42파운드(약 8만원)다. 시각장애인은 50% 할인된다.

▲ TV 라이선스 웹사이트. 자기 집과는 별도로 기숙사에 사는 학생도 TV를 가지고 있으면 수신료를 내야 한다는 설명이 있다.
수신료 징수는 철저하다. 납부 기피자를 적발하기 위해 안테나가 있는 자동차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각 가정의 TV 수신 상태를 검색하며, '적발되기 전에 빨리 내라'는 위협적인 TV광고도 나온다. 특히 대학의 새 학기가 시작되는 10월에 수신료 독촉 광고가 많이 나오는데 학생들이 학교 기숙사의 자기 방에서 TV를 볼 때도 수신료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수신료를 내지 않고 TV를 보다가 적발되면 원 수신료의 10배 정도인 1000파운드를 내야 한다. 첫 적발 이후 TV수신료를 내라는 권고를 몇 차례 한 뒤, 그래도 안 내면 벌금이 청구된다.

BBC에 따르면 2005년 한 해 동안 수신료를 내지 않아 적발된 사람은 35만 명이다. 수신료 수금 회사는 "TV는 애완동물이 보라고 있는 것"이란 구차한 변명에서부터 "수신료가 무료인 호주에서 만든 드라마만 본다"는 어설픈 변명까지 있었다고 전했다. 이런 와중에 작년 10월에는 수신료를 연 180파운드로 올리고 BBC를 더 개선하자는 의견도 등장했으나 별다른 지지를 얻지 못했다.

안팎의 위기, 그러나

'세계 최고의 공영방송'이라고 자부하던 BBC도 최근에는 위기를 맞고 있다. 흥미와 재미를 앞세운 상업방송사들의 점유율 상승은 무시할 수 없는 위협요소다. 영국 공중파의 제3채널인 민영방송 ITV는 최근 몇 년간 무서운 속도로 BBC를 추격해 왔으며, 채널 4의 말초적인 리얼리티 쇼나 드라마 등 상업성 높은 프로그램들도 영국인들을 시청자로 끌어들이고 있다. '영국인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BBC를 좋아한다'라는 말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9월에는 '방만한 경영'으로 지탄받던 끝에 예산 절감을 위해 직원 6000여 명(전체의 21%)을 3년간 단계적으로 감원한다고 발표하며 노조와의 갈등을 겪었다. BBC의 1년 예산은 약 37억 파운드(한화 약 7조 4천억 원) 정도. 또한 정부는 왕실 칙허장이 2006년에 만료되고 2007년에 갱신됨에 따라, BBC 운영 제도도 현 집행위원회 체제에서 재원 확보가 더욱 용이한 트러스트 제도로 바꿀 예정이라고 못박아놓은 상태다.

▲ 2005년 11월에 열린 BBC의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 행사 사이트.
이런 상황 속에서도 BBC는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BBC1은 상업방송 ITV와 더불어 영국 내 시청점유율 1위 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BBC1과 BBC2를 합치면 영국 내에서 가장 점유율이 높다(BBC1 24.7%, BBC2 10%, ITV 22.8%, 채널4 9.7%, 채널5 6.6%, 기타 26.2% / 2004년 영국 점유율 조사 회사 BARB 자료).

당면한 여러 문제점들을 BBC가 어떻게 해결할지, 영국인들에게 어떤 면모를 새로 보여주게 될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선 불투명하다. 그러나 안팎의 위협요소에도 불구하고 BBC가 영국 사회에서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이유는 그나마 공공성 높은 프로그램들과 사회활동들이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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