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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청연>의 실제 주인공 박경원을 둘러싸고 '친일'과 '최초' 시비가 계속되고 있다. 그 시비 과정에서 박경원과 대비해 거론되는 인물이 권기옥이다. 박경원과 같은 시대 하늘을 날며 '날개의 꿈'을 꿨지만, 박경원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꿈을 키워갔던 또 한명의 여자 비행사. <권기옥 평전>을 준비하는 정혜주 기자의 원고를 통해 권기옥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조명해본다. <편집자주>
갈례와 스미스의 곡예비행 = 1901년 1월 11일 평안남도 평양의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1남 4녀 중 둘째딸로 태어난 권기옥의 어릴 적 이름은 갈례였다. 두 번째 딸을 낳자 아버지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어서 가라고' 갈례라고 지었다고 한다. 11살에 숭현보통학교에 입학한 권기옥은 1917년 5월 미국인 아트스미스의 평양 곡예비행을 구경한 순간부터 '날개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다.

▲ 숭현보통학교 졸업사진, 위에서 세번째줄 맨 왼쪽 권기옥(1918. 3. 25)
ⓒ 정혜주
송죽결사대와 3ㆍ1만세운동 = 1918년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한 권기옥은 박현숙 선생님의 권유로 비밀 항일조직인 '송죽결사대'에 가입한다. 1919년 3ㆍ1만세운동을 앞두고 권기옥은 친구들과 기숙사에서 몰래 태극기를 만들어서 비밀리에 운반하는 일을 한다.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죄로 권기옥은 체포되어 3주간 구류를 살게 된다.

임정 군자금 모금으로 옥고를 치르다 = 권기옥은 대한애국부인회의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해 머리채를 잘라 파는 등 모금운동을 전개한다. 또한 평양청년회원 김재덕의 권총을 운반하고 숨겨준 일로 잡혀가지만 '증거 없음'으로 풀려난다. 여름 들어서는 임시정부 연락원인 임득삼 선생이 가져온 임정공채를 비밀리에 판매하여 1만원을 상해로 보낸다. 그해 가을 결국 임정공채 판매사건이 발각 나서 체포된 권기옥은 심한 고문과 함께 재판에서 6개월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른다.

브라스밴드단과 평양 도경 폭파사건 = 1920년 봄 감방에서 출소한 권기옥은 브라스밴드단을 만들어서 평안도와 경상도 지방을 순회하며 민중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연락활동을 한다. 여름에는 평남도경 폭파를 위해 잠입한 임정 산하 청년단원 문일민, 장덕진을 숭현보통학교 석탄창고에 숨겨두고, 당일 현장까지 폭탄을 운반하는 일을 돕는다.

▲ 기독여자전도대 활동 기사(1920. 6. 13. 동아일보)
ⓒ 정혜주
날개와 폭탄 = 평남도경 폭파사건과 대한애국부인회의 임정 군자금 모금 사건이 발각나면서 검거선풍이 불자, 권기옥은 체포 직전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와 조만식 선생이 몰래 보내준 여비로 중국 멸치배를 얻어 타고 중국으로 밀항한다. 1920년 11월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인 손정도 목사의 집에 머물면서 권기옥은 비행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3ㆍ1만세운동 이후 권기옥의 낭만적인 날개의 꿈은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날아가서 조선총독부와 천황궁을 폭파하리라는 비장한 각오로 변해 있었다. 권기옥의 뜻을 알고 김규식 선생 부인 김순애 여사가 중국어와 영어를 터득하도록 항주의 홍도여학교를 소개해준다.

멀고먼 운남행, 담판을 벌여 입학을 허락받다 = 비행술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던 권기옥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명근의 도움을 받는다. 중국의 군벌들이 세운 4개의 비행학교 중 보정항공학교와 남원항공학교에서는 권기옥이 여자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했고, 손문이 설립한 광동항공학교에는 비행기가 한 대도 없었다. 남은 것은 중국 서남단의 외진 운남성의 운남항공학교뿐이었다. 서류로는 거절당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권기옥은 임정 이시영 선생의 추천서를 품고 비적들이 들끓는 중국대륙을 가로질러 한 달 만에 운남성 곤명에 도착한다. 1923년 12월 기옥은 추천서를 들고 성장인 당계요와 직접 담판을 짓는다. 조선의 독립운동에 호의적인 군벌인 당계요 성장은 비행사가 되겠다고 이국만리를 찾아온 조선 소녀의 용기에 탄복하여 전격적으로 입학을 허가해준다.

▲ 운남항공학교 전경 사진, 동그라미 안 인물은 유시천 교장(1924년)
ⓒ 정혜주
청부살인업자 처단과 자랑스런 WING 배지 = 1924년 연초 드디어 운남항공학교에 입학한 권기옥은 훈련비행 9시간 만에 단독비행이 허가될 만큼 우수한 학생이었다. 한번은 권기옥이 타려던 비행기가 추락하여 4명이 사망하는 사건을 겪기도 한다. 한편 권기옥을 감시하며 행방을 쫒던 일본영사관은 권기옥이 운남항공학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청부살인업자를 시켜서 권기옥을 사살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를 눈치챈 권기옥은 함께 항공학교에 다니던 조선청년인 이영무, 장지일 등과 밀정을 공동묘지로 유인하여 권총으로 처단한다. 1925년 2월 28일 권기옥은 운남항공학교를 졸업하고 자랑스러운 윙 배지를 단다. 이후 교장의 부탁으로 후배들의 정신교육을 담당하며 원없이 견습비행을 한다.

천황궁을 폭파할 비행기를 찾아서 = 1925년 5월 상해로 돌아온 권기옥은 임정의 어른들에게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겠으니 비행기를 사달라고 호기롭게 말하지만, 임정으로선 비행기를 살 돈은커녕 임대료도 못 낼 지경이었다. 임정에 실망한 권기옥은 1년 가까이 의열단원,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며 비행기 살 돈을 만들기 위한 무장행동을 숙의한다. 1925년 가을 광동의 국민혁명정부가 북벌전쟁을 시작하자 조선 청년들은 국민혁명정부가 만주까지 장악하면 그 여세를 몰아 조선으로 밀고 들어가서 조국을 해방시키리라는 희망을 품고 광동으로 몰려간다.

그 무렵 권기옥도 비행단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광동으로 향한다. 광동항공학교 기숙사에 머물며 국민혁명정부에 비행단이 창설되기를 기다리지만, 당시 국민혁명정부는 항공부대를 만들 여력이 없었다. 1926년 봄 권기옥은 의열단의 배후 실력자인 손두환 선생의 소개로 북경에 있는 개혁성향 군벌 풍옥상군의 항공대에 들어간다. 1926년 4월 권기옥은 동로군 항공대의 부비항원으로 임명된다.

내몽고에 꽃핀 사랑 = 권기옥은 남원항공학교 교장 겸 동로군 항공대 대장인 서왈보의 소개로 독립운동가인 유동렬 장군과 이상정을 만나게 된다. 풍옥상군이 친일군벌 장작림군에게 밀려서 내몽고로 퇴각하게 되자 유동렬 선생과 이상정은 권기옥을 따라서 내몽고로 함께 피난한다. 이 어려운 시기에 권기옥은 이상정과 결혼한다. 결혼식 하객은 함께 피난 온 몇몇 동지들이었고, 유동렬 장군이 주례를 서주고 붉은색 헝겊에 결혼증서를 써주었다.

▲ 1937년 여름 남경을 방문한 시동생 이상화 시인과 남편 이상정(오른쪽)
ⓒ 정혜주
중국 국민혁명군의 공군 비행사가 되다 = 1927년 봄 국민혁명군이 공군을 창설하자 권기옥은 상해로 가서 중국 공군 비항원으로 임명받는다. 이 무렵 권기옥은 서왈보의 도움으로 비행사가 된 최용덕(당시 중국 공군의 비행사, 해방 후 공군참모총장 역임)과 김홍일(당시 중국 육군 대령, 해방 후 육군 참모총장 역임)을 만나게 된다. 이후 이들 세 사람은 해방과 대한민국 건국, 한국전쟁을 함께 겪으며 죽는 날까지 우정을 지속한다.

상해전쟁에서 일본군에게 기총소사를 하다 = 1931년 만주를 기습 점령한 일본이 1932년 상해전쟁을 일으키자, 권기옥은 비행기를 몰고나가 일본군에게 기총소사를 한다. 권기옥은 중국이 승리하면 조선도 해방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지만 장개석 중국 정부가 만주를 일본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정전협정을 맺자 통탄한다. 이 상해전쟁에서 활약한 공로로 권기옥은 무공훈장을 받는다.

▲ 1935년 중국 선전비행을 준비하던 무렵의 권기옥(왼쪽에서 두번째). 가운데 이탈리아인 교관과 중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 이월화와 함께.
ⓒ 정혜주
선전비행과 일본 천황궁 폭격 계획 = 1935년 당시 항공위원회 부위원장이던 송미령 부인이 권기옥에게 선전비행을 제안한다. 비행기가 무서워서 공군에 자원하지 않는 중국 청년들을 독려하기 위해 여류비행사 권기옥의 선전비행을 계획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전비행은 상해에서 북경까지 날아가는 화북선, 화남선, 그리고 동남아시아를 경유하여 일본까지 날아가는 남양선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권기옥은 남양선 비행의 마지막 순간 일본을 폭격하겠는 뜻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선전비행 출발 당일 북경의 대학생 시위로 정국이 불안해지자 선전비행이 무산되고 만다.

▲ 중경에서 재건된 대한애국부인회 동지들과 함께(오른쪽에서 두번째)
ⓒ 정혜주
육군참모학교 교관과 대한 애국부인회 재건 =1937년 여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이 격화되자 권기옥은 육군참모학교의 교수직을 맡아 영어와 일본어, 일본군 식별법과 성격 등을 강의한다. 1939년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와서 정착하자 권기옥은 좌우로 분열되어 있던 부인들을 설득하여 대한애국부인회를 재건하고 선전부장을 맡는다.

조국으로 진격할 꿈에 부풀다 = 1943년 여름 권기옥은 중국공군에서 활동하던 최용덕, 손기종 비행사등과 함께 한국비행대 편성과 작전계획을 구상한다. 1945년 3월에 임정 군무부가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한국 광복군 건군 및 작전 계획> 중 '한국광복군 비행대의 편성과 작전'이 그 결실이었다. 미국과 중국에서 비행기를 지원 받아서 한국인 비행사들이 직접 전투에 참여한다는 것이 주요내용이었다. 권기옥은 이제야말로 비행기를 타고 조선총독부를 폭격하리라던 오랜 꿈이 눈앞에 다가온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해방은 독립운동가들의 꿈을 앞질러서 너무 빨리 와버렸다.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산파역할을 하다 = 해방 후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이 된 권기옥은 '공군의 아주머니'로서 한국 공군창설의 산파역할을 했다. 남편 이상정이 해방 직후 뇌일혈로 갑자기 사망했고, 공군에는 독립운동을 했던 비행사들과 친일파들이 공존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서 권기옥의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 한국전쟁 당시 전방을 시찰하는 권기옥과 지청천 장군
ⓒ 정혜주
<한국연감> 발행과 극일(克日) 장학금 = 올바른 역사기록에 대한 신념으로 권기옥은 1957년부터 1972년까지 <한국연감>을 발행한다. 재정이 어려웠지만 역사의 기록이 중요하다는 신념 하나로 꾸려갔던 것이다. 196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일한 여성 출판인으로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1975년에는 대한민국의 모든 젊은이가 내 자식이고, 극일(克日)을 하는 젊은이들을 키워내고 싶다는 소망으로 전 재산을 장학사업에 기탁했다.

독립유공자로 애국지사묘에 묻히다 = 1966년부터 1975년 한중문화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1968년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88년 4월 19일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에 안장되었다. 2003년 8월 국가보훈처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덧붙이는 글 | 정혜주 기자는 현재 <권기옥 평전>을 집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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