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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살았다는 자취를 남기고 싶을 뿐이다."
- 박경원(1901~1933)


▲ 영국의 여류 비행사 빅터 블루스 환영 행사 사진에서 복원한 박경원
ⓒ 김동연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한 지 18년밖에 안 되었던 시절, 비행기라는 것이 아직 빈약한 철골과 천 조각으로 만들어진 인공의 아기 새, '죽음의 틀'이었을 때 두 사람의 자아 탐구자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박경원과 권기옥(1901~1988)이다.

곡예비행으로 당시 수많은 젊은 영혼들을 설레게 한 미국인 비행사 아트 스미스, 그리고 안창남의 비행을 보고 박경원은 비행사가 되어 여자의 날개로 하늘을 날고 싶다는 꿈을 꾸었고 권기옥은 일본에 폭탄을 안기겠다는 꿈을 꾸었다.

'박경원 평전' 내용이 친일의 근거?

최근 박경원(영화 <청연>의 실제 인물)과 권기옥을 둘러싼 '친일'과 '최초' 논란을 <오마이뉴스> 정혜주 기자가 제기했다. 특히 우리나라와 일본을 막론하고 객관적인 시각에 입각한 유일한 '박경원 평전'인 <건널 수 없었던 해협-여성 비행사 박경원의 생애>에서 몇 가지 내용을 발췌 인용하여 마치 박경원의 친일을 증명하는 근거인양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이 책에 대한 명백한 오독이자 곡해임을 밝히면서 '친일'과 '최초'의 문제로 불거진 박경원에 대한 몰이해를 두 편으로 나눠 쓴 기사로 바로잡고자 한다.

▲ <건널 수 없었던 해협>
ⓒ 時事通信社
언니 '섭섭이'에 이어 다섯째도 딸이라서 원통하다는 뜻으로 어릴 적 이름이 '원통이'였던 박경원은 남자와 일본인에게 결코 지지 않는 비행사가 되겠다는 일념과 '조선'의 여성이라는 당당한 내면의식 속에서 여공 생활과 일본인 동료들의 비행복 빨래를 해주고 품삯을 받는 분투를 감내했다. 그리고 고향 대구와 조국의 하늘을 날겠다는 염원 하나로 '일만 친선 비행'이라는 일제의 간악한 명분을 무릅쓰면서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일장기를 들어야 했다.

이 박경원을 친일파라고 한다면 독립운동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불굴의 투사 권기옥을, 항일 통일전선에서 반공과 친미로 돌아선 펑위샹과 장제스의 국민당 공군에 복무했고 한국전쟁 때는 미군기를 몰기도 했다는 이유로 친국민당파 혹은 친미파라고 해야 하는가?

친일파란 무엇인가? 1946년 3월 1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일본 제국주의에 의식적으로 협력한 자의 총칭"에서 시작하여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의 "일본제국주의의 국권 침탈과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에 의식적으로 협력한 자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발적이든 피동적이든 우리 민족 또는 민족 성원에게 신체적, 물질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인 상당한 피해를 끼친 행위자"이다.

박경원 친일론자들은 오카모도 미노루(박정희)와 가야마 미쓰로(이광수) 등처럼 박경원이 동포에게 어떤 신체적, 물질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인 상당한 피해를 끼쳤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당시 일본 황색 저널리즘 본뜬 '고이즈미 체신장관 염문설'

'박경원 평전' 지은이 카노 미키요

ⓒ카노 미키요
지은이 카노 미키요(加納實紀代)는 일본의 진보적 여성 역사학자로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교토대학 사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케이와학원(敬和学園)대학의 교수로 있다. 1976년부터 지금까지 '여성의 오늘을 묻는 모임'을 이끌며 연구, 저술, 강연, 여성운동, 천황제 반대 운동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여성들의 후방> <자아의 저편-근대를 넘어선 페미니즘> <전후사와 젠더> <여성과 천황제>(공저) <전쟁과 여성>(공저) 등이 있다.

일본의 대륙 침략과 민족 말살 정책이 본격화되던 때, 굶주린 '조센징' 아이들의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육군 관사에서 태어난 포동포동한 아기였다는 지은이는, 이 책을 쓰면서 '내가 무슨 낯짝으로' 하는 자격지심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 동안 일장기와 전범들의 꽃다발 속에 가려져 왔던 박경원의 참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10년에 걸쳐 이 책을 썼다. / 홍대욱
기사 <제국주의 치어걸 누가 미화하는가?>는 박경원 평전에서 200자 원고지 60매 분량에 달하는 고이즈미, 다른 여류 비행사들과 박경원을 둘러싼 당시 정황을 추적한 내용 중 앞뒤 맥락을 거두절미하고 고이즈미가 호색한이었다는 짧은 묘사를 인용하면서 고이즈미와 박경원 두 사람에게 표시를 한 단체 사진을 곁들이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이즈미는 호색한이다, 박경원과 함께 사진도 찍었다, 따라서 염문설은 사실이다'라는 이상한 비약을 유도한다.

그러나 박경원 평전은 여러 자료와 증언을 통해 박경원과 고이즈미의 염문설이 사실 무근이며, 당시 여류 비행사를 사교계의 꽃 정도로 취급한 일본 남성 관료들의 마초 근성과 당시 일본 황색 저널리즘이 합작해서 만들어낸 소산임을 폭로한다.

박경원 평전에 따르면 박경원은 1931년 4월 3일 고이즈미 장관과 처음으로 만난다. 당시 다반사였던 체신장관의 식사 초대에 다른 여류 비행사들 그리고 일본항공수송의 신입 '에어 걸'(여승무원)들과 함께 응한 것이다.

▲ 셋집에서 박경원
ⓒ 時事通信社
박경원은 이 자리에서 신념에 찬 여권신장론자이자 공산주의 사상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던 동료 기타무라 겐코와 함께 일본 사회가 여류 비행사를 '콤팩트 파일럿'('화장하는 비행사'로 여류 비행사를 비하하는 언론의 유행어)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아시아 항공계가 서구에 뒤처지고 있다고 장관을 은근히 통박했다. 그 발언은 미모의 '에어 걸' 모토야마 에이코에게 한눈을 팔던 고이즈미는 물론이고 박경원을 소개한 비행학교장 아이비타 모츠까지 당황하게 했다.

박경원은 그 이후 고이즈미와의 염문설을 유포한 언론에 공식적으로 항의하기까지 했다. <도쿄 니치니치 신문>은 박경원의 고국 방문 계획에 대한 소개 기사에 "고이즈미 체신장관의 후원으로"라는 한 줄을 넣었다가 박경원의 거센 항의를 받고 일주일 뒤에 정정 기사조의 박경원 인터뷰를 내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비행은 고향을 비롯해 다른 후원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 몇 시에 비행해야 한다는 구속이 없습니다. 그래서 매우 마음이 편안합니다. 11월 20일경에는 비행기 정비가 완료되기 때문에 야외 비행 연습을 할 겁니다. 상태가 좋으면 그대로 날아갈지도 모릅니다."
- <도쿄 니치니치 신문> 1931년 10월 29일, <건널 수 없었던 해협>에서 재인용


박경원이 비행기를 불하받은 것은 고이즈미의 '은혜'가 아니라 돈도 없고 끈도 없는 박경원을 도우려는 친구 기타무라 겐코, 그리고 박경원과 같은 실력 있는 비행사를 보유한 비행학교의 이미지 제고를 노렸던 비행학교장 아이비타 모츠를 통한 박경원의 끈질긴 청원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비행할 수도 없는 쓰다만 군용기를 불하받은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수리와 정비 및 비행 경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끈' 역할을 해준 기타무라 겐코는 복막염으로 사망하고 하마구치 내각이 이누카이 내각으로 바뀌면서 고이즈미가 사임해 버림으로써 박경원의 고국 방문 비행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정혜주 기자는 박경원 평전에서 추도록 등을 인용하며 박경원이 일본인들에게 여신으로 추앙받고 있다고 썼다. 그리고 박경원이 일장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은이의 말을 인용하여 마치 그것이 책의 결론인 것처럼 쓰고 있다.

그러나 박경원 평전은 그런 결론을 내리고 있는 책이 아니라, 바로 그런 문제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는 책이다. 일장기와 A급 전범들의 꽃다발에 갇힌 박경원의 인간으로서의 참모습, 조선 여성으로서의 참모습을 복원하고 재평가하는 것이 이 책이다.

정 기자는 책이 자료로 인용한 일본인들의 자의적 논리는 그대로 수용하고, 오히려 일본인으로서 그런 자의적 논리를 논박하고 있는 책을 정반대 논리의 전거로 둔갑시키는 곡필을 저지르고 있다.

우리는 보고 또 보아도 가슴이 미어지는 손기정의 고개 푹 숙인 '항일'과 대비하여 일장기를 들고 웃고 있는 박경원에게 '스마일 친일'이라는 새로운 잣대라도 들이대어야 하는가. 그 사진, 그리고 그 장면을 그대로 살렸다는 <청연>의 장면을 보며, 그리고 영화 <호타루>와 조선인 카미카제 대원들을 오버랩하면서 가슴을 치고 통곡해야 한다.

친일의 멍에를 이 여자에게 들씌우지 말라. 그보다 더 흉측한 수사로 청산해야 할 21세기의 제국주의, 가부장 권력, 국가, 자본의 오크와 우르크하이 떼가 아직 저렇게 들끓고 있다. 박경원 최후의 사진, 그 일장기를 말소하고 싶다.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친일 논란과 관련하여 이 기사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내용과 최초 논란을 다룹니다.)

"박경원 후원자는 의친왕 이강"
[발굴 인터뷰] 고 서웅성 비행사 며느리 이병희씨

▲ 고 서웅성 비행사 며느리 이병희(62)씨와 서웅성 비행사의 사진
ⓒ홍대욱, 이병희

과연 박경원이 1시간 비행 연습에 120원(약 쌀 24가마)이 든다는 비행학교 수업료 등의 비용을 어떻게 조달했는지가 의문이다. 박경원 평전을 비롯한 여러 자료에서 이왕직장관(대한제국 황손의 대외 업무을 담당하는 관직) 그리고 학부장관 이용직을 통한 '존귀하신 어른'의 후원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박경원 평전은 이에 대해 '영친왕 이은'설을 제기한다.

그런데 최근 박경원의 후원자가 의친왕 이강이라는 증언이 나와 주목된다. 의친왕 이강은 고종 황제의 다섯째 아들로 상하이 탈출을 시도한 대동단 사건 등 독립운동에 관여한 황손이다.

다치가와 비행학교를 졸업한 박경원의 후배로 항공협회 회장을 지낸 서웅성(1906~1997) 비행사의 며느리 이병희씨는 만년에 서 비행사가 "박경원의 후원자는 의친왕 이강"이라고 증언했다고 지난 12월 22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미 서웅성 비행사는 <한국일보> 1981년 7월 12일치 '끝내 못 이룬 조국 하늘 비상의 꿈'(최성자 기자)이라는 기사에서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

"학자금에 쪼들리던 박경원이 '어느 존귀하신 어른이 사람을 보내어 학자금을 대주마 했다. 그 어른 이름은 절대 세상에 공표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하며 몹시 기뻐하던 생각이 난다."

이 기사에서 서 비행사는 '존귀하신 어른'이 이용직이라고 증언했지만 실은 의친왕 이강이라고 가족들에게 밝혔다는 것이다.

"하루는 제가 여쭈었습니다. 박경원이 당시 여자 신분으로, 그것도 식민지 치하에서 어떻게 그렇게 돈이 많이 드는 비행사를 할 수 있었느냐고요. 아버님께서는 혹시 거론되는 분들에게 누를 끼칠까봐 밖에서는 일체 말씀을 안 하시고 그 분은 바로 '이강공'이라고 가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병희씨는 1945년생으로 김포시에서 살고 있다. '비행' 집안답게 두 딸이 모두 국내 항공사의 여승무원으로 근무한다. 서웅성 비행사는 다치가와 비행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양정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손기정을 지도하기도 했다(위의 가운데 사진은 양정 육상 선수들이 도쿄-요코하마 역전 경주를 우승한 기념으로 다치가와 비행학교에서 비행기를 태워준 후 찍은 사진으로 맨 오른쪽부터 서웅성, 손기정이다).

서웅성 비행사는 이정희를 후원하기도 했고 박경원의 여의도 비행장 도착을 기다리는 군중에게 마이크로 현장 중계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의 맨 오른쪽 사진은 1955년의 서웅성, 이범석, 조병옥, 신익희(왼쪽부터). / 홍대욱

덧붙이는 글 | 홍대욱 기자는 <박경원 평전> 한글판(출간예정)을 번역했습니다.

한겨레신문의 개인 블로그에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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