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 여류비행사 권기옥
ⓒ 정혜주
영화 <청연>의 개봉을 앞두고 평소에 관심도 두지 않았던 우리나라 여류비행사의 '최초' 문제에 깊은 관심이 일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하면 교과서에 나오는 안창남부터 그 이전에 비행기를 탔던 서왈보에 이르기까지 한 번 쯤은 이름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의 그늘에 가려 있었던 봉건시대, 더구나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의 여성이 하늘을 날았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영화 <청연>은 일제시대 하늘을 날았던 그 한 여성에 주목했을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영화 속의 주인공 박경원의 모습이 실존했던 인물 박경원의 시대적 삶과 너무도 달랐기에 현실에서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됨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도전의 핵심은 '최초'와 '친일' 문제이다. 여기서는 '최초'의 문제를 다루어 본다.

▲ 1926년 비행학교시절 박경원
ⓒ <일본 속의 한국 근대사 현장>
일제시대 하늘을 날았던 우리나라의 여성은 세 명이었다. 식민지시대 암울했던 민중들에게는 영웅과 구경거리가 필요했다. 당시 유행가 중에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자전거"가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고 싶었던 여성들이 있었다. 박경원, 권기옥, 이정희. 그들은 모두 마음속에 날개의 꿈을 품었던 진취적인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들의 미래를 철저하게 갈라놓았다. 나이는 박경원이 제일 많았고 권기옥, 이정희가 뒤를 잇는다.

최초의 공군기 조종사? 최초의 민간인 비행사?

▲ 1925년 2월 28일 운남항공학교 졸업장. 1911년 신해혁명을 원년으로 민국 14년이다.
ⓒ 정혜주
권기옥은 3ㆍ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중국으로 망명, 상해 임시정부의 추천으로 1924년 초 중국 운남항공학교 1기생으로 들어간다. 1925년 2월 28일 항공학교를 졸업하자,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쏟아붓겠다는 일념으로 상해로 돌아온다. 그러나 임시정부에는 비행기를 살 돈이 없었다. 고민 끝에 원로 독립운동가의 추천으로 중국 군대의 항공대에 들어가서 비행기 조종사로 10년 넘게 활동한다.

한편 박경원이 일본비행학교를 졸업하고 3등 비행사 자격증을 딴 것은 1927년 1월 28일이었다. 따라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난 것으로 치면 권기옥이 박경원보다 2년 정도 앞선 것이 된다.

▲ 1926년 4월 20일 항공처 부비행사 임명장
ⓒ 정혜주
이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박경원 측에 '최초'의 리본을 달아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펴고 있다.

"권기옥씨의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권씨는 군인의 신분으로 비행사가 된 것이며, 영화에서 조명한 것은 민간인 신분으로 비행사 자격증을 딴 박경원의 입지전적 스토리… 엄밀히 말하면 민간인 최초의 여류비행사가 맞겠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비행사'라고 표현한 것은 불필요한 혼동을 막기 위해서이다."(스포츠조선 기사 중 영화 <청연> 마케팅팀장의 말).

즉 민간인과 군인 신분을 나누고, '비행사'라는 자격증에 큰 의미를 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비행사 자격증이란 무엇인가? 일본 제국비행협회가 1921년부터 시행한 민간인 비행사 자격시험에서 주는 자격증을 말한다. 즉 '비행사'라는 명칭은 일본으로 유학 가서 일본 제국비행협회가 시행하는 시험제도를 통과한 사람만이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2년이나 먼저 날았지만 일본 제국비행협회가 인정하는 자격증이 없는 권기옥은 비행사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 '중국창공에 조선의 붕익, 중에도 여류비행가'(1926.5.21,동아일보)
ⓒ 정혜주
당시의 신문자료를 살펴보면 그 시절 사람들은 권기옥과 박경원을 똑같이 '여류비행사'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1926년 5월 21일자 <동아일보>는 '中國 蒼空에 朝鮮의 鵬翼- 中에도 女流飛行家'라는 제목으로 권기옥을 소개하고 있다. 1928년 5월 25일자 <중외일보도> 권기옥을 '女飛行士'로 호칭하고 있다. 박경원을 소개한 <동아일보> 1926년 9월 4일자 기사 역시 '朝鮮의 女流飛行士 박경원 양'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민간인 비행사와 전투기 조종사를 구분하는 것은 비행기가 무기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 훨씬 후대에 와서이다.

▲ '풍군진중에서 활동하는 여비행사 권기옥'(1928.5.25, 중외일보).
ⓒ 정혜주
권기옥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많은 자료가 있다. 대한민국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충북 청원 소재)의 자료실에는 "권기옥은 중국 운남항공학교 1기 졸업(1925년)으로 한국인 최초의 여류 비행사이며 중일 전쟁 참가, 총 7000시간을 비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초창기 여자 비행사로 권기옥-이정희-김경오를 기록하고 있고, 박경원은 아예 기록에도 없다. 국가보훈처 자료집에서도 권기옥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서술하고 있다.

▲ '중국하늘을 날은 애국소녀의 얼'(1970년, 여성지)
ⓒ 정혜주
정부 관련 자료만이 아니다. 권기옥을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로 소개하고 조명하고 있는 수많은 언론 보도들이 있었다. '중국 하늘을 날은 애국소녀의 얼- 최초의 우리 여류비행사 권기옥 여사와의 인터뷰' '한국 최초의 여자파일럿 권기옥씨의 슬픈 8ㆍ15 (<주간여성> 1969년 8월 27일자)' 등….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78년 2월부터 24회에 걸쳐 <한국일보>에 연재된 회고록 '나의 이력서'이다. 여기에서는 권기옥을 우리나라 최초일 뿐만이 아니라 '동양 최초의 여류 비행사'로 표현하고 있다. 1981년에는 KBS 라디오 방송국에서 권기옥의 일대기를 '인물 춘추 -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이라는 제목으로 46회에 걸쳐서 방송했다.

▲ '동양 첫 여류 비행사 권기옥 여사'(1978.2 한국일보 연재기사)
ⓒ 정혜주
권기옥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라는 것은 해방 이후 현재까지 대한민국이 공인하고 대중적으로 인정되어온 사실이다. 최근 영화 <청연> 제작사 측은 박경원과 관련 '최초' 시비가 일자 '최초의 민간인 여류 비행사'라고 홍보 문구를 바꾸었다.

'최초'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내용이다

누가 '최초'인가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최초' '최고'를 중시하는 것은 물질만능 시대의 속도주의, 성과주의의 산물일 수 있다. '최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삶의 내용이다.

사실 '누가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흔히 안창남이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라고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1919년 가을 중국 남원항공학교를 졸업하고 풍옥상군의 항공대 대장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서왈보를 최초의 비행사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대한민국 공군박물관은 1920년 임시정부의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이 미주교포들의 후원을 받아 캘리포니아에 세운 윌로스비행학교의 졸업생 6명이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라는 자료를 기록 전시하고 있다.

안창남과 서왈보, 윌로스비행학교의 졸업생들 중 과연 누가 우리 민족 최초의 비행사인가? 이견은 있겠지만 이 문제는 그리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다. 그들은 모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늘을 날았던 비행사들이었기 때문이다. '한민족 최초의 비행사 서왈보', '우리의 하늘을 최초로 날았던 비행사 안창남'… 윌로스비행학교를 졸업한 6명의 1기 졸업생들도 모두 우리 민족에게는 자랑스런 하늘의 용사들이다.

그러나 박경원과 권기옥은 다르다. 박경원은 일본이 인정한 최초의 조선인 여자 비행사일 뿐이다. 일장기를 흔들며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을 위해 날아오른 박경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늘을 날았던 권기옥, 둘 중 누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인가?

덧붙이는 글 | 정혜주 기자는 현재 '권기옥 평전'을 집필하고 있습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