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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지팥죽 먹고 잡귀 액운 몽땅 쫓아내세요
ⓒ 이종찬

동지 섣달 기나긴 밤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널었다가
어른 님 오신 밤 구뷔구뷔 펴리라

- 황진이, '동지섣달 기나긴 밤' 모두


▲ 팥죽의 붉은 빛은 해를 상징한다
ⓒ 이종찬

죽은 태양이 다시 태어나는 동지

"옴마! 애터지게 끓인 그 동지팥죽을 만다꼬(뭐한다고) 솔잎으로 잡안 구석구석에 뿌리노?"
"지난 일 년 동안 알게 모르게 우리 집에 깃든 귀신을 몽땅 다 쫓아내야 내년에 우리 가족들한테 액운이 안 생길 거 아이가."

"옴마! 그나저나 내는 인자 큰일 나뿟다."
"와?"
"아까 새알로 아부지 나이보다 더 많이 묵어뿟다 아이가. 인자 아부지보다 나이로 더 많이 묵어뿟은께 이 일로 우짜것노?"

일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이 날을 중심으로 음(陰)의 기운이 시들기 시작하면서 양(陽)의 기운이 싹트는 때라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지는 음의 기운이 가장 센 때이긴 하지만 이 날을 기점으로 음의 기운이 점점 기울고, 그 기울어지는 것만큼 양의 기운이 들어차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 우리 마을 사람들은 동지를 '작은 설날'이라 불렀다. 그리고 동지팥죽을 먹어야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것으로 여겼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동지팥죽에 든 새알심을 지금의 나이에 한 살을 더한 만큼만 먹게 했다. 새알심을 나이보다 더 많이 먹으면 나이가 빨리 들어 일찍 흰 머리가 나고 주름살이 생긴다는 거였다.

하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머니의 그 말씀은 양식을 조금이라도 더 아끼려는 뜻이 숨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마을 사람들은 하루 두 끼로 때워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가을 추수가 끝나도 쌀과 보리가 반반씩 섞인 보리쌀밥에 무나 고구마가 섞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확한 대부분의 벼는 추곡수매 때 거의 다 팔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마다 동짓날이 되면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귀신을 쫓고 액운을 막는다며 집집마다 큰 가마솥에 동지팥죽을 끓였다. 그리고 집 안팎에 팥죽을 뿌린 뒤 온 가족들이 둘러앉아 맛나게 나눠 먹었다. 그 당시 우리 마을 사람들은 동지팥죽의 붉은 색이 양(陽)을 뜻하므로 음의 기운이 가장 강한 동짓날, 동지팥죽을 집 안팎에 뿌려 음의 기운을 가진 잡귀를 쫓아내야 여러 가지 액운이 찾아들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다.

▲ 동지팥죽에 든 새알심은 나이를 상징한다
ⓒ 이종찬

▲ 동지는 음이 가장 활기찬 때이지만 기우는 때이기도 하다
ⓒ 이종찬

신비의 영약처럼 사람 몸에 좋은 팥

허준의 <동의보감>이나 명나라 본초학자(本草學子)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적두'(赤豆, 붉은 콩)라 적혀있는 영양 만점의 팥. 팥은 팥밥, 팥죽, 팥칼국수, 팥빵 등 여러 가지 먹거리로도 많이 쓰이지만 사람 몸에도 아주 좋아 예로부터 만병통치약이라 불릴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동의보감>과 <본초강목> 등 여러 약학서에 따르면 "팥은 난산을 다스리고 잉어, 붕어, 닭고기를 넣고 삶아 먹으면 젖이 잘 나온다", "각기병을 앓는 사람은 팥을 포대에 채워 넣고 이 팥포대를 아침저녁으로 오래 밟아대면 낫는다", "팥은 열독을 다스리고 나쁜 피를 맑게 한다", "팥은 한열과 속이 열한 것을 다스리며 소변을 이롭게 한다"라고 적혀 있다.

어디 그뿐이랴. "팥을 푹 고아서 먹으면 신장염을 낫게 한다", "당뇨병에는 팥, 다시마, 호박을 포옥 삶아 약간 매운 듯하게 먹으면 좋다", "얼굴에 주근깨가 있는 사람은 팥꽃의 즙을 내어 바르면 깨끗하게 사라진다", "팥은 설사를 멈추게도 하고 비만증과 고혈압의 예방치료제이기도 하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그만큼 팥이 사람에게 신비의 영약처럼 좋다는 그런 뜻이 아니겠는가. 또한 그래서 예로부터 팥을 이용한 갖가지 음식이 만들어졌고, 약재를 구하기 어려운 민간에서는 팥을 이용한 여러 가지 약용음식을 만들어 먹었지 않았겠는가. 동지팥죽이 귀신을 쫓고 액운을 막아준다는 것 또한 바로 이러한 팥의 탁월한 약효 때문이 아니겠는가.

▲ 잘 끓여낸 동지팥죽
ⓒ 이종찬

▲ 동지팥죽은 얼음 동동 뜨는 동치미와 함께 먹어야 제맛이 난다
ⓒ 이종찬

동지팥죽은 처음도 정성, 끝도 정성이 깃들어야

동지팥죽은 다른 음식을 조리하는 것보다 손이 제법 가야 한다. 팥도 물에 오랫동안 불려 삶아야 하고, 방앗간에 가서 찹쌀과 멥쌀도 빻아야 한다. 그리고 빻은 찹쌀가루와 멥쌀가루를 1:2의 비율로 섞어 뜨거운 물과 소금물을 붓고 오래 반죽을 한 뒤 손으로 비벼 종달새 알만한 새알심도 미리 만들어 두어야 한다.

게다가 팥죽에 넣을 멥쌀도 깨끗이 씻어 1시간쯤 불려두어야 한다. 이어 포옥 삶은 팥에 깨끗한 물을 넉넉하게 붓고 약한 불로 끓이면서 주걱으로 팥알을 천천히 으깨야 한다. 그리고 팥알을 으깬 팥국물에 미리 물에 불려놓은 멥쌀을 넣고 주걱으로 천천히 휘젓다가 팥죽이 걸쭉해진다 싶으면 미리 빚어놓은 새알심도 넣어야 한다.

언뜻 보면 동지팥죽을 끓이는 방법은 몹시 복잡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막상 동지팥죽을 끓이기 위해 조리를 시작하면 그리 어렵지는 않다. 다만, 팥죽은 다른 음식을 만드는 것처럼 그저 불에 올려놓고 김이 폴폴 피어오를 때까지 지켜보다가 간만 맞추면 되는 것이 아니라 늘 곁에 지켜 서서 팥죽이 냄비에 눌어붙지 않도록 주걱으로 천천히 저어주어야 한다.

새알심을 만드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새알심을 만들기 위해 뜨거운 물과 소금물을 붓고 반죽을 할 때에도 너무 걸쭉해서도 안 되고, 너무 질퍽해서도 안 된다. 반죽에 적당한 찰기가 있어야 손으로 비빌 때 새알심이 보기 좋게 잘 만들어진다. 새알심 또한 너무 크면 팥죽을 끓일 때 잘 익지 않아 멥쌀이 물러터질 수 있고, 너무 작으면 쫄깃쫄깃 씹히는 맛을 느낄 수 없다.

팥죽은 그만큼 정성이 많이 들어가야 한다는 그 말이다. 특히 동지팥죽은 예로부터 악귀를 쫓아내고 액운을 막기 위해 만들어 먹는 것이니만큼 더욱 많은 정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팥죽을 끓이기가 조금 힘들다고 해서 일 년에 꼭 한 번 있는 동짓날, 우리의 오랜 전통 음식인 동지팥죽을 버려두고 그저 매일 먹는 그 밥상을 차려서야 되겠는가.

2005년 마지막 절기인 동지다. 아무쪼록 올해 동짓날에는 가족들과 식탁에 오순도순 모여앉아 종달새 알만한 새알심을 동글동글 빚어보자. 그리고 내 나이처럼 새알심 동동 뜨는 붉은 동지팥죽을 먹으며, 그동안 우리 가족에게 해코지를 하고 있었던 잡귀와 액운 모두 몰아내고 새롭고 희망 찬 새날을 맞이하자.

[조리법] 팥알 터지지 않도록 삶아야

▲ 동지팥죽
ⓒ이종찬

재료/ 팥, 설탕, 찹쌀가루, 멥쌀가루, 불린 멥쌀, 뜨거운 물, 소금, 잣, 호두, 땅콩.

1. 팥은 깨끗한 물에 담가 4시간 이상 불리고, 멥쌀은 1시간 정도 불린다.

2. 멥쌀가루와 찹쌀가루를 2:1로 섞은 뒤 뜨거운 물과 소금물을 붓고 반죽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손으로 주무른다.

3. 물에 충분히 불린 팥을 냄비에 담고, 팥이 잠길 정도로 물을 부은 뒤 팥알이 터지지 않을 정도로 센불에서 삶는다.

4. 냄비에서 김이 폴폴 피어오르면 우러난 팥물을 따라낸 뒤 다시 깨끗한 물을 붓고, 중간불에서 푹 삶는다.

5. 팥이 푹 삶기면 약한불로 맞춘 뒤 주걱으로 천천히 저으면서 팥알을 으깬다. 이때 팥껍질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체에 걸러내면 된다.

6. 팥국물이 걸쭉해지면 물에 불린 멥쌀을 넣고 설탕을 뿌린 뒤 주걱으로 저어가며 10분 정도 더 끓이다가 새알심을 넣는다.

7. 새알심이 동동 떠오르면 소금을 뿌려 간을 맞춘 뒤 그릇에 담아 미리 굵게 다져놓은 잣과 호두, 땅콩을 얹어 동치미와 함께 상 위에 차려낸다.

※맛 더하기/ 새알심을 만들 반죽에 잣과 호두 땅콩가루를 넣으면 새알심을 씹는 맛이 고소하며, 입맛에 따라 팥죽 위에 갓김치를 올려먹어도 상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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