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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묘 입구
ⓒ 한성희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의 광해군묘로 가는 길은 찾기 어렵다. 사릉관리소의 안내를 받아 영락교회묘지 길로 올라가면 오른쪽에 '광해군묘'라고 붙은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1만7천여 평의 광해군묘는 길가 숲 속에 숨어있어 찾는 발길을 어렵게 하며 수백 년 지난 지금도 쓸쓸히 감춰져 있다. 비공개 사적지라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하며 안내를 받지 않으면 처음 이곳을 오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초라한 묘소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선조의 둘째 아들로 공빈 김씨 사이에 태어난 광해군(1572~1641)은 1608년 왕위에 오른다. 광해군은 뛰어난 외교로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며 국력을 키웠다. 재위 15년만인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류, 김자점 등 능양군이 이끄는 군사 1천여 명이 창덕궁으로 진입해 반정에 성공하자 14일 폐위된다.

▲ 광해군(오른편)과 부인 유씨(왼편)가 잠든 쌍묘.
ⓒ 한성희
인조는 광해군과 폐비 유씨는 강화부의 동문 쪽에, 폐세자 질과 폐세자빈 박씨는 서문 쪽에 위리안치 시킨다. 유배당한 지 두 달 후 폐세자와 폐세자빈 박씨는 담밑에 구멍을 뚫어 밖으로 탈출을 시도하려다가 잡히자 자살을 하고 그 화병으로 1623년 10월 8일 폐비 유씨가 죽는다.

부인과 아들 며느리를 잃고 홀로 유배생활을 하던 광해군은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태안으로 이배되었다가 다시 강화로 돌아온다. 청이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쳐들어오자 교동으로, 전쟁이 끝나자 이번에는 제주로 이송되어 유배 19년만인 인조19년 7월 1일 67세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시중드는 시종이 '영감'이라고 부르며 모욕을 줘도 묵묵히 초연하게 세월을 보낸 광해군의 심장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을 것이다.

승정원일기에 드러난 광해군 장례 과정

▲ 유독 시커멓게 변한 '광해군지묘(光海君之墓)'라 쓰인 초라한 비석.
ⓒ 한성희
광해군이 졸(卒·왕이 승하하면 훙거(薨去)라 하고 정4품 이상은 졸이라 한다)하자 조정에서는 연산군의 예에 준하는 왕자의 예식으로 장사를 치르게 하고 제사는 외손이 주관하라 명한다.

광해군묘에 관한 죽은 기록을 찾느라고 거의 모든 자료를 뒤졌으나 광해군묘 기록이 없다는 것과 인조21년 제주에서 천묘했다는 문화재청 자료밖에 없었다.

광해군의 죽은 날짜를 기준으로 인조실록을 뒤졌지만 장례나 천묘한 기록은 볼 수 없어 폐위된 왕은 이렇게 천대받는 것인가 혼자 한탄했다.

단념하려다가 마지막으로 <승정원일기>를 뒤지자 인조19년 7월 10일 광해군 염습의 예를 묻는 제주목사의 장계부터 장례과정까지 일목요연하게 나타났다.

인조19년 7월 21일 이경운(李敬運)이 양주로 영장처(永葬處)를 정하러 나갔다가 22일 정하고 돌아왔다. 9월 2일 이필영(李必榮)이 광해군 운구를 맞이하러 나갔다.

9월 3일(병자)광해군 상구(喪柩)가 18일 제주에서 발선(發船)하여 22일 영암에 도착한다는 예조참의 서목이 있고, 9월 8일 경상(境上)에 도착하여 배행하였다는 충청감사의 서목이 잇따른다.

예우를 어느 정도 후하게 할 것인가, 언제 개관을 할 것인가 여부가 조신 간에 시끄럽게 오가고, 광해군의 영장일(永葬日)을 앞당길 날자가 없느냐고 인조가 물었다는 전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광해군의 장례를 얼른 치르고 싶었던 모양이다.

▲ 15년간 국왕의 자리에 있던 광해군묘는 작고 초라했고 무덤 바로 앞은 낭떠러지로 비탈이 가파르다.
ⓒ 한성희
민심이 두려웠던지 인조는 광해군의 딸에게 곡식을 내리고 멀리서 올라온 광해군의 관을 새로 만들게 하며 외손에게 전택과 하인을 내려 제사를 돌보게 했고 '광해는 폐방(廢放)된 지 19년 만에 마침내 천수를 마쳤고, 상장(喪葬)에 이르러서도 은례(恩禮)를 다 갖추어 주었으므로 나라에서 모두 상의 성덕에 감복하였다'고 기록된다. 광해군이 과연 감읍했을지는 의문이지만.

9월 10일 광해군 상구가 양주에 도착하여 산소에 올라갔고 원래대로 29일 개관(改棺)하기로 결정한다. 10월 2일 인조는 도승지 한형길(韓亨吉)을 보내 제사지내게 했고 10월 4일 광해군의 장례를 치른다.

이 <승정원일기>로 광해군 장례과정이 드러나 제주에서 묻혔다가 인조 21년 양주로 천장했다는 문화재청의 잘못된 자료는 수정돼야 할 것이다.

왕위를 빼앗긴 광해군의 슬픈 시는 남아있고

어머니 공빈 김씨의 발치에 묻어달라 했던 광해군의 마지막 소원대로 부인 유씨와 나란히 잠든 조선 15대 왕 광해군 묘는 곡장 밖 작은 망주석, 정자각을 대신하는 상석과 향로석 그리고 비석만이 쓸쓸하게 서 있는 작고 초라한 무덤이다.

비운의 왕 광해군 묘소의 비석을 착잡한 심정으로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광해군의 비통한 피눈물이 이렇게 비석을 시커멓게 변하게 한 것일까? 광해군과 부인 유씨의 비석만 유달리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 지난 11월 초에 찾은 광해군묘 앞의 숲은 폐왕의 그림자인 듯 생명을 잃은 갈색 낙엽에 덮여 침묵했다.
ⓒ 한성희
광해군이 죽자 사관은 이렇게 글을 남긴다.

광해군이 죽자 제주목사 이시방(李時昉)이 조정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위리안치된 문을 부수고 들어가 예로 염빈했다고 하자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그르다고 했으나 식자는 옳게 여겼다.

그리고 사관은 광해군이 교동에서 제주로 가면서 남긴 칠언율시를 적어놓는다.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 지나는 길(風吹飛雨過城頭)
후덥지근한 장독(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기운 백 척으로 솟은 누각(瘴氣薰陰百尺樓)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滄海怒濤來薄暮)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碧山愁色帶淸秋)

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歸心厭見王孫草)
나그네 꿈 자주도 제자주에 깨이네(客夢頻驚帝子洲)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故國存亡消息斷)
연기 깔린 강 물결 외딴 배에 누웠구나(烟波江上臥孤舟)


광해군이 죽었다는 소식이 제주에서 10일 만에 한양에 날아온 날, 실록은 '이 시를 듣는 자마다 비감에 젖었다'고 적었다. 350년이 지난 지금 이 시를 읽는 나 또한 비감에 젖어들 수밖에.

▲ 작지만 능의 석물을 완벽하게 갖춘 성묘는 외로이 숲에 숨어있다.
ⓒ 한성희
잊혀진 왕비묘, 성릉의 공성왕후

광해군이 어머니 발치에 묻어달라 했던 공빈(恭嬪) 김씨(1553~1577) 묘는 아들의 묘에서 그리 멀지 않다. 광해군 어머니 공빈 김씨의 성묘(成墓)는 한때 능으로 추존돼 난간석과 무인석 문인석을 갖추고 있어 능과 다를 바가 없다.

문화재로 지정된 공빈 김씨의 성묘를 찾아가려면 농촌 마을 송능리의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꺾어 돌아가야 하기에 광해군 묘를 찾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사릉 관리인의 안내가 아니었다면 거의 찾기 불가능했을 것이다.

성묘가 있는 진건읍 송능리라는 지명은, 소나무가 많고 성릉이 있는 마을이라는 송능(松陵)에서 유래된 것이다. 성릉은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으나 성릉의 흔적이 묻은 지명은 남아있다.

송릉리 마을 끝에 닿아 가파른 계단을 밟고 산 위로 올라가자 갑자기 성묘가 나타났다. 잊힌 과거의 왕비릉이 이렇게 산 속에 숨어있었다. 찾아오는 사람 없이 홀로 쓸쓸하게 숨어있는 성묘는 광해군묘와 마찬가지로 무상한 세월의 비탄을 느끼게 했다.

공빈 김씨는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고 25살의 나이로 죽어 양주에 묻힌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광해군은 즉위하자 어머니를 왕후로 추존한다. 광해군 2년(1610년) 3월 29일 생모 공빈 김씨는 공성왕후(恭聖王后)라 하고 석물을 왕비릉에 준하게 하며 능호를 성릉(成陵)이라 한다.

▲ 비감한 표정으로 왕비의 명령을 기다리는 무인석은 수백년 동안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왔다.
ⓒ 한성희
이전에 연산군이 폐비 윤씨를 회릉으로 추존한 예가 있는데다 전쟁을 겪은 후라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대신도 없었다. 또 숙종이 장희빈 사건 이후 후궁을 왕비로 올리지 못하게 국법을 정하기 이전이라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성릉에 관한 기록은 빈약할 정도로 몇 줄 없지만 추존 절차는 별 난관을 겪지 않았다.

▲ 석호와 석양은 인간사에 아랑곳 하지 않고 변함없이 무덤을 호위하고 있다.
ⓒ 한성희
성릉은 광해군이 폐위되자 성묘로 강등된다. 성묘 바로 앞에 풍양조씨 시조묘인 조맹의 묘가 있다. 공빈 김씨가 묻히자 조맹의 봉분을 헐자 했으나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성왕후로 추존되자 광해군은 조맹의 산소를 파내게 할 것인가 의논했으나 영의정 이덕형이 불가하다고 하자 봉분만 헐게 했다. 비석과 표석이 없던 조맹의 묘는 인조8년 5월 22일 후손인 조수이가 봉분할 것을 상소하니 이를 허락했다.

이때 인조는 법에 어긋나게 세운 성릉의 석물을 허물라 했으나 그대로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인조의 명은 지켜지지 않았다. 무덤을 건드리면 동티난다는 설을 두려워한 관료들이 그대로 두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 발치에 누운 아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공빈 김씨의 심정일까? 무덤 위에 내려앉은 낙엽이 애절하게 보인다.
ⓒ 한성희
어린 나이로 어머니를 잃었던 광해군이 어머니 발치에 묻어달라 한 것은, 왕위를 잃고 유배지에서 사무치게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광해군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이들 모자의 무덤은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 사무치는 회한의 눈물을 삼키고 있다. 가을빛 고운 낙엽이 성묘 곁에 떨어져 바람에 무심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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