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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저녁 8시가 넘자 전수관으로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이미 10여 명의 아낙과 몇 명의 아이들이 등을 기대고 앉을 목 좋은 자리를 잡고 분장하느라 정신이 없는 주민들에게 눈길을 주며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공연을 할 남정네들은 무대 양쪽에 마련한 소품실 겸 분장실에서 준비하느라 바쁘고, 연습하느라 야단이다.

오늘 이곳에서는 아주 귀중한 공연 '순전히' 주민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순전히' 주민들이라고 강조하는 까닭은 이들은 문화재로 지정되지도 않았고, 전문가(학자, 기능인)에 의해서 배운 것이 아니라, 한 향토사학자의 노력으로 채록한 공연본을 가지고 연습해서 올린 공연이기 때문이다.

ⓒ 김준
진도에 대표적인 민속으로 알려진 '다시래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진도민속을 아는 사람은 '다시래기' 공연이야 축제마다 하는 것이고, 심심찮게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그 다시래기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다시래기이다. 이번에 사천리 마을에서 공연될 다시래기는 판본이 전혀 다르며, 다시래기 공연자에게 직접 구술 채록한 것을 토대로 구성된 '전승본'이라는 것이다.

그 공연이 운림산방 아래에 자리한 사천리, '비끼내'마을에서 지난 12월 2일 이루어졌다. 마을 주민들과 남도민속학회 회원들, 마침 진도학회에 참여한 사람들까지 100여 명은 될 듯싶었다. 필자는 영등축제에서 참여해 '공연된' 다시래기(이하 '지정본')를 두 차례 관람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이번 의신면에서 '전승본' 다시래기를 보면서 둘의 차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 공연을 보기 위해 의신면 사천리(비끼내) 민속전수관에 모인 주민들
ⓒ 김준

▲ 공연 준비를 하는 모습
ⓒ 김준
다시래기 '무대'에 오르다

다시래기는 상가마당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며 극을 꾸며 노는 진도에서 전승되고 있는 장례놀이다. 농어촌 어디에나 시골에는 죽음 의례를 위한 '상두계'가 조직되어 있었다. 지금이야 종교(기독교, 불교, 가톨릭 등)가 그 기능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으며, 섬에도 상업화된 장례문화가 들어와 해결하지만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전통적인 방식이 남아 있다. 지금도 신안이나 완도 등 서남해역 섬마을에서는 간간이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시래기는 망자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과 상실감에 빠진 상주를 달래기 위해 펼쳐지는 가무극적 연희라는 점에서 특별한 전통으로 주목하고 있다.

다시래기라는 말의 어원은, '다시나기',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같이 즐긴다'는 '다시락'(多侍樂)에서 찾는다. 또 다른 의미로 '망자의 영혼이 집에 머물다 떠나는 시간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노는 놀이'라 해서 '대시(待時)레기'라고도 풀이한다.

지금이야 다시래기를 매우 특이한 민속으로 유교식 의례가 보편화되기 전에는 우리 민족의 지속적인 전통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의견이다.

▲ 김양은본 다시래기 중 '바탕놀음'
ⓒ 김준

▲ 김양은본 다시래기 중 '사당출산' 모습으로, 거사(봉사)-사당(봉사처)-중 등의 삼각관계가 설정된 문화재본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장면이다.
ⓒ 김준
진도 다시래기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 극장 공연 및 문화재지정과 관련된 현지조사부터라고 한다. 1984년 당시 진도문화원에 의해서 필사본(진도다시래기)이 정리되었고, 이듬해 학자들에 의해 '무형문화재지정 조사보고서'가 작성되었다.

대부분의 민속문화가 그렇듯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단 및 단절위기를 맞는다. 문화재지정과 국가지원은 이러한 우리 문화의 위기를 벗어나 전승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래기가 외부 알려진 것은 1970년대 중반 '국제민속예술제'에 출품된 정수웅 감독 <초분>이란 기록영화에 '사당거사놀이'가 소개되면서였다. 이후 1980년대 초반 국립극장 초청공연 등 각종 문화제에서 공연이 이루어지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1981년 제12회 남도문화제에 출연하여 우수상을 수상하였고, 1985년 2월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81호로 지정되었다.

다시래기는 씻김굿처럼 예능과 음악성이 뛰어난 확실한 전승자(세습무)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마을주민(상두계원) 중에 재담이 있는 사람이 나서서 하는 마을 자체놀이였다. 이런 이유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과정에서 '원형여부'와 '기능자 여부'가 논란이 되었으며, 제보자나 연구자들에 의해서 내용이 가감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진도내부 혹은 학계에서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해 왔다.

▲ 아이들의 모습이 더 재미 있다.
ⓒ 김준

▲ 김양은본 다시래기 중 '이슬털이'장면
ⓒ 김준
다시래기 '김양은' 전승본이 발견되다

김양은 구술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진도에서 다시래기 전승본이 확인된 경우는 없다. 김양은 구술본은 1983년 당시 91세이던 다시래기 연희자 출신인 진도군 고군면 석현리의 김양은(金良殷, 남, 1892-1985)으로부터 진도 향토사학자 허옥인 선생이 채록하였다. 그리고 이 자료는 최근 목포대 이경엽(민속학전공) 교수에 의해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보고서에 수록되었다.

이 교수는 최근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다시래기와 김양은 구술본을 비교분석한 논문을 학계에 내놓았다. 김양은은 17살부터 23살까지 직접 다시래기를 했으며, 거사나 사당 역할을 잘해 연희자로 이름을 얻어 상두계로부터 초청을 받아 공연을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허씨가 김양은을 찾기까지의 사연은 이렇다.

1980년대 중반 진도민속 내외부에서는 다시래기 노래와 관련된 갈등이 있었다. 당시 허씨는 의신면에서 '화중밭매기소리'를 발굴하여 문화재지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다시래기 공연팀이 밭매기 노래가 다시래기 노래라며 부르지 못하게 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 교수의 연구자료에 의하면, 사당패소리는 전국에 남아 있으며, 장례놀이에서도 다양하게 불려지고 있었고 한다. 근거로 인근 사당패소리는 신안 지역의 비금, 도초, 장산의 들노래에도, 비금과 도초의 밤달애의 남사당놀이에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들고 있다. 이는 사당패의 특성상 조선후기 각지에 전파되어 다양한 형태로 토착화되어 전승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허옥인은 이러한 사당패소리의 뿌리를 찾는 과정에서 김양은을 만나게 되었고, 다시래기 전승본을 남기게 된 것이었다.

▲ 이슬털이 장면, 상두꾼들이 닭죽을 먹고 놀다가 빈 상여채를 어깨에 메고 상여소리를 하면서 마당을 돈다.
ⓒ 김준
'만들어진 민속'과 '전승된' 민속 어떻게 할 것인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진도 다시래기는 당시 무계출신의 예인을 능가하는 예술적 끼와 재능을 지닌 사람의 기억과 증언, 연희자의 역할 그리고 학자들의 의견에 의해서 '구성'되었다. 문화재 '지정본'은 실제로 다시래기를 했던 사람이 아니라 어린 시절 기억의 구술을 통해서 내용이 정리되었기 때문에 재구성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여기에 문화재 지정 조사 과정에서 불충분한 내용을 채워 넣는 과정에서 새롭게 각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중의 등장', '중-사당-봉사가 삼각관계'를 보이는 것 등이 창작된 내용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 근거로 문화재본 다시래기 공연에 참여해온 한 인간문화재로부터 "봉사 캐릭터는 자신의 연기력으로 만들어낸 것"이며, 삼각관계는 '심청천'의 '심봉사-뺑파-황봉사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 넣은 것'이라고 확인했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이 교수는 그 동안 소개되지 않았던 전승본 다시래기인 '김양은본'을 발견해 '문화재본과 비교분석하여 이를 입증하였다.

▲ 김양은본 다시래기를 채록한 진도향토사학자 허옥인과 학계에 소개한 목포대 이경엽 교수(국문과)
ⓒ 김준
문화재지정과 관련해 늘 논란이 되어 오는 것이 전승자료인가, 만들어진 자료인가 하는 점이다. 무형문화재는 현장성과 전문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현지연행자 및 제보자의 진실성과 학술적 검증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 다시래기 연희자 김양은(1892-1985), 진도 고군면 석현리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전까지 직접 사당과 거사역을 맡아 17세부터 25세까지 다시래기를 했다.
ⓒ 김준
문화의 '원형'을 찾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문화는 늘 변하는 사회성과 역사성을 담고 있어야 생명력을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용과 창조는 분명 구별되어야 한다. 특히 그것이 문화재라는 이름표를 달 때는 더욱 그렇다. 한번 문화재로 지정되고 나면 그것이 원본이 되고 전승본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자생적으로 전승되어 오는 것들이 소멸하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마을별로, 지역별로, 전승자들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어 온 것들이 문화재 지정본을 '교과서'로 삼아 획일화되어 온 우려도 지적되고 있다.

서남해 여러 곳에서 씻김굿이 존재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씻김굿이 '진도씻김굿'만 있은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강강술래'도 마찬가지이다. 문화는 지역의 생업환경과 역사, 사회문화적 특성에 의해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전승되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사라질 위기에 있는 문화자원들이 전승되고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의미가 있지만 자칫하면 문화를 왜곡하거나 획일화하는 우려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진도에 '전승본' 다시래기가 시연되고 세상이 알려지게 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느 것이 진실이고 전통적이냐 하는 따짐은 오히려 지엽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교수가 논문에서 밝힌 것처럼 그것이 '문화재본'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연극무대에 올리는 다시래기는 공연물로서 흥미를 가미한 창작도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무형문화재'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래서 그는 김양은본 다시래기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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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