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홍석현 전 주미대사가 12일 오후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는 가운데 <중앙일보> 기자들과 간부들이 홍 전 대사를 호위하며 입국장으로 향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난 12일 오후 1시30분. 김포공항 국제선 입국장에는 한 무리의 기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미국을 출발, 일본을 거쳐 이날 오후 한국으로 들어오는 홍석현 전 주미대사, 전 <중앙일보> 회장이자 사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지상파 방송사를 포함한 TV카메라가 줄지어 서있고 카메라를 든 사진기자들이 몰려 있으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일부 여학생들은 행여 연예인이라도 오는지 싶어 취재진들에게 '누가 와요?'라고 묻다가 '홍석현'이라는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나가기도 했다.

홍 전 대사는 옛 안기부 'X파일'에서 1997년 대선 직전 삼성그룹의 불법 대선자금을 여야 정치인 등에게 제공한 핵심 '전달책'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는 당시 추석을 앞두고 '떡값' 명목으로 전·현직 검찰 간부들에게 돈을 건넨 것으로도 나와 있다.

이로 인해 홍 전 대사는 지난 2월 22일 취임한 지 7개월째 되던 지난 9월 23일 주미대사직을 사임했다. 또 지난 9월 30일과 10월 21일 두 차례에 걸쳐 검찰 도청수사팀으로 소환을 통보받았지만 귀국을 미뤄왔다.

▲ 12일 귀국한 홍석현 전 주미대사(<중앙일보> 사주)가 김포공항을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권영빈 <중앙일보> 사장 겸 발행인·편집인(왼쪽)과 기자들이 인터뷰를 시도하는 다른 언론사 기자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삼성이 여길 왜 옵니까?"

홍 전 대사의 도착을 10여분 앞두고 공항 입국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수 명의 사람들이 서성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중 한 사람에게 다가가 '홍 전 대사 마중나온 분들이죠?'라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일보인가요, 삼성인가요'라고 다시 물었더니 그는 "삼성이 여길 왜 옵니까?"라고 답했다.

기자는 '중앙일보에서 왔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소속이 어디인지 밝히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다.

오후 2시 42분. 수 명의 사람들을 대동한 홍 전 대사가 입국장에 나타났다. 홍 전 대사에게 한 마디라도 들으려고 따라붙는 기자들로 인해 입국장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홍 전 대사를 기다리고 있던 <중앙일보>측 사람들과 홍 전 대사가 대동하고 나타난 사람들은 홍 전 대사를 '호위'하기에 바빴다.

취재를 하려는 기자들과 몸싸움이 벌어졌고, 홍 전 대사를 호위하던 한 사람은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라고 외치며 따라붙는 기자들을 밀치기도 했다. 이들의 적극적 방어로 홍 전 대사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특유의 여유 있는 미소를 잃지 않았고, 공항 계류장에서 일부 기자들에게 짧은 귀국 소감을 밝힌 것 외에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홍 전 대사는 젊고 건장한 몇몇 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며 공항 출입문 바로 앞에 주차된 검은색 에쿠스 승용차에 올라탔다. 이 모든 과정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약간의 실랑이를 겪었지만, 홍 전 대사는 신속하고 안전하게 공항을 빠져나갔다.

기자는 당시만 해도 홍 전 대사를 호위하던 이들을 <중앙일보>측 인사나 파견된 경호원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같은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홍 전 대사의 귀국 장면이 보도되고 난 뒤 "어, 홍석현씨 왼쪽에 있는 사람은 ○○○ 기자가 아니냐", "국회 출입하던 △△△기잔데"라는 반응이 기자들 사이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권영빈 <중앙일보> 사장도 속해 있었다.

▲ 홍석현 전 주미대사가 <중앙일보> 일부 기자들과 간부들의 '호위' 속에 대기하고 있는 차량으로 접근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 홍석현 전 주미대사가 <중앙일보> 기자 등의 도움을 받아 공항 출입문 바로 앞에 주차된 검은색 에쿠스 차량에 타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회사와 관련된 분이 아니니 대답할 수 없다"

<중앙일보>는 'X파일' 사건과 관련, 홍 전 대사의 거취를 물으면 "지금은 회사와 관련된 분이 아니니 대답할 수 없다"고 언급을 회피했다. 그랬던 <중앙일보>의 사장과 기자들이 홍 전 대사를 마중나온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물며 그들은 홍 전 대사의 호위를 도맡으며 타사 기자들의 취재를 막기도 했으니….

▲ 지난 99년 9월 30일 보광그룹 탈세사건에 대한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대검에 출두하고 있는 당시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
지난 1999년 9월 30일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자 보광그룹 대주주였던 홍 전 대사가 탈세혐의로 검찰에 소환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대검 앞에는 <중앙일보> 기자 40여명이 검은색 체어맨 리무진을 타고 출두하는 홍 사장을 향해 "홍 사장 힘내세요"라고 외쳤다. 이후 '홍 사장님 힘내세요'라고 외쳤다는 말도 전해졌으나 <중앙일보>측에서는 '홍 사장'임을 매번 강조하고 있다.

<중앙일보> 기자들은 이른바 'X파일' 사건이 터지고 난 직후인 지난 8월 5일 지면을 통해 '중앙일보 기자들은 다짐합니다'라는 제목의 결의문을 실었다. 기자들은 이 글에서 "옛 안기부 도청 녹음테이프 내용 중 일부가 중앙일보 대주주인 홍석현 주미대사와 관련된 사안이란 걸 알고 난 뒤 참담함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다”며 “과거의 부적절한 관행이 혹 남아 있다면 이를 과감히 끊어버리겠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사태를 통해 언론이 특정 정파나 사주·기업 등의 이해관계에 휘말릴 경우 엄청나게 큰 후유증을 겪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면서 "중앙일보는 신뢰받는 정론지로서, 삼성은 일류 기업으로서 각기 제 갈 길을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김포공항에서 목격된 <중앙일보> 일부 기자들과 간부들의 모습은 6년 전 대검 청사앞에서 외치던 '사장, 힘내세요'가 사주를 위한 거친 몸싸움으로 형식만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은 없었다. "독자와 국민을 두려워하는 겸허한 자세로 더 힘차게 뛰겠다"던 <중앙일보> 기자들의 굳은 결의가 새삼 아쉬운 날이 아닐 수 없다.

다음은 지난 8월 5일 <중앙일보>에 실린 기자들의 결의문 전문이다.

중앙일보 기자들은 다짐합니다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최근 공개된 옛 안기부 도청 녹음테이프 내용 중 일부가 중앙일보 대주주인 홍석현 주미대사와 관련된 사안이란 걸 알고 난 뒤 저희는 참담했습니다. 밤낮없이 현장을 누비며 쌓아온 독자와 국민 여러분의 신뢰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느낌입니다.

저희는 이번 사태로 중앙일보에 대한 독자와 국민 여러분의 실망과 질책이 얼마나 큰지 절감하고 있습니다. 사주의 잘못일 뿐이라고 떠넘기거나 책임을 피하려 하지도 않겠습니다. 일부 핵심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거나 그때와 지금의 중앙일보는 달라졌다는 말들도 모두 변명으로 비칠 수밖에 없음을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비판과 감시의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언론이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엄격한 도덕성과 규율을 요구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입니다.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삼성과 정치권의 부적절한 관계에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 개입한 것은 언론사 책임자로서 있을 수 없는 처사였습니다. 중앙일보 독자와 국민을 실망시킨 이런 과거의 잘못에 대해 당사자인 홍석현 대사는 물론 우리 기자들도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중앙일보는 99년 삼성과 완전 분리됐습니다. 물론 이번 사태가 그 이전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지만,여전히 중앙일보가 삼성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아니냐는 독자와 국민 여러분의 우려가 있음을 저희는 이번 사태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다시 한번 주위를 꼼꼼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부적절한 관행이 혹 남아 있다면 이를 과감히 끊어버리겠습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중앙일보는 신뢰받는 정론지로서, 삼성은 일류 기업으로서 각기 제 갈 길을 가야 합니다.

중앙일보는 정파적 이해관계에 스스로를 얽어 넣었던 불행한 과거가 있습니다. 하지만 반성과 깨달음을 통해 새 출발을 다짐했고, 2002년 대선 보도 등을 통해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통해 저희는 언론이 특정 정파나 사주.기업 등의 이해관계에 휘말릴 경우 엄청나게 큰 후유증을 겪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저희 기자들은 공정보도위원회의 내부감시 활동을 강화하는 등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를 위한 발걸음을 더욱 재촉할 것을 다짐합니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저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그리고 독자와 국민 여러분께 더 다가가기 위해 신발끈을 고쳐 매겠습니다. 신뢰 회복에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믿습니다. 오늘의 고통과 시련이 중앙일보가 보다 성숙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이제 독자와 국민을 두려워하는 겸허한 자세로 더 힘차게 뛰겠습니다.

많은 격려와 함께 애정 어린 눈길로 지켜봐 주십시오.

2005년 8월 5일
중앙일보 기자 일동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상근기자. 평화를 만들어 갑시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