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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천 황현의 영정.
ⓒ 이철영
매천 황현(1855~1910)은 세종 때 정승 황희의 후손으로 지금의 광양시 봉강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황직은 가세가 기운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장사를 해 700석의 재산을 모았다. 그는 매천의 아버지에게 재산을 물려 주며 오직 손자의 교육을 위해 쓰도록 했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던 매천은 1천여 권의 서적을 마련해주며 자신을 뒷바라지한 부친의 노력으로 학문에 매진할 수 있었다.

집안의 염원대로 28세(1883)에 초시에 응시하여 1등을 했으나 시험관이 그를 시골출신이라 하여 2등으로 떨어뜨리고, 면접에서마저 낙방시켜 버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칩거했다. 이후 33세에 부친의 엄명으로 과거(생원시)에 응시, 또 다시 장원하였으나 부패가 극에 달한 정계에 몸을 담을 수는 없었다.

그는 구례 간전면 만수동에 구안실(苟安室, 구차하게 편안함을 구하는 방)이란 서실을 짓고 학동들을 가르치며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의 학문과 재주를 아끼는 서울의 친구들이 편지를 보내 함께 일할 것을 권하기도 했으나 "도깨비나라의 미치광이들 중(鬼國狂人之中)에 나를 끌어들여 미친 놈을 만들려 하느냐"며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

▲ 경술국치를 당하자 자결로써 '군자지도'를 실천한 매천 황현을 기려 자택 터에 세운 매천사(전남 구례군 광의면 서월리)
ⓒ 이철영
그러나 세상은 급변하고 있었다. 도처에서 민란이 발생하고, 동학당이 생겨나고, 운요호 사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소용돌이가 잇따라 일어났다.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자들은 제국열강의 탐욕과 폭력 앞에서 조선을 지켜낼 수 없었다. 인(仁)과 의(義)는 땅에 떨어지고 500년 조선의 역사는 명운을 다해가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뒤 1902년 그는 만수동 골짜기에서 나와 구례 광의면 월곡마을로 이사한다.

그는 저서 '오하기문(梧下記聞)'에서 성리학적 질서에 도전한 개화파와 동학농민군을 역적, 도적떼로 가차 없이 비판했으나, 변화의 물결 앞에 섰던 그들의 영향으로부터 그 또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나라와 군왕과 백성이 성리학적 질서 안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국가의 위기를 헤쳐 나가기를 원했다. 세상이 혼탁할 때는 몸을 숨겨 명리를 버려야 하나 군왕과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는 응당 의(義)로 나서서 행동해야 하는 조선의 선비였기 때문이다.

▲ 구례 연곡사에 있는 고광순 의병장 순절비.
ⓒ 이철영
전남 창평의 고광순은 1907년 의병을 일으키며 당대의 문장가로 알려진 그에게 격문을 써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격문 쓰기를 거절했으나 사람을 돌려보내고 나서는 후회했다. 격문을 다시 써 놓고 기다렸다. 그는 "심부름 온 사람은 실망해 돌아갔다. 공이 찾아 오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오지 않았다"고 그의 글에 적었다.

구례 연곡사에 진을 쳤던 고광순의 부대는 같은 해 10월 11일 일본군의 야간 기습을 받아 피아골에서 전멸했다. 60노구의 고광순 장군 또한 장렬히 전사했다. 매천은 한달음에 달려갔다. 불탄 연곡사의 불기가 채 식지 않은 현장에서 그는 격문을 써 주지 못한 회한, 행동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한없는 나약함, 이 땅의 선비로 태어나 의(義)로 산화한 장군에 대한 애석함이 뒤엉켜 통곡한다. 그는 1905년의 을사늑약 소식을 듣고서는 이렇게 적었다.

▲ 황현이 자결한 대월헌은 최근 매천사 안에 복원되었다.
ⓒ 이철영
"한강물이 울먹이고/ 북악산도 찡그리는데/ 세갓집 벼슬아치들은/ 예 그대로 노니는구나/ 동포들이여 청하노니/ 역대의 간신전을 읽어보오/ 나라 팔아 먹은 놈 치고/ 나라 위해 죽은 자는 없었다오"

그가 만년을 보낸 곳은 대월헌(待月軒)이다. 자신의 운명을 이미 예정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가 기다린 달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서재 대월헌에서 끝없는 갱신을 통해 완성해야 할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동시에 그로부터 멀어져 가는 존재의 절망감에 몸부림쳤을 것이다. 달은 군자의 덕과 절개를 상징한다. 차고 기울기를 반복하며 영원히 순환한다. 그는 운명의 순환에 몸을 맡겼다.

▲ 황현의 절명시 친필.
ⓒ 이철영
1910년 8월의 경술국치를 지난 9월 10일 그는 세 덩어리의 아편을 소주와 함께 삼켰다. 죽어가던 그를 발견한 동생 원(瑗)에게 "죽기가 쉽지 않더군. 약을 마시려다가 입에서 약사발을 세 번이나 떼었다네. 내가 이렇게도 어리석은가"하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할만한 의리는 없다. 다만 이 나라가 5백년 동안 선비를 길렀는데 나라가 망한 날 선비 한 사람도 죽지 않는다면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나는 위로는 한결같은 마음의 아름다움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 읽은 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을 뿐이다. 아득히 오랜 잠에서 깨어나 참으로 통쾌함을 깨달으니 너희는 너무 슬퍼하지 말라.

- 아들과 동생에게 남긴 글 '유자제서(遺子弟書)' 중에서 -


매천의 동생 황원(黃瑗)마저 일제의 폭압이 극에 달한 1944년 창씨개명에 항거하며 돌을 묶고 저수지에 몸을 던졌다.

새 짐승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시름거리니
무궁화 이 강산은 이제 망해 버렸네
가을 등잔에 책 덮고 역사를 헤아려 보니
글 아는 사람 구실하기 어렵구나

- 매천의 '절명시' 제3절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oil'사보 11월 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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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기행 연재했던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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