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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슈켄트는 몇 가지 점에서 한국과 인연이 있는 곳이다. 타슈켄트와 연관이 있는 최초의 한인은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수인 고선지 장군이다. 1300여 년 전에 고선지 장군은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 석국을 정복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바로 이 석국이 오늘날의 타슈켄트다. 그리고 구소련에 의해서 1937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한인들의 일부가 지금의 타슈켄트 근방에 정착을 했고, 그 후손들의 상당수는 아직도 이 지역에 살고 있다.

나는 그 한인들의 흔적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처음 간 곳은 타슈켄트 중심가에 있는 나보이 문학박물관이다. 알리세르 나보이라는 인물은 우즈벡 민족문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사람이다. 모두 아랍어로만 작품을 쓰던 15세기에 그는 우즈벡어로 문학작품을 창작한 인물로 많은 우즈벡인들의 존경을 받는 작가라고 한다.

타슈켄트 시내지도를 구입한 나는 지도를 보면서 그곳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멀게 느껴진 거리였고 더위가 걱정이었지만 지리를 익히려면 걷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지도를 보자 그곳에는 나보이의 이름을 붙인 긴 거리도 있었고, 그 거리 한쪽에 나보이 박물관,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나보이 극장도 있고 나보이 지하철 역도 있다. 우즈벡에서 나보이가 얼마나 유명한 인물인지 알 것 같았다.

타슈켄트의 거리는 대로뿐만 아니라 큰 거리 사이에 있는 작은 길에도 모두 길의 이름이 써 있다. 그리고 시내 지도에도 크고 작은 많은 거리마다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다. 방향감각과 지도만 있다면 시내 어디에서든 길을 잃을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 나보이 극장과 그 앞의 분수대
ⓒ 김준희
거리로 나서서 걷기 시작하자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많은 경찰들이었다. 초록색 계열의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최소 200m마다 한두 명씩 있는 것 같았다. 우즈벡 경찰에 관한 이상한 소문을 들었던 나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긴장했지만, 경찰들은 날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계속 걷다보니 오른쪽으로 한국 대사관이 보였다. 커다란 대사관에는 태극마크가 있었고, 그 앞에는 여러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대사관 자체보다도 그 창에 붙어 있는 에어컨이었다. 아침인데도 뜨거운 햇볕. 저 안에 들어가서 햇볕을 피해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찬 음료수를 한 잔 한다면 남부러울 것이 없겠다, 하는 생각을 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통령 궁처럼 보이는 건물이 나왔다. 그 앞의 넓은 도로는 건물 양옆으로 바리케이드를 쳐 놓은 채 차들의 진입을 금지하고 있었고, 건물 앞에는 총을 멘 경찰들이 초소 주변에서 걷고 있었다.

1시간쯤 걸었을까. 나보이 거리가 앞에 나타났다. 4거리 한쪽으로는 나보이 박물관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나보이에 관심이 있어서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 이 박물관 4층 한쪽에 위치한 조명희 기념실을 보고 싶어서였다.

포석 조명희는 충북에서 태어나 일본유학을 거쳐서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에 가입해 활동하며 대표작 <낙동강>을 발표했던, 일제 시대 재소한인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1928년에 소련으로 망명, 소련작가동맹회원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 소련헌병에게 체포돼서 이듬해에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당했다.

조명희는 이후 명예회복이 되어서 소련작가연맹회원으로 복권됐다. 타슈켄트의 나보이 기념관에는 조명희 기념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타슈켄트의 남쪽에는 '조명희 거리'라고 명명된 거리가 있다. 언뜻 타슈켄트와는 연관이 없어 보이는 조명희 기념실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조명희의 후손들이 지금 타슈켄트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보이 기념관의 입장료는 1000숨이다. 1층은 입구와 홀이고 2,3,4층이 전시실이다. 2층과 3층에는 나보이와 관계 있는 각종 책과 필사본 그리고 나보이의 조각상과 초상화가 진열되어 있었다. 한쪽으로는 나보이가 사용했다는 테이블도 있고, 나보이와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그림과 도자기, 그리고 다른 작가의 책과 그림도 있다(숨은 우즈벡의 공식화폐단위, 1숨은 한화 약 1원).

4층으로 올라가자마자 나는 조명희 기념실을 찾았다. 넓은 4층의 한쪽에 위치한 작은 문에는 '조명희 기념실'이라고 한글로 써 있었다. 낯선 땅에서 만나는 낯익은 이름. 하지만 그 문은 잠겨 있었다.

어찌된 영문일까 생각하다가 2층으로 내려갔다. 박물관을 관리하는 아주머니에게 '조명희'라고 말을 하며 손짓으로 그 문이 잠겨 있다는 시늉을 했다. 아주머니는 알겠다는 듯이 웃으며 나와 함께 4층으로 올라가서 그 문을 열어주었다. 이 기념실은 항상 열어두는 것이 아니라 지금같이 별도의 요청이 있어야 열어주는 모양이다.

▲ 조명희 기념실의 흉상
ⓒ 김준희
조명희 기념실은 작은 공간이었다. 기념실 정면에는 조명희의 흉상이 있고, 그 위에는 '그러나 필경에는 그도 멀지 않아서 잊지 못할 이 땅으로 돌아올 날이 있겠지 락동강'이라고 쓰인 액자가 걸려 있었다.

액자의 구절과는 달리 조명희는 소련으로 망명한 후, 다시는 한국 땅에 오지 못한 채 그곳에서 총살당했다. 기념실 오른쪽으로는 조명희가 쓴 친필 시와 편지, 조명희 관련 각종 책들과 그의 작품 전집과 선집들이 있었다.

그 위 벽에는 조명희 관련 신문기사를 스크랩한 액자와 유가족의 사진들이 있고, 그 아래의 방명록에는 이곳을 다녀간 한국인들이 적어놓은 글이 있었다. 벽 한쪽에는 조명희가 양복을 입고 앉아 있는 사진과 감옥에서 빡빡머리에 수인번호가 붙어 있는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이 있다.

조명희는 스탈린 숙청시절에 '인민의 적'이란 죄명으로 체포되었다고 한다. 체포되지 않았더라면 조명희는 연해주의 다른 한인들처럼 타슈켄트 근방 어딘가로 강제이주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채 죽은 이후에야 사진과 유물들만이 타슈켄트 한쪽에서 전시되고 있었다.

난 조명희의 감옥사진을 보았다. 활동시절에 찍은 사진과는 달리 핼쓱한 얼굴에 우울하고 슬퍼 보이는 눈빛이었다. 조명희는 총살당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소련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운명을 탓하고, 빼앗긴 조국을 원망하면서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기념실 밖에서는 이곳 문을 열어준 아주머니가 서성이고 있었다. 아마 내가 나가면 다시 이 문을 잠그는 모양이다. 잠긴 다음에 이 방은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른다. 이곳을 보기 위해서 여기까지 걸어왔고 이 방도 얼마만에 열린 것인지 모르는데, 기다리는 아주머니가 신경쓰이긴 했지만 쉽게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조명희 기념실의 신문스크랩 액자
ⓒ 김준희
박물관을 나오자 점심 때가 지나 있었다. 난 박물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현지인들이 '브로드웨이'라고 부르는 거리로 갔다. 이곳은 낮이나 밤이나 타슈켄트의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거리에는 많은 카페와 노점상들이 있고 사람들을 상대로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사들, 초상화를 즉석에서 그려주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이곳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서 점심으로 양고기 볶음밥인 플로프와 양고기 국인 슈르파 그리고 콜라를 먹었다. 플로프와 슈르파를 합친 가격이 1000숨이다. 현지인들처럼 뜨거운 차이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무더위와 강한 햇볕 때문에 차가운 콜라를 마셨다.

▲ 타쉬켄트에서 먹은 점심. 플로프(좌측)와 슈르파.
ⓒ 김준희
우즈벡의 식당에서 파는 음식들은 플로프, 슈르파, 꼬치구이인 샤슬릭, 리포쉬카라고 부르는 전통 빵 그리고 차이가 많다. 차이는 질료니 차이와 초르니 차이가 있는데 질료니 차이는 녹차, 초르니 차이는 흑차라고 보통 말한다. 유목의 전통을 가지고 있고 상당수가 이슬람교도인 나라기 때문에, 이 음식들은 대부분 고기가 주를 이루고 특유의 양고기 냄새가 난다. 하지만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딱 맞는 메뉴라고 느껴졌다.

▲ 브로드웨이 거리의 분수대
ⓒ 김준희
점심을 먹고 브로드웨이를 둘러본 후 티무르 광장으로 향했다. 티무르 광장은 아미르 티무르의 동상이 있는 곳으로 이 주변을 타슈켄트의 중심가라고 부른다. 우즈베키스탄이 구소련에서 독립하기 전에는 이 광장에 티무르 동상 대신에 마르크스의 동상이 있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처럼, 우즈베키스탄도 독립과 함께 많은 것들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아미르 티무르의 동상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다. 14세기에 사마르칸드를 수도로 중앙아시아를 제패한 풍운아였던 아미르 티무르는 전성기 시절에 인도의 델리에서 바그다드까지 점령하고 모스크바에 쳐들어가기도 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대통령인 카리모프는 이전 티무르 제국을 부활시키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 티무르 광장에 있는 아미르 티무르 동상
ⓒ 김준희
난 그 한쪽의 벤치에 앉았다. 더위가 문제였다. 건조한 지역이라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바람도 구름도 없는 여름의 햇볕은 뜨거웠다. 서울처럼 푹푹 찌는 더위가 아니라 사람을 말려버릴 듯한 뜨거움이다. 관개시설이 잘 된 곳이라서 공원 곳곳에 있는 스프링쿨러에서는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타슈켄트에 있는 많은 나무들은 비가 없어도 스프링쿨러 물로 여름을 시원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은 나무를 걱정할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걱정할 문제다. 우즈베키스탄이 이렇게 더운 줄 알았다면 카자흐스탄이나 키르키즈스탄을 먼저 들렀다가 오는 건데,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쩌랴.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더위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한 달을 여행할 계획이니 한 달 동안 이 더위를 참아야 한다는 얘기다. 타슈켄트의 더위야 그렇다 치고, 앞으로 가게 될 역사도시인 사마르칸드, 부하라는 얼마나 더울까. 그리고 히바는?

우즈베키스탄의 국토는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비스듬하고 길게 놓인 형상이다. 타슈켄트는 그 동쪽에 위치하고 있고, 서쪽으로 가면서 사마르칸드와 부하라, 히바가 차례로 나온다. 문제는 서쪽으로 갈수록 지형이 사막지형에 가까워진다는 것. 황무지 근처에 놓인 그 서쪽 도시들도 이곳 못지않게 더울 것이다.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즈벡 여행은 이제 시작이고, 초장부터 더위에 진이 빠져서는 안 된다. 더위가 심한 한낮에는 걸어 다니는 것을 삼가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내일은 우즈벡에 이름을 남긴 또 다른 한인, 김병화 박물관과 그 농장에 가봐야겠다.

덧붙이는 글 | 2005년 7월부터 10월까지 4개월간 몽골-러시아(바이칼)-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키즈스탄을 배낭여행 했습니다. 그중에서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키즈스탄 여행기를 우선 작성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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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과 장르소설을 좋아합니다. 저서로 <오래된 길, 우즈베키스탄을 걷다>, <바오밥나무와 여우원숭이>, <실크로드의 땅, 중앙아시아의 평원에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