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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학동입구 길옆에 있는 가옥 미니어처
ⓒ 이승철
이수광의 <지붕유설>에 의하면 옛날에 청학이 깃들어 사는 곳이라 하여 청학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 이 시대에 현대문명의 혜택을 등지고 산속에 칩거하며 그들만의 전통문화와 생활양식으로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아주 외지고 특별한 산 속 마을.

청학동으로 향하는 내 의식의 저변에는 이런 지극히 일반적인 상식과 기대감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동을 출발하여 청학동 계곡으로 20km가 넘는 잘 포장된 길을 달리면서도 그런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청학동 골짜기는 흐린 날씨와 옅게 깔린 안개 속에서도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눈부셨다. 그러나 그런 경치보다도 언제쯤 초가지붕을 머리에 인 토담집과 돌담 고샅길에 머리를 땋아 늘인 아이들이 나타날까, 하는 기대감으로 차창 앞쪽으로 향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단풍이 아름다운 골짜기, 벼가 누렇게 익은 다랑이 논, 작은 저수지와 주렁주렁 감나무, 소박한 정자와 느티나무가 있는 계곡을 끼고 달리는 길은 한참을 달려도 그런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조금 더 올라가노라니 오히려 산뜻하게 꾸며놓은 민박집이며 음식점들이 자주 눈을 어지럽힌다. 그래도 조금 더 올라가면 분명히 상상속의 이상향, 꿈의 마을이 나타나겠지, 하는 기대감은 어쩔 수 없었다.

▲ 골짜기 마을입구의 정자와 느티나무
ⓒ 이승철
▲ 도인촌 골짜기의 단풍
ⓒ 이승철
몇 굽이를 더 돌아 올라갔을 때 골짜기에 초가한옥이 아닌 커다랗고 고풍스러운 기와집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안내판에는 ㅇㅇㅇ서당, ㅇㅇㅇ예절학교 등 옛스럽기는 하지만 너무 당당한 건물들이 낯설어 그냥 더 올라가기로 하였다.

드디어 골짜기 삼거리에 왼편은 삼성궁, 오른편으로 오르는 길은 도인촌이라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일단 삼성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삼성궁 입구 마당은 커다란 중장비가 굉음을 터뜨리며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마당 오른편 언덕 위로 오르는 길이 있었지만 올라가지 않았다. 삼성궁 건물의 형태가 특이하기는 하였지만 국적불명의 낯선 양식이어서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성궁의 외양만 살펴보고 도인촌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역시 음식점과 민박집만 보일뿐 도인들이 살고 있음직한 가옥이나 사람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뒤돌아 내려올까 하다가 혹시나 하여 등산로 매표소가 있는 골짜기의 작은 다리를 건너 왼편으로 올라가니 입구의 민박 및 음식점 뒤로 몇 채의 가옥들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그 가옥들은 대부분 작은 초가지붕들이어서 우리들의 발길을 재촉하게 만들었다.

마을 안길에도 쑥쑥 자란 나무들이 노란 단풍으로 물들어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더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작은 빗방울들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진다. 어젯밤 설악산과 대관령에는 첫눈이 내렸다는 TV 뉴스와 함께 이곳 남쪽지방에도 비가 조금 내릴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는데 그 예보가 적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 도인촌 입구의 민박집, 지붕에도 핀 하얀꽃이 이채롭습니다.
ⓒ 이승철
▲ 천제단에서 내려다본 도인촌 풍경
ⓒ 이승철
마을 위쪽의 유ㆍ불ㆍ선과 동서양의 사상과 종교를 어우른다는 천제단을 살펴보고 내려오다가 고샅길 안쪽의 작은 초가집 마당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만났다기보다 마당에 나온 할머니를 보고 우리가 사립문도 없는 마당으로 들어선 것이다.

“할머니, 이곳이 도인촌 맞지요?” 그러나 할머니는 잠깐 쳐다만 보았을 뿐 아무런 말이 없다. 마침 그 고샅길에는 길을 포장하는 인부들 몇 명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길을 모두 포장하고 음식점과 건물들도 많이 들어섰는데 더 편리하고 좋아지셨습니까? 아니면 소란하고 번거롭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때 방문을 열고 도인 한명이 나타났다. 직감적으로 아, 이 노인은 도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외모와 풍채를 갖추고 있었다. “나랑 이야기합시다. 잠깐 방으로 들어갑시다.” 노인이 우리를 방으로 청하였다. 노인을 따라 들어간 방안은 아무 장식 없이 정갈한 방이었다. 방바닥에는 몇 권의 책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옛날에는 하동에 한번 다녀오려면 3일씩이나 걸렸지요.” 노인이 말을 시작하였다.
“국립공원지역이어서 아무것도 손댈 수 없었고, 하지만 지금은 당국에서 문화마을을 조성한다고 이렇게 길도 내고 포장도 해주고 해서 쉽게 하동읍내에도 다녀올 수 있고.”

노인은 조금 전에 내가 할머니에게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변부터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랬다.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울퉁불퉁 산골길을 3일씩 걷고 걸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토담집에서 호롱불 밝히고, 무명저고리와 고무신을 신고, 조밥과 도토리묵을 먹고, 공자왈 맹자왈을 읽는 신선 같은 삶. 그것이 얼마나 허황되고 비현실적인 생각인가. 나는 어쩌면 환상에 젖어 있었던가, 아니면 바보였는지도 모른다.

▲ 삼성궁 전경
ⓒ 이승철
▲ 건물지붕위의 굴뚝과 단풍들어 말라버린 잡초들
ⓒ 이승철
이 도인들도 분명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동시대의 문명인들이었던 것이다.

“선생님, 이곳에는 언제부터 이렇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습니까?”
“한 삼백년 전 쯤 되지요. 그러나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13년간 이 마을을 비웠었지요.”
“들어오면서 보니까 많은 서당들이 보이던데 그건 누가 운영하는 겁니까?”
“서당 말이지요? 가르치는 일은 이곳 도인들이 하고 있지요.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배우러 옵니다. 학생들도 많이 오고요.”

노인은 이곳 청학동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들이 모두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모두 한문으로만 쓰인 몇 권의 책을 내 놓고 “<격암유록>에 의하면…. 자 여기를 보세요? 이것이 바로 그 문구입니다. <정감록>에 의하면…” 하는 식으로 도인의 설명은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청학동이 풍수지리상으로나 각종 예언에 의하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상의 길지요 중심이라는 것이 중요 골자였다. 덧붙여 앞으로 우리나라의 장래는 밝고 희망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여길 보세요?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였던 역사적인 사실도 이미 이 책에 다 예언이 되어 있었어요. 그러나 일본은 앞으로 결코 밝은 나라가 아닙니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던 일도 다 예언이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도인의 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나를 깜짝 놀라게 하였던 말은 그런 예언이 아니었다.

“재림예수를 기다려야 합니다.”
“네? 예수라고요?”

너무나 뜻밖의 말에 나는 내 귀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도인의 말은 너무나 확실하였다.

“자 여길 보세요?”

노인이 보여주는 책에는 둥그런 도표에 작은 글씨들이 곳곳에 쓰여 있었다.

“여기, 이쪽이 하늘이지요. 지금 하나님은 이 하늘에 계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이 밑. 즉 땅으로 내려오시는데 그분이 재림예수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분이 내려오시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분이 내려오시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지경이 삼천리지만 그때는 삼만 리가 됩니다.”

▲ 도인촌 천제단 주변 풍경
ⓒ 이승철
▲ 청학동의 유래와 위치 세상의 현재와 미래를 설명하는 노 도인
ⓒ 이승철
역시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성경과는 너무나 다른 해석이었다.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밝히고 천제단 입구에 쓰여 있는 유ㆍ불ㆍ선과 동서양의 사상과 종교를 아우른다는 뜻에는 기독교도 포함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도인은 당연하다고 하면서 기독교의 예수가 바로 그분이라며 역시 재림예수를 기다려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동행한 친구가 통일은 언제나 가능하겠느냐고 묻자. 대뜸 “햇볕정책 그거 잘하는 겁니다. 우리민족끼리 그렇게 해야지요. 우리가 그런 포용정책을 펴야 그들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올해 79세의 김씨 도인과의 대화는 참으로 즐겁고 유쾌한 것이었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세상을 통찰하는 듯한 혜안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지리산 깊은 오지에서 생활하는 노 도인에게서는 세상에 대한 드넓은 포용과 사랑, 그리고 희망이 가득 넘치고 있었다. 도인의 얼굴 또한 도저히 여든 노인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아직도 고운 피부와 싱그러움이 가득하였다.

▲ 해발 850미터의 청학동에서 바라본 삼신봉, 단풍이 절정입니다.
ⓒ 이승철
노 도인과의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그 사이 하늘이 많이 개어 있었다. 청학동 뒤편으로 우뚝 솟은 삼신봉은 온통 붉은 단풍으로 뒤덮인 모습이다. 천황봉 높은 봉우리에서부터 시작된 단풍이 능선과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면서 맑은 물소리와 어울려 어머니의 품속 같이 넓고 포근한 지리산 자락을 가을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10월 여행 이벤트 응모> 기사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시인이승철 을 검색하시면 홈페이지 "시가있는오두막집"에서 다른 글과 시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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