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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 왕이, 아래 왕비가 잠든 '동원상하봉'이라는 형식의 영릉.
ⓒ 한성희
효종의 영릉(寧陵)은 세종의 영릉(英陵)에서 멀지 않다. 조선 왕릉의 고적하고 속에서 우러나오는 품위와 진수를 맛보고 싶다면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세종의 영릉보다는 효종(1619~1659)의 영릉을 추천하고 싶다.

세종의 영릉에서 700m 떨어진 곳에 있는 효종의 영릉은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쳐 버리는 왕릉이다. 비록 인적이 드물어 조용하지만 잘 다듬어진 정갈하고 기품 있는 숲이 살아 있는 왕릉이 바로 효종의 영릉이다.

영릉은 조선 최초로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이라는 왕릉으로 조성됐다. 효종이라면 문치 위주의 조선 사회에서 최초로 무를 중요시한 왕이다. 그 내막은 효종의 북벌론과 함수관계를 이룬다.

▲ 효종의 북벌 의지를 상징하는 무인석은 아이러니하게 청의 군사 형식 투구를 쓰고 있다.
ⓒ 한성희
효종의 북벌 추진책은 당시나 지금이나 무모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북벌이 성공하거나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더라면 오죽이나 좋았겠는가마는 효종 혼자 무리하게 추진하고 집착했던 정책이라는 것이 솔직한 얘기다.

왜 효종은 북벌에 집착했을까?

인조의 어리석음은 크게 두 가지 실책으로 집약된다. 기울어져 가는 명에 대한 사대주의 명분으로 광해군을 내쫓은 쿠데타와 현실을 외면한 노골적인 반청 감정으로 소현세자를 독살한 것이 그것이다. 두 가지 중 어느 것이든 한 가지만 안했어도,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효종과 소현세자는 같이 청에 볼모로 끌려가지만 두 왕자가 바라보는 국제적인 시각은 전혀 달랐다. 효종이 자신이 볼모로 잡혀와 온갖 굴욕을 당한 청에 대해 증오의 눈길로 청을 정복할 전략을 세웠다면, 소현세자는 청을 현실의 눈으로 인정하고 있었고 세계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러나 효종이 과연 청을 정복하기 위해 군사적인 전략을 세울 정도로 정세를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는지는 의문이 간다. 당시 다음 왕위 계승권은 소현세자에게 있었고 효종이 아무리 청을 정복할 꿈을 갖는다 해도 왕위에 오를 승산은 거의 없었기에 그리 치밀한 정략을 가질 위치는 아니었다.

▲ 조선국 효종대왕 영릉.
ⓒ 한성희
효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북벌을 하겠다는 조건이 전제되어야 효종의 꿈은 성립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소현세자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기에 효종에게는 그럴 가능성이 없었다. 따라서 청에서 볼모살이를 하는 효종이 북벌을 꿈꾸었다는 것은 잘못된 전제다. 효종이 청에 있을 때부터 북벌을 계획했다면 이는 이미 조정 대신들과 인조와 밀약이 있으며, 소현세자를 내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약조를 받은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인조와 집권층인 서인들은 노골적으로 반청 감정을 드러냈고 서인들의 이러한 태도는 민심을 조장하고 자신들의 집권을 안정화하려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서인의 반청 감정이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면, 소현세자가 귀국하고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효종이 즉위한 후 추진한 북벌에 계속 반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효종은 자신이 세자로 책봉되는 데 찬성하지도 않았지만 반대하지도 않았다. 효종이 죽고 나서 예송논쟁이 일어난 배경은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돌아갈 왕위가 효종 자신에게 돌아온 것에서 기인한다. 소현세자의 죽음이 정상적이었다면 소현세자의 맏아들을 왕세손으로 책봉해야 하나 인조는 10살의 어린 손자마저도 제주도로 유배 보내 죽게 한다.

이러한 과정을 겪고 정통성을 배제한 채 세자로 책봉된 효종이 살아남을 방법은 북벌론을 지피는 것이었으리라. 그것은 인조의 입맛에 맞기도 했고 조정의 세력과 부합되는 길이었으며 효종 자신의 뜻과 일치하는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왕에 등극한 후 북벌에 집착하는 효종에게 난관이 닥쳤다. 국가 재정이 따라 주지 않았고 숭명반청을 노골적으로 부르짖으며 소현세자를 청과 야합한 죽일 놈으로 매도한 조정대신들조차 반대했다.

▲ 영릉은 홍살문을 지나 참도 중간에 금천이 흐르고 있다.
ⓒ 한성희
물론 효종이 순진하게 착각하고 북벌을 추진한 이유도 있었다. 효종은 조선의 군사력은 크지 않으나 청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는 명나라 유민과 청에게 끌려간 수십만의 조선인들이 있으므로 일단 전쟁을 일으키면 이들이 적극적으로 동조할 것으로 믿었다. 그 판단이 과연 옳은지는 전쟁이 일어나 봐야 알 일이었지만….

대동법 실시는 기득권과의 싸움

효종이 북벌 계획에 소요되는 군비 확장 재원과 국가 재정을 마련하려고 대동법을 추진하지만 토지를 가진 양반과 기득권의 반발은 거셌다. 그러나 충청도에서 대동법을 실시한 결과 방납의 폐단이 줄어 들어 농민 생활이 안정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 재정도 충실하게 되었다는 것이 입증됐다.

▲ 금천이 앞에 흐르는 수복방.
ⓒ 한성희
이 대동법의 확장 실시는 효종 즉위부터 김육이 적극적으로 추진했기에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효종 9년(1658년) 전라도에서 대동법을 실시한 후, 효종이 충청도의 대동법에 관해 송시열에게 묻자 송시열도 대동법의 효과를 인정했다.

다시 말해서 기득권이 가진 재산을 세금으로 공평하게 내게 하는 대동법의 실시에 오랜 세월을 싸웠다는 것이고 왕이 대신에게 정책의 효과를 인정 받아야 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김육이라는 진보주의 정치가의 노력이며 왕 또한 진보주의자이고, 반대로 대립각을 세운 기득권 양반세력과 권신들의 보수주의자 벽을 깬 첫 번째 승리였다.

▲ 금천교는 돌다리가 두 개 겹쳐 있어 다시 수리한 흔적을 보여주며 이는 참도 중간을 흐르는 금천과 함께 영릉만의 특색이다.
ⓒ 한성희
없는 백성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고 가진 자에게 세금을 더 내라는 요지의 대동법을 확장 실시하는 데 오랜 싸움을 벌인 것은 조선의 왕조차 기득권의 표적이 됐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김육, 대동법 확장을 위해 노력한 이 정치가를 잊으면 안 된다. 그의 정신은 아들 김좌명에게 이어져 대동법은 경상도와 황해도로 확대 실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득권에게 세금을 더 내라는 정책이 나오면 아우성치고 지도자를 비난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효종의 의문사

1659년(효종10년) 3월 11일 효종은 송시열과 희정당에서 유명한 기해독대를 갖고 북벌의 의지를 확고히 밝히지만 송시열은 찬성의 뜻을 표하지 않고 애매한 입장을 유지하며 반박한다. 이때 송시열은 인사권을 가진 이조판서였고 송시열의 집안 송준길은 병조판서로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효종의 북벌에 사림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 사림의 영수 송시열의 도움과 지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두 송씨에게 병권과 인사권을 넘겨 주면서까지 북벌에 집착하던 효종은 독대 두 달 만인 5월 4일 41세로 갑자기 승하하고 만다.

효종이 과연 독살됐는가 하는 문제는 그 후의 정치 상황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 증거는 없다. 손 떨리는 수전증을 가진 신가귀라는 어의가 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에 침을 놓은 직후 피를 쏟고 죽었다는 사실뿐이다.

효종의 시신은 팅팅 부어 있었으며 관이 맞지 않자 송시열과 대신들은 널빤지를 덧대고 넓혀 왕의 시신을 관에 넣게 한다. 조선의 왕이, 수전증 의사에게 침을 맞고 죽었으며 관이 작다고 새로 마련한 관도 아닌 널빤지를 덧붙인 누더기 관에 들어간 것이다.

▲ 동계와 신계 외에 계단이 하나 더 놓인 영릉 역시 세종대왕의 성역화 덕분에 같이 정비해서 계단만 하나 더 얹었다.
ⓒ 한성희
1659년 10월 29일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장사 지냈고 현종 14년(1673년) 10월 7일 지금의 여주로 천장했다. 이때 능역 내의 민가 25호와 분묘 60여 기, 밭 5~6결을 모두 철수 시켰다.

효종의 능은 인선왕후(1618~1674)가 죽자 정혈에 묻는다는 풍수 이유로 동원상하봉이라는 특이한 왕릉이 된다. 위에 있는 효종의 능에는 곡장을 둘렀으나 인선왕후는 두르지 않아 부부가 같은 방을 쓴다는 것을 나타냈다.

북벌은 효종이 정통성의 약점을 안고 왕위에 오른 후 왕권 강화의 명분으로 남았고, 호란의 치욕을 씻고 명의 원수를 갚자는 숭명반청의 사상을 내세운 사림에겐 정치적 입지 강화의 명분이었다. 효종이 북벌론을 내세운 이면은 군사력 강화를 통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던 것이고, 이에 대해 송시열은 도학의 실천을 강조하여 왕권을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효종의 능에 서서 그 옛날 치열했던 왕과 사림의 정치 대립을 생각해 본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진 것일까? 효종의 독살설이 맞다면 효종의 패배였고, 독살이 아니더라도 그 후 북벌론이 허겁지겁 꼬리를 감춘 것으로 봐서도 효종은 승리하지 못했다. 효종이 죽자 강하게 몰아닥친 중국화 바람, 모화사상에서 그 해답이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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