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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장시기(45·영문학과) 동국대 영문학과 교수가 지난 13일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홈페이지에 올린 글 '전문'이다.

김일성은 위대한 근대적 지도자이다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은 한반도의 김일성을 위대한 근대적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인도의 간디, 쿠바의 카스트로, 이집트의 낫세르, 그리고 중국의 모택동처럼 김일성은 제3세계 국가들의 국민들이 우러러보는 세계적인 위대한 근대적 지도자의 반열에 아주 우뚝 서 있다. 그래서 이곳 아프리카인들은 한반도의 싸우스 코리아보다는 노쓰 코리아를 더 친근하게 생각한다. 카페에서 만난 미술가라고 자기소개를 한 어떤 아프리카인은 왜 코리안은 싸우스에서만 오느냐고 나에게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혼자서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어쩐 도리가 있겠는가?

근대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던 시대이다.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이곳 아프리카는 거대한 대륙 전체가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들이다. 그들의 근대적 경험은 오직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백인과 흑인의 이분법 속에서 백인 편에 있는 사람들은 나쁜 놈들이었고, 흑인 편에 있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1960년대부터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식민지에서 해방되기 시작했고, 이들의 해방전쟁에 도움을 준 나라들이 쿠바, 노쓰 코리아, 중국, 스칸디나비아 NGO 단체들, 그리고 구소련이었다.

1960년대 이후 아프리카 나라들의 독립에 가장 걸림돌의 역할을 한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은 마치 베트남 전쟁처럼 이전의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영국이나 프랑스를 대신해서 아프리카를 지배하려고 했다. 그들의 지배전략은 이전의 영국이나 프랑스 식민지하에서 성장한 아프리카인 독재 권력집단의 배후를 조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프리카 내부에서 성장한 독재 권력집단과의 싸움은 미국과의 싸움이었고, 그들보다 먼저 미국과의 싸움에서 아주 당당했던 김일성은 자신들의 지도자들만큼이나 존경스러운 먼 동양의 지도자였다. 나는 김일성과 같은 코리안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곳 아프리카인들에게 흡족한 대접을 받을 때마다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근대는 민족주의의 시대이다. 그것이 제국주의든지 실리적 자국주의든지 간에 민족주의는 근대를 지배한 고유한 사상이다. 영국인은 영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보고, 일본인은 일본을 중심으로 세계를 본다. 중국인은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보고, 아프리카인들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세계를 본다.

물론 이러한 근대성은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서구의 근대화 과정에서 세계 여러 나라들로 확산된 것이다. 서구의 여러 나라들이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로 세계를 보니까 그것에 피해를 받는 민족이나 나라들이 자신들도 자신들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근대의 틀 안에서 아주 공정한 입장에서 타 민족이나 국가와 비교하여 자기 민족의 역량과 한계를 파악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근대의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는 민족주의 때문에 근대의 풍경은 외부에서 더 잘 관찰된다고 한다. 강정구 교수의 한국전쟁에 관한 글은 학문이 지녀야 할 객관성, 즉 외부에서 바라보는 한반도의 근대적 풍경을 아주 잘 전달하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식민지에서 해방하여 서구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주체적인 민족국가를 달성하는 것은 모든 한반도인들의 꿈이었다.

그러한 당연한 민족주의의 꿈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아주 적나라한 친일행위 때문에, 혹은 친일 행위를 통한 부와 권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이웃에 살고 있는 같은 민족의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일본은 미국-일본 제국주의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자기네들의 섬나라로 밀려갔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대신해서 미국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에 들어왔다. 근대 민족주의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친일 대신에 친미를 할 수밖에….

싸우스 코리아이든 노쓰 코리아이든 모두 코리아라는 이곳 아프리카에서 바라보는 한반도와는 달리 한반도의 내부에서는 결코 한반도 전체를 볼 수가 없다. 이번 강정구 교수 필화사건을 빨갱이로 매도하거나 김일성 대학으로 가라고 협박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민족주의자라고 한다. 무식해도 이렇게 무식할 수가 있는가?

만일 한반도에서 만델라나 움베키 대통령을 빨갱이라고 욕하고 영국 식민지나 네덜란드계 백인의 독재를 그리워하는 아프리카인을 민족주의자라고 하겠는가? 미쳐도 한참 미친 아프리카인이라고 욕할 것이다. 더군다나 시대에 뒤떨어져도 한참 뒤떨어진 국가보안법을 토대로 구속 수사를 하겠다는 경찰이나 불구속 수사를 하라고 하는 천정배 국방장관은 미쳐도 한참 미친 한반도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한반도인이 아니라 일본인이거나 미국인, 혹은 일본이나 미국의 꼭두각시일 따름이다.

그러나 만델라의 등장 이후로 아프리카의 민족주의는 아프리카주의로 바뀌었다. 만델라와 만델라의 뒤를 이어 남아프리카 대통령으로 일하고 있는 움베키는 결코 민족이나 국가주의자가 아니라 아프리카주의, 혹은 세계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우리 아시아인으로 치면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불상 유적처럼 먼 사하라 사막에 있는 팀박투 유적을 보존하기 위하여 "팀박투 보존 사업"을 남아프리카 국가사업으로 지정하고,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남아프리카를 방문한다는 것을 거절하기도 했다.

그들은 또한 수단의 아랍계와 흑인계 내전에서 수단의 문화가 전통적으로 이슬람 문화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흑인계의 반란을 영국 식민주의자의 책동으로 보고 아랍계를 은밀히 지원하기도 한다. 아프리카인들은 비로소 만델라와 움베키를 통하여 근대적 지도자의 우상에서 벗어나고 있다.

한반도는 하나이다. 하나의 한반도 속에서 김일성은 가장 위대한 근대적 지도자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피의 동일성을 근거로 만들어진 민족주의의 근대는 끝나가고 있다. 이곳 아프리카인들은 아프리카에 사는 모든 사람들, 더 나아가 인류의 모태인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모든 유럽인, 아시아인, 그리고 아메리카인들을 모두 아프리카인이라고 부른다.

새로운 종족주의라고 욕하지 말라. 아프리카주의의 아프리카인들은 인종이나 성, 혹은 사상으로 차별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이 인류의 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유럽이나 아시아의 세계주의는 우리가 모르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지 몰라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근대화의 과정에서 노예와 식민지만을 겪은 아프리카인들의 아프리카주의는 전혀 음모가 없다.

이곳 아프리카인들은 만델라와 움베키를 통하여 비로소 근대의 민족주의를 극복했다. 한반도의 위대한 근대적 지도자 김일성은 이미 죽었다. 죽은 사람의 시대는 과거로 돌려야만 한다. 이제 한반도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은 이미 죽은 간디나 낫세르와 같은 근대의 민족주의 지도자가 아니라 살아서 인류의 미래를 만들고 있는 만델라나 움베키처럼 남과 북을 모두 포용하는 한반도주의와 아시아주의를 만드는 세계주의의 지도자이다.

이러한 지도자는 아주 당당하게 미국주의만을 고수하는 미국에 반기를 들 것이고, 미국을 도와 이라크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라크의 화려한 고대문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문화사절단을 보내야 할 것이다. 중국의 고구려 유적 훼손을 욕할 것이 아니라 고구려 유적을 보존하기 위하여 중국과 손을 맞잡고 고구려 유적탐사단을 국가적으로 조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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