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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이상 선생, 왼쪽엔 윤인숙씨가 꾸었다는 꿈을 표현한 그림
ⓒ 윤인숙
윤이상 그는 누구인가? 그는 경남 산청 출생으로 통영에서 자랐으며, 1956년 프랑스 파리국립음악원에서 공부했다. 1959년 독일에서 열린 다름슈타트음악제 때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 유럽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또 1967년 동베를린공작단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강제소환, 2년간의 옥고를 치렀으나, 세계음악계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풀려났다.

그는 1972년 뮌헨올림픽 개막축하 오페라 '심청'을 비롯,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여 영원하라',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분신한 사람들의 넋을 추모한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 북한국립교향악단이 초연한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등 15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렇게 음악활동을 하는 동안 그의 음악은 '서양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 또는 '한국음악의 연주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이라는 평을 받으며, 세계적인 음악가로 인정받았다.

그는 또 깊은 겨레사랑으로 '범민족통일음악회'의 산파 역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유로운 몸으로 남한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1995년 베를린에서 눈을 감았다.

"남쪽 학생에겐 노래를 시키지 않겠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이건용 총장은 윤이상을 이렇게 표현한다.

"윤이상은 큰 인물이다. 그래서 그 전체를 얘기하는 사람이 없다. 어떤 사람은 통일운동가로서의 그를 얘기하고, 어떤 사람은 작곡가로서의 그를 얘기한다. 또 다른 사람은 현대작곡가인 그를 주목하고, 다른 사람은 민족음악가인 그를 주목한다. 그의 대강을 짐작하기 위해서는 그러저러한 여러가지 관심들이 모여서 하나의 큰 전체를 이룰 때에야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만큼 그는 크다."

▲ 윤인숙씨
ⓒ 윤인숙
그런 그가 세상을 뜬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그동안 어둠의 한편에서 윤이상 선생을 그리며 고통의 세월을 삭인 이가 있다. 바로 윤이상의 수제자 윤인숙이다. 그니는 프랑크푸르트 음대에 유학중이던 1979년 가을, 당시 학교가 주최한 독일 현대음악제에서 윤이상의 '가곡'(1972년 작)을 부른 뒤 많은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다.

윤인숙씨는 성악 쪽에서는 윤 선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제자라고 한다. 처음 만나 가르침을 받은 뒤 윤 선생이 1995년 베를린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선생을 모셔왔다. 그 소프라노 윤인숙(단국대 초빙교수)씨가 스승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10주기를 맞아 오는 11일 저녁 7시 30분, 23일 늦은 5시 장충동 경동교회 여해문화공간에서 추모음악제를 연다.

그니는 말한다. "선생님의 친구인 크라우스 빌링 교수가 바로 윤 교수가 생각하는 그런 목소리라면서 선생님의 가곡을 부르라고 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만난 선생님은 남쪽 학생에겐 노래를 시키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자신처럼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대사관에 허락을 받아오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대사관은 선생님의 노래를 부르는 것에 냉담했어요."

그 과정에서 그니는 쇼팽은 폴란드, 차이코프스키는 소련 출신으로 모두 공산국가 사람인데도 괜찮은데 같은 민족인 작곡가가 시조를 가지고 작곡한 한 것이 왜 안 되냐고 따졌다고 한다. 이념과 전혀 관계없는 작품에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 찬양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되게 만든 분"

그리곤 그니는 노래 부르기를 강행했다. 이후 귀국했다가 여권을 다시 내주지 않아 출국을 못하는 등 많은 고통의 세월을 살아 왔다.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에 대한 찬양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되게 만든 분이 선생님입니다. 분명 이념을 가진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북한의 집권자들이 좋아서 북한에 간 것이 아니라 겨레를 위한 마음뿐이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 윤이상 선생의 음반 <초기 가곡과 심청 아리아>
ⓒ 신나라
그니에게 계속해서 인터뷰를 한다.

- 윤이상 선생이 윤인숙씨에게 요구한 음악적 특성은 무엇입니까?
"선생님은 늘 제게 '국악적, 한국적 색깔을 넣어 노래에 적용시켜라'라며 악보에 얽매이지 말고, 국악적인 패턴으로 노래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또 '그런 음악이 네 세대에는 빛을 못 볼지 모르지만 후대에는 분명 인정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음악은 우리 민족의 색채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뮤지컬에 적용하기 좋을 만큼 힘이 있고, 색채가 다양한 소리가 나옵니다."

- 윤이상 선생이 윤인숙씨에게 유독 사랑을 베푼 까닭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마 여러가지로 시련을 겪고 있을 때 나타나서 선생님의 노래를 불러준 것이 예쁘게 보였지 않겠어요. 남한 사람들이 모두 외면하고 있을 때 다가선 것이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목소리가 선생님의 민족음악의 성격에 잘 맞는다고도 하셨어요."

- 지금 많은 윤이상음악제가 열립니다. 그런 중에 굳이 다른 음악제를 여는 까닭이 무엇인가요?
"통영국제음악제 등 많은 음악제가 열리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작품을 잘 이해하여 노래할 수 있는 것은 저 윤인숙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런 음악제에 초청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 저승에서 선생님이 이것을 바라시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굳이 음악회를 여는 것입니다.

이 음악회는 단순히 연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음악과 영상을 통해 윤이상의 음악세계와 선생님의 예술적 진정성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선생님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우리 겨레를 끔찍이 사랑한 음악가임을 알리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한번에 되지는 않겠지만 꾸준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선생님이 남한에서 완전히 복권되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을 꾸는 것이지요.

저는 연주회 날 선생님의 영혼이 오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숙아 잘 해야 한다'며 채찍과 사랑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 까닭에 저는 선생님의 특별석을 만들 생각을 합니다."

▲ 윤인숙씨 음반, 우리는 하나 '윤인숙 민족 염원 성악곡집', 신나라
ⓒ 신나라
그러면서 그니는 꿈이야기를 들려준다.

"음악회 계획을 하고 진행하려니 돈이 없어서 난감했어요. 꼭 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선생님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날 밤 꿈에 황금색의 용인지 구렁인지가 저를 방까지 따라왔어요. 그런데 방에 들어와 보니 벽과 천장에 온통 파리투성이였어요.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그 용이 파리를 모두 잡아먹고 나갔어요.

그 꿈을 꾼 다음 날부터 생각지도 못하던 분들이 도와줘서 빚 한 푼 없이 음악회를 하게 됐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의 동생 윤동화 여사가 '그거 오빠가 와서 도와준 것이야, 이제 인숙이 앞에 어려움은 없겠다'란 말씀을 하셨어요."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대학에 가려고 할 때 형편이 어렵던 저는 돌아가신 김대근 교수님께 무료지도를 받았기에 성악과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그런 은혜를 갚고 싶어요. 음악을 배우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눈물을 흘리는 학생들을 위해 방만 마련된다면 무료지도를 할 것입니다. 또 민족성악연구소를 만들어 서양발성에 준한 우리 음악, 특히 윤이상 음악을 보급할 의무를 저는 가집니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조국, 고향땅 결국 못밟아...

그니는 선생이 세상을 뜬 지 10년이 지났지만 꼭 선생과 함께 있다는 생각으로 이야기하고 노래한다는 느낌을 준다. 윤인숙씨는 '선생님의 영전에 추모의 노래를 바치며'라는 글을 프로그램에 올리고 있다. 여기에 윤이상 선생의 친동생인 윤동화 여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윤 여사는 일제강점기 때 형무소에 수감된 선생을 어린 나이에 뒷바라지한 이후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늘 곁에서 지켜드렸다고 한다. 윤 여사에게 전화를 했다.

- 윤 선생님이 세상을 뜨신 지 10년이 되었는데 가슴 속에 남은 얘기는 있는가요?
"오빠는 제가 시집간 이후에도 자주 부르셨어요. 어렸을 때부터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를 했던 것이 그렇게 만든 것이겠지요. 그래서 한번 오빠에게 가면 6달에서 1년까지도 있다오곤 했기 때문에 제 가정은 엉망이 될 정도였어요. 돌아가시기 2달 전 오빠에게 가있다가 제가 너무 아파서 가지 말라는 손을 뿌리치고 귀국을 했었는데 그게 마지막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그리워하시던 조국,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가셔서 얼마나 가슴이 메어지는지 모릅니다. 내가 몸이 아팠어도 오빠 곁에 머물며 보살펴드려야 했을 것을…."

▲ 인터뷰하는 윤인숙씨
ⓒ 김영조
- 윤 선생님과 윤인숙씨와의 관계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던데….
"그건 제가 잘 압니다. 오빠가 친북인사로 몰려 고초를 당하고 있을 때 남한 사람들은 아무도 곁에 오려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윤인숙은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오빠 집에 드나들며, 공부도 하고,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그러니 오빠가 예뻐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둘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 외에는 없습니다. 괜한 오해들을 하는 것입니다."

잠깐의 전화 인터뷰였지만 윤동화 여사는 감회가 북받치는 듯 말을 잘 있지 못했다. 하지만 오빠에 대한 안타까움이 사무치고 있었고, 윤인숙씨에 대한 생각은 분명한 듯 잘라 말했다.

프로그램에 인사말을 쓴 윤이상 선생의 주치의 최형주 체질의학연구회 회장(명성한의원 원장)의 이야기도 들어보기로 했다. 그는 깊은 병에 고생하던 윤 선생을 사상의학으로 치료하여 좋은 효과를 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KBS-TV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의 원작 소설가이기도 하다.

"윤이상 선생은 독일에도 주치의가 4명이나 있었고, 평양의 의료진들도 적극적으로 치료에 가담했지만 '심인성기관지천식'과 '신부전증'이 심해 모두가 손을 든 상태에서 저를 불렀습니다. 가보니 숨이 차서 눕지도 앉지도 못할 정도로 중증이었지요. 진료를 해보니 한의학으론 '간열폐조증'이란 병으로 간의 열이 폐를 상하게 만든 것이었는데, 윤 선생의 체질은 태음인이었습니다.

이후 사상의학 치료를 계속한 결과 먼 길도 잘 걸으셨고, 음식도 잘 드실 정도로 호전이 되었으며, 기동도 못하시던 분이 평양과 일본에도 갈 정도였지요. 그런데 갑자기 돌아가신 까닭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들은 말로는 지압치료를 받은 것이 문제였다고도 합니다만 어쨌든 우리 겨레를 끔찍이 사랑하시던 세계적인 음악가가 허망하게 세상을 뜬 것이 못내 안타깝습니다."

곁에서 병 치료를 해왔던 한의사의 가슴 아픈 기억이었다.

▲ 윤이상 선생
ⓒ 윤인숙
윤인숙씨는 그저 음악 밖에 몰랐던, 순진한 학생이었던 사람이 한 스승 때문에 고통의 세월을 살았다는 원망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 일 때문에 난생 처음으로 통일, 민족 문제에 대해 눈을 뜨게 됐으며, 선생님의 진정한 음악세계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니는 스승에 대해 "음악은 물론이거니와 연극, 무용, 건축, 사회 등 내 머리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박식하셨던 분이며, 엄격하지만 정이 많고, 한번 결정하면 손해를 보더라도 끝까지 책임지는 성격이었다"고 눈을 감으며, 회고했다. 가장 안타까운 건 그토록 그리워하시던 고향 땅 통영을 밟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이라도 말한다.

이번 공연에서 연주할 곡목들은 작품 중 초기 가곡들과 실내악 곡, 오페라 '심청'의 아리아 등이다. 특기할 것은 윤 선생의 육성 영상 및 1990년 범민족 통일음악회 참가 영상과 함께 추모의 춤 살풀이도 선보인다. 또 이 연주회엔 허윤정(거문고), 강은일(해금), 유경화(철현금, 장구), 원완철(대금, 훈), 남상일(장구), 유은선(신시사이저), 신정희(피아노), 이주희(춤) 등이 함께 출연한다.

이 문화의 달, 10월에 윤이상 선생의 제자 윤인숙씨는 선생이 세상을 뜬지 10돌을 맞아 추모연주회를 연다. 그니는 무대 바로 앞에 윤 선생의 영혼을 위한 특별석을 만든다고 한다. 정말 윤 선생의 넋이 오셔서 그니에게 용기와 사랑의 채찍을 주시리라 믿는다. 그리하여 윤이상 선생은 우리에게 영원한 민족음악인으로 복권되리라. 아! 윤이상!

덧붙이는 글 | 공연문의 ☎02-335-1662 

참말로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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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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