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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MP3 플레이어 종주국"

▲ 심영철 유리온 대표
ⓒ 월간PC사랑
심영철 유리온 대표의 눈이 반짝였다.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MP3 플레이어 열풍이 한국에서, 그것도 자신의 손에서 영글었다는 자부심이 얼굴 가득 피어올랐다. 때로는 힘들고 막막했지만, 돌이켜보면 더없이 자랑스럽고 뿌듯한 경험이었다.

그의 시선이 어느새 98년으로 거슬러갔다. 그해 2월, "MP3 파일을 재생하는 휴대용 플레이어가 국내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되었다"는 소식이 몇몇 언론을 통해 싱겁게 전해졌다. MP3 파일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때였으니 MP3 플레이어가 나왔다는 소식이 큰 뉴스거리가 될 리 없었다. 겨우 "디지털캐스트와 새한정보시스템(지금의 엠피맨닷컴)이 공동 개발했다"는 내용이 덧붙었을 뿐이다.

SW 개발자에서 MP3 기획자로

"MP3 플레이어 역사는 그렇게 조용히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은 최고의 히트 상품이지만 당시에는 뉴스거리도 되지 않았지요. MP3 플레이어를 만들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열풍이 지구촌에 불어닥치고 있습니다."

심영철 대표가 MP3 플레이어와 인연을 맺은 것은 97년 다우기술에서 디지털캐스트로 옮겨오면서다. 대학친구이자 다우기술의 동료였던 황정하 사장이 96년 디지털캐스트를 창업한 뒤 함께 일하자고 손짓했고, 그는 흔쾌히 응했다.

"당시 디지털캐스트는 푸시 기술(push technology, 인터넷에서 정보를 네티즌들에게 전달하는 기술)을 비롯해 여러 가지 인터넷 기술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보편화되었지만 그때는 대단히 생소했던 IP 네트워크 팩스를 만들었고 음성을 전달하는 프로젝트도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MP3 파일을 휴대용 기기로 들으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나왔다. 90년대 말은 인터넷과 함께 MP3 파일이 서서히 관심을 모으던 때였다. 음질은 WAV 파일과 비슷하면서 용량이 훨씬 적은 장점을 앞세워 PC통신을 중심으로 조금씩 퍼지고 있었다. 아이디어는 괜찮았지만 개발비가 만만치 않았다.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디지털캐스트만으로는 상품화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새한정보시스템과 인연이 닿았다. 새한그룹에서 독립한 뒤 SI(system integration) 업체로 활동하던 새한정보시스템은 디지털캐스트의 아이디어에 큰 기대를 걸고 선뜻 손을 내밀었다.

"새한정보시스템이 개발비 절반을 대고 생산, 마케팅, 판매를 맡기로 하면서 디지털캐스트는 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초'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난관은 "디지털 파일을 어떻게 재생할 것인가"였다. 처음에는 반도체를 이용할 생각으로 회로를 설계했지만 쉽지 않았다. 크기를 줄이고 배터리 수명을 늘리면서 디지털 파일을 원음에 가깝게 재생시키는 회로 설계는 곧 벽에 부닥쳤다.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시간만 까먹고 있었다.

로직 문제로 초기 개발 힘들어

"그러다가 우연찮게 미크로나스(micronas)라는 독일 회사가 DSP(digital siginal processor)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MP3 파일을 위성으로 방송하는 칩이었는데, 이것을 이용하면 회로 설계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여기고 황 사장이 독일로 날아갔습니다."

미크로나스는 TV를 비롯한 가전제품에서 쓰는 부품을 만드는 회사였다. 황 사장은 공장 구석에서 4명의 연구진이 DSP 칩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미크로나스는 자신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칩으로 "MP3 플레이어를 만들겠다"는 한국인들을 의아하게 여겼다.

MP3 플레이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뿐 아니라 휴대용으로 만든 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황 사장이 부품을 주문했지만 미크로나스의 반응은 여전히 미적지근했다.

"아마도 그들은 우리가 사기를 치는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물건만 챙기고 달아날지 모른다는 걱정 말입니다. 입금을 하자 그제야 부품을 보내더군요. 다행히 DSP 칩은 그렇게 우리를 괴롭히던 회로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주었습니다."

DSP 칩으로 고비를 넘겼지만 인터페이스도 골칫거리였다. 아직은 USB가 대중화되지 않아서 패러렐 포트를 쓸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 포트가 PC에서 프린터로 데이터를 보내는 단방향이라는 것이었다. MP3 플레이어는 양방향이어야 하므로 이를 위한 칩을 개발하느라 애를 먹었다. 이 과정에서 전류가 거꾸로 흘러들어가서 PC를 망가뜨리는 위험도 없애야 했다.

그렇게 1년 남짓 고생한 끝에 98년 2월 세계 최초의 MP3 플레이어 '엠피맨'이 탄생했다. 엠피맨은 손바닥 크기에 무게가 65g였다. 메모리는 16, 32, 64MB 3가지로 기껏 노래 10여곡을 담을 수 있었지만 값은 각각 24만6천원, 33만7천원, 51만9천원으로 비싼 편이었다.

'최초'라는 의미가 컸던 만큼 시장의 냉랭한 반응은 실망스럽지 않았다. 이제 겨우 첫 발을 내디뎠을 뿐이어서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정작 문제는 디지털캐스트와 새한정보시스템의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것이다.

"막상 사업을 시작하니 새한정보시스템만 부각되고 디지털캐스트는 뒷전으로 밀리는 분위기였습니다. 아무래도 생산과 판매를 맡은 새한정보시스템이 개발실에 매여 있는 디지털캐스트보다는 부각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대로는 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새한과 결별, 그리고 위기

결국 두 회사는 갈라섰다. 새한정보시스템은 이후 엠피맨닷컴으로 이름을 바꾸고 'MP3 플레이어 원조'라는 타이틀을 적극 앞세우며 경쟁력을 쌓았다. 2001년에는 'MPEG 방식을 이용한 휴대용 음향 재생장치와 방법'으로 MP3 플레이어 원천 기술 특허를 따내면서 국내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을 견디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걷다가 2004년 레인콤에 인수되었다.

새한정보시스템과 결별한 디지털캐스트는 엠피맨의 후속작인 '엠피맨 엠피스테이션'으로 홀로 서기를 시작했지만 이번에도 돈이 발목을 잡았다. 투자를 받으려고 숱하게 발품을 팔았지만 반응은 썰렁했다. 엠피맨이 나오긴 했지만, MP3 플레이어는 투자자들에게 여전히 실험적인 제품이었다.

대부분은 "경험 없는 젊은이들이 말도 안 되는 제품을 만들어서 팔려고 한다"고 쏘아붙였다. 어떤 투자자는 "이 제품이 성공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며 고개를 저었다. 한결같이 "그렇게 좋은 제품이라면 왜 일본이나 미국에서는 만들지 않느냐"고 비꼬았다.

"IT 전문가들은 컨텐츠(노래)를 담는 미디어가 LP에서 CD로, 그리고 메모리로 바뀔 것이라는 예상은 모두 하고 있었습니다. MP3 플레이어는 그런 흐름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지요. 미국이나 일본도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먼저 성공했을 뿐입니다."

투자를 받지 못한 채 개발은 마무리되었다. 금형까지 파놓은 상태에서 찍기만 하면 되었지만 "돈이 바닥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던 차에 OO전자에서 연락이 왔다. 가뭄 끝의 단비였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OO전자는 우리 제품을 원가 이하로 납품하라고 하더군요. 그럼, 우리는 뭘 먹고 사느냐고 했더니 '납품 확인서를 써 줄 테니 그것으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라'더군요. 대기업의 횡포가 얼마나 무서운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눈앞은 막막했다. 월세는 몇 달째 밀렸고 전화요금을 내지 못해 사무실 전화는 끊길 판이었다. 4, 5개월째 월급을 받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된 직원도 있었고 몇 명은 회사를 떠났다. 막다른 길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나날이 답답하게 이어졌다. 운명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때였다.

다이아몬드에 매각되면서 미국 진출

"미국의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인데 만나보고 싶습니다."

한국인이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전에도 비슷한 전화가 많았기 때문이다.

"브로커들이 전화해서 자기가 투자자를 알아봐줄 테니 지분을 달라는 내용이었지요. 이번에도 그런 브로커 중 한 명이겠거니 생각했습니다."

며칠 뒤 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한국으로 직접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의 공동 창업자인 허형회 부사장이었다. 다이아몬드는 재미교포 사업가인 이종문씨가 80년대 세워 연간 7억달러(9천억원 규모)의 매출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그래픽카드 업체였다.

며칠 뒤 허 부사장을 비롯한 4명의 다이아몬드 직원이 디지털캐스트를 찾았다. 그리고 그날 전격적으로 인수가 결정되었다.

"알고 보니 다이아몬드도 MP3 플레이어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엠피맨을 보고 새한정보시스템에 접촉했지만 개발자가 디지털캐스트라는 것을 알았지요. 다이아몬드는 우리 회사를 270만달러(40억원)에 사들이는 한편 기술 개발에 2천만달러(260억원)를 추가 투자하면서 MP3 플레이어에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이아몬드는 하루 빨리 제품을 내놔서 미국 시장을 선점하고 싶었고, 디지털캐스트는 돈이 궁했다. 결국 두 회사의 요구가 맞아떨어져서 속전속결로 합병이 이뤄진 것이다.

미국 회사에 흡수되긴 했지만 디지털캐스트는 한국에서 기획과 개발을 독자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다. 대신 다이아몬드는 생산과 판매를 책임졌다. 4개월 뒤 '엠피맨 스테이션'이 이름만 '리오 300'으로 바뀐 채 미국 시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리오 300은 첫번째 제품과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엠피맨은 내장 메모리만 갖췄지만 리오는 외장형 스마트 메모리를 썼고 패러렐 케이블도 휴대하기 편하게 작고 가볍게 만들었습니다. 요즘 제품들이 기본으로 쓰는 휠을 최초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리오는 10만대 이상 팔리면서 미국 시장의 90%를 장악했다. MP3 플레이어 시장을 이끌겠다는 다이아몬드의 꿈이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리오가 채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사라질 뻔한 기억은 지금도 아찔하다.

리오의 현지화 작업이 한창이던 1998년 10월12일, 미국음반협회(RIAA)는 다이아몬드를 상대로 저작권 침해 소송을 걸었다. '홈 오디오 재생기기 법'(AHRA)을 근거해 리오가 음반 불법복제를 조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캘리포니아 지방법원은 10월29일까지 리오의 판매를 금지했고, 11월 출시를 계획했던 다이아몬드는 비상이 걸렸다.

RIAA 소송 이겨 극적인 부활

"AHRA에 참여했던 전문가들까지 나서서 간신히 소송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리오가 PC에서 파일을 내려 받기만 하므로 불법복제와는 거리가 멀다는 이유도 한몫했지요. 만약 그때 졌다면 지금처럼 화려한 MP3 플레이어 시대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는 기세를 몰아 리오 2탄을 내놓았다. 디지털캐스트가 다이아몬드에 합병되면서 후속 제품으로 기획했던 '리오 500'이 1999년 여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 제품은 세계 최초로 USB 인터페이스와 백라이트를 썼다. 인터페이스를 패러렐에서 USB로 바꾼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속도였습니다. 패러렐은 노래 하나를 받는 데 수분이 걸리지만 USB는 수십 초면 끝납니다. 둘째는 PC는 물론 매킨토시에서도 쓸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는 의도였지요."

매킨토시를 겨냥한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리오 500은 이듬해 맥월드 전시회에서 '혁신상'을 받는 등 매킨토시 진영에서도 환영받았다. 심 대표는 "이때부터 스티브 잡스가 MP3 플레이어를 만들겠다고 결심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99년 접어들면서 MP3 플레이어 업체들은 빠르게 늘었고 경쟁은 한층 치열해졌다. 한국에서는 엠피맨이, 미국에서는 리오가 일으킨 바람이 결국 태풍이 되어 지구촌을 휩쓸기 시작했다. 심 대표는 리오 500의 후속작을 기획하다가 느닷없이 진로를 바꿨다.

"하드웨어가 늘어나면 자연스레 컨텐츠 시장이 커질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다행히 이 아이디어를 미국 본사가 받아들였지요. 다이아몬드에 인수되었던 디지털캐스트는 99년 4월 리오포트로 이름을 바꾸고 디지털 컨텐츠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2000년 초 다이아몬드로부터 분사한 리오포트는 MTV, 오크벤처캐피탈, 벌컨 등으로부터 3천만달러(약 360억원)를 유치 받고 하드디스크 업체인 퀀텀, 미쓰비시, MS 등으로부터 3100만달러(약 370억원)를 증자 받아 온라인 음악 시장을 개척해나갔다.

리오포트가 분사할 즈음 다이아몬드는 S3에 합병되었고 얼마 뒤 '소닉블루'로 바뀌었다. 미국 시장에 MP3 플레이어를 알린 '리오'는 소닉블루에서 일본 D&N 그룹에 넘어갔다가 최근 시그마텔이라는 반도체 회사에 다시 팔렸다.

유리온으로 컨텐츠 시장 개척

디지털 컨텐츠에 대한 심 대표의 도전은 레인콤 자회사인 유리온에서도 계속된다. 99년 리오 500의 후속작으로 CDP를 기획했지만 기술력이 받쳐주지 않아서 OEM 생산을 검토했던 그는 CDP 업체를 수소문하던 중 레인콤의 양덕준 대표를 만났고, 그 인연으로 2003년 8월 유리온의 대표이사로 스카웃되었다.

멀티미디어 컨텐츠 전문 업체인 유리온은 2004년 4월 80만개의 음원을 확보한 엔터테인먼트 사이트 '펀케이크닷컴'(www.funcake.com)을 열면서 온라인 유료 시장에 뛰어들었다. 펀케이크닷컴은 모든 컨텐츠에 복사 방지 솔루션인 디지털저작권관리(DRM)를 써서 눈길을 끌었다.

"멀티미디어의 경쟁력은 컨텐츠와 서비스입니다. 레인콤이 유리온을 만든 것도, 그동안의 경험에서 깨달은 것도 컨텐츠가 핵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아직은 소비자들이 유료화에 적응되지 않았지만 조만간 시장이 커질 것입니다. 한류 열풍으로 입증된 한국의 우수한 컨텐츠를 올해 말에는 일본, 내년에는 아시아 12개 나라에 선보일 계획입니다."

MP3 플레이어로 시작한 그의 발걸음이 어느새 디지털 컨텐츠에 이르렀지만 디지털캐스트 시절의 기억들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세계 최초로 MP3 플레이어를 만들고 그 파도를 미국까지 이어갔던 디지털캐스트.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냉대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열정과 패기가 결국 신화를 일군 것이다. 이제 디지털캐스트의 주역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심 대표는 아직 그 열풍의 한 가운데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PC사랑 10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이정일 기자는 PC사랑에서 취재부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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