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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시 팔봉면 진장리와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의 경계 지점인 태안 굴포운하 유적지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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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개 '명소(名所)'라고 하면 '풍광'을 떠올린다. 경치 좋은 곳만이 명소인 줄 안다. 또 명소라고 하면 말 그대로 이름난 곳, 널리 알려진 곳을 이르는 말인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자연 명소의 제1 조건은 경치일 터이지만 경치나 풍광만이 명소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경치는 별스럽지 않거나 아예 없어도 역사적 사연을 깊이 간직하고 있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자연 명소들도 우리 주변에는 있다. 어쩌면 역사적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곳들이 더욱 귀한 자연 명소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충남 서산시 팔봉면과 태안군 태안읍 사이에 있는 '굴포운하(掘浦運河)'와 팔봉면 진장리에 속해 있는 '신털이봉'을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한다. 서산과 태안의 굴포운하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편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쉽게 알아볼 수도 있다. 하지만 굴포운하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신털이봉은 아직 인터넷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 바닷물이 흐르는 곳이 될 뻔했던 서산시 팔봉면 진장리의 판개논
ⓒ 지요하
여러분을 우선 태안읍 백화산으로 안내한다. 백화산 정상에 올라 동쪽을 향하고 서 보자. 시선의 각도를 많이 틀지 않더라도 왼쪽으로는 가로림만이, 오른쪽으로는 천수만이 보일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가로림만과 천수만, 두 바다 사이가 멀지 않다는 것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시대의 일차 간척공사와 1982년에 물막이 공사가 완료된 대규모 간척 사업으로 말미암아 현재는 천수만 바닷물이 멀리로 물러나 있지만, 옛날에는 태안읍 인평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백화산 정상에서 동쪽 방향으로 훤히 보이는 인평저수지도 옛날에는 바다였다.

팔봉면 어송리의 가로림만 바닷물도 지금은 조금 물러나 있지만 지금의 어송 저수지 일대가 다 바다였다.

팔봉면 어송리의 가로림만 바닷물과 태안읍 인평리의 천수만 바닷물은 오랜 세월 갯내음과 해조음을 서로 보내고 나누며 지내왔다. 바닷새들은 두 바다 사이를 손쉽게 왕래했다. 좁은 뭍에서 사는 주민들은 하루는 가로림만으로, 또 하루는 천수만으로 가서 갯것들을 잡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바닷물의 거리가 정확히 7km, 20리도 되지 않기 까닭이었다.

정말 팔봉면 어송리의 가로림만 바닷물과 태안읍 인평리의 천수만 바닷물은 가까웠다. 백화산에서 양손을 뻗어 두 바닷물을 붙잡아 오므리면 그대로 붙어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다. 오늘날 두 바닷물을 맞닿게 하기로 들면, 그건 일도 아닐 것이다. 다이너마이트 몇 개 터뜨리고 중장비 동원해서 밀어붙이면 한 달 공사나 될까.

▲ 수목이 뒤덮여 음침하게도 느껴지는 판개 골짜기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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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너마이트도 중장비도 없던 시절, 두 바닷물을 서로 맞닿게 하려는 공사가 고려 시대부터 여러 번 있었다. 그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쉽고 안전한 바닷길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옛날 나라의 재정은 대부분 세곡(稅穀·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이 농사를 지어 나라에 바치는 곡물)으로 충당했다. 고려 시대에는 대략 한해 40만 석의 세곡미가 나라 재정의 기본이었다. 그리고 개경으로 보내지는 전체 세곡미 40만 석 중에서 약 30만 석이 충청·전라·경상도 등 삼남에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삼도의 세곡미를 실은 배들이 황해를 거슬러 올라갈 때 태안반도의 안흥량 관장목을 통과하는 일이 큰 문제였다. 암초에 부딪혀 번번이 난파를 당하곤 했다. 안흥 앞바다 관장목은 효녀 심청이 몸을 던진 인당수가 있는 황해도의 장산곶과 더불어 황해에서 가장 험한 뱃길이었다.

암초가 많은 안흥량 관장목을 피할 수 있는 뱃길을 찾자니 천수만과 가로림만 사이를 가로막은 좁은 땅을 파서 운하를 만드는 안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 제17대 인종 12년(1134) 드디어 첫 번째 공사가 시작되었다. 고려 조정은 내시 정습명을 보내어 군정(軍丁) 수천 명을 동원하여 4km 정도의 땅을 파서 수로를 만들었다. 그러나 나머지 3km 정도는 암반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오랫동안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공양왕 3년(1391) 당시 실권자였던 이성계가 세곡 조운(漕運)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왕실 인물인 왕강으로 하여금 다시 공사를 시행토록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고려 말의 충정왕 때부터 공양왕 때까지 약 40년 동안은 나라의 재정이 말이 아니었다. 조운로 공사 실패와 세곡 조운선들의 난파, 거기다가 왜구들의 조운선 약탈 등이 겹쳐 조정의 관리들에게 녹봉조차 줄 수가 없었다. 계속되는 세곡미 운송 부진으로 왕도 하루에 한 끼를 겨우 먹을 정도였다. 그것은 결국 나라의 쇠망으로 이어졌다.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는 다시 세곡 조운로 건설의 필요성을 느끼고 최유경과 남윤을 파견하여 태안 굴포운하 공사의 가능성을 조사했다. 그리고 제3대 태종 12년(1412) 하륜의 발의로 다시금 대규모 공사가 시행되었다.

▲ 가운데로 보이는 소나무산이 '신털이봉'이다. 그 너머로 팔봉산이 보인다.
ⓒ 지요하
태종 3년(1403)에 세곡 조운선 34척이, 태종 14년(1414)에는 66척이 안흥량에서 난파를 당하여 많은 세곡은 물론이고 300여 명에 달하는 인명을 잃었으니, 태안 굴포 공사는 참으로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이었다. 많은 세곡을 그렇게 어이없이 바다에 수장을 해버리면 백성들에게 더 많은 부담이 돌아가니, 태안 굴포 공사는 백성 모두가 깊이 바라는 일이었다.

태종 16년(1416) 2월에는 태안에 강무장(講武場)을 설치하고 임금이 세자 충령대군(세종대왕)을 데리고 이곳을 방문하였는데, 굴포운하 공사를 직접 살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공사도 암반 때문에 어려움이 있자 하륜의 건의로 5개의 저수지를 만들어 일단 개통을 시켰다. 그러나 배의 세곡을 여러 번 옮겨 싣는 어려움 때문에 그 방법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 후에도 태안 굴포운하 공사는 제7대 세조 7년(1461) 신숙주의 건의로 3년 동안 계속된 일이 있고, 11대 중종 16년(1521)에 다시 타당성을 검토한 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계획이 중지되었고, 18대 현종(1660-1674)때에도 공사가 시행된 일이 있었다.

하지만 태안 굴포운하 공사는 고려조 인종 12년에서 조선조 현종 10년에 이르기까지 장장 535년 간에 걸쳐 10여 차례나 실시한 공사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 가까이에서 본 신털이봉. 태안 굴포운하 공사의 눈물겨운 사연이 어려 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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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시 팔봉면 진장리와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 사이에는 굴포운하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두 동네의 경계 지점에 남아 있는 1km 정도의 흔적은 저수지식(갑문식) 운하지의 흔적이다. 이 운하지는 수에즈운하(1669)와 파나마운하(1914)보다 약 500년이나 앞서는 것이며, 우리나라 거대 토목공사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유적지이다.

주민들은 음침하게도 느껴지는 깊은 골짜기를 '판개'라 부르고 그 앞의 논을 '판개논'이라고 부른다. 굴포는 판개, 즉 '땅을 파서 만든 개'라는 뜻이다.

팔봉면 진장리에는 '신털이봉'이라 불리는 작은 야산이 있다. 1천 평 정도 되어 보이는 소나무로 덮여 있는 산이다. 작은 야산이지만 이 산은 신털이봉이라는 확실한 이름을 갖고 있다. 작은 야산이 확실한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게 어디 흔한 일인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오랜 세월 거듭된 굴포운하 공사 때문에 생긴 산이다. 공사가 시행될 때 인부들이 짚신에 묻은 흙을 털어서 생긴 산이라는 것이다.

인부들은 휴식을 할 때, 또 밥을 먹으러 갈 때 지정된 곳에 가서 짚신을 털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인부들이 계속 짚신에 묻은 흙을 그곳에 가서 터니 어느덧 흙무더기들이 생기고, 또 그 흙무더기들이 산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때에 이르러서는 신털이봉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 끝내 실패로 돌아간 태안 굴포운하 공사의 눈물겨운 사연을 안고 있는 신털이봉 너머로 무심한 팔봉산의 가을 모습도 보이고
ⓒ 지요하
신털이봉에는 장장 535년에 걸친 태안 굴포운하 공사의 눈물겨운 사연이 어려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굴포운하 공사를 완성하려는 열망, 한 줌의 흙이라도 더 옮기려는 간절한 마음으로부터 신털이봉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신털이봉의 존재는 당시의 절박했던 사정을 절로 느끼게 한다. 그것을 생각하면 신털이봉 앞에서 숙연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독자 여러분을 다시 백화산으로 안내한다. 백화산의 중턱에는 '낙조봉'이라는 곳이 있다. 서해의 낙조 풍경을 즐기기 좋은 곳이다. 그곳에는 낙조봉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는데, 조선조 초기의 유명한 인물인 범옹(泛翁) 신숙주(申淑舟)의 시 한 편이 적혀 있다. 신숙주가 백화산 낙조봉에 올라 지은 시이기는 하되 백화산의 풍치를 읊은 시는 아니고, 태안 굴포운하 공사와 관련하는 시임을 알 수 있다.

신숙주는 태안 굴포운하 공사와 관련하여 태안에 와서 오래 머무는 중에 백화산에도 올라 풍치를 감상하고 시를 지었던 것 같다. 신숙주의 '풍회도서 미경랑(風回島嶼迷驚浪)'이라는 시를 '덧붙이는 글'에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친다.

덧붙이는 글 | 범옹 신숙주의 시 '풍회도서 미경랑(風回島嶼迷驚浪)'


영상고성낙조변(嶺上孤城落照邊)
등임지견해부천(登臨只見海浮天)
운운지벽민거생(云云地僻民居生)
담인포굴기년공(淡姻浦掘幾年功)
미효산래일대단(未效山來一帶斷) 
유연수능설아통(猶蓮誰能說我通) 


【해설】 

고개 위에 외로운 성 낙조가에 서 있는데 올라서 바라보니 다만 저 바다 하늘에 떠오르는 듯 보인다 바람 불어 돌아가는 도서가 놀란 물결에 희미하고 땅이 궁벽하니 민가에선 묽은 연기 피어오르네 포를 판지 몇 해에 공을  이루지 못했던고 뉘 능히 나에게 조운 통하는 계책을 말해 주려나 다만 술주 사람 앞에서 취하여 망연히 잊고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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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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