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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읍 평천리 일제 시대 제방에서 바라본 천수만 B지구의 드넓은 들판 풍경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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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읍 백화산에서 천수만 쪽을 바라보면 옛날엔 바다였던 곳들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농경지가 된 땅 위에 지금은 건물들도 많이 지어져 있지만, 어디까지가 바다였을지 식별이 가능하고, 더 나아가 옛날엔 태안의 풍경이 지금보다 얼마나 더 아름다웠을까도 능히 유추할 수 있게 된다.

내 소년 시절에는 태안에서 서산으로 가는 큰길을 일러 신작로(新作路)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새로 만든 길이라는 뜻인데, 일제 시대에 만들어져서 그렇게 부른 것이 내 소년 시절에까지 이어져 온 셈이다.

태안읍 동문리에서 평천리를 거쳐 인평리로 이어지고 서산 땅으로 넘어가는 그 길이 그러니까 옛날에는 바다였다는 얘기다. 인평리 저수지 아래 농경지 가운데에 지금도 있는 제방이 일제 때 만들어지면서 평천리의 너른 들이며 인평 저수지가 생겨났던 것이다.

▲ 뜬바위섬에 세워져 있는 상징석
ⓒ 지요하
태안읍 동문리 주공아파트 근처 동네의 이름은 '정주내(碇舟川)'이다. 일제 때 방조제(防潮堤)가 축조되기 전까지는 주공아파트 근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배들의 출입이 빈번했다. 따라서 정박하는 선박들이 많았으므로 말 그대로 배들이 닻을 내리고 머무는 내라 해서 정주내라는 동리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런 사실들을 미리 알고 백화산에서 천수만 쪽을 바라보면 옛날엔 바다였던 곳들의 풍경이 새롭게 느껴질 것이다. 태안 읍내의 겨드랑이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오고 배들이 정박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도 느껴질 터이고….

천수만(淺水灣)은 말 그대로 물이 얕은 바다다. 물이 얕은 데다가 여기저기 암초도 많았다. 그런 얕은 바다에 어떻게 큰 배들이 왕래를 하고 정주내까지 들어올 수 있었을까? 그것은 '적돌강(積乭江)' 덕분이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이름이지만, 태안읍 남문리 정주내로부터 시작해서 서산시 부석면 갈마리 앞바다로 이어지는, 천수만의 큰 갯고랑을 일러 적돌강이라고 했다.

천수만 얕은 바닷물 가운데서도 큰 갯고랑인 적돌강은 폭도 넓고 꽤 깊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속(流速)도 빨라서 그 물에서 고기를 잡다가 변을 당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 일부 뜬바위(검은여)의 모습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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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를 한 옆에 긴 팔처럼 거느리고, 태안군 남면과 서산시 부석면 사이로, 그리고 태안읍 쪽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온 천수만은 이제 바다가 아니다. 1982년 이후 그 바다는 육지로 변해 버렸다. 바닷물이 사라진 그 자리에 담수호와 농경지가 조성되어서, 또 한해의 9월이 지나고 있는 지금, 그곳에는 또다시 연둣빛 물결이 출렁댄다.

광활한 들판의 연둣빛 물결은 일단 '풍요'를 실감시켜 준다.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풍만한 생명력도 거기에 있다. 하지만 광활한 천수만 들판의 그 연둣빛 물결은 천수만의 옛 바다를 기억하는 태안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오히려 천수만의 푸른 바닷물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것일 뿐이다.

▲ 가까이에서 본 뜬바위(검은여)의 모습. 바닷물에 대한 그리움을 머금고 있는 듯.
ⓒ 지요하
태안 사람들만이 아니다. 천수만 A지구와 B지구를 싸고 도는 태안·서산·홍성 등 3개 시·군 44개 리의 주민들 모두 똑같은 심정이다. 천수만의 옛 바다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바닷물을 그리워한다.

천수만은 우리나라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연안 황금 어장이었다. 갖가지 어족의 산란장이었다. 천수만 주민들은 가난했던 시절에도 반찬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았다. 바구니 하나 들고 갯가로 나가기만 하면 반찬 문제가 해결되었다. 밭에서 일하다가 끼니때가 되어 집에 오면, 아낙은 우선 바다로 달려갔다. 바다에는 잡거나 줍거나 긁거나 따거나 캐거나 할 수 있는 게 지천이었다. 잡든지 줍든지 긁든지 따든지 캐든지 해서 바구니에 담아 오면 되었다.

일제 시대 농경지 확대와 군량미 확보가 제1의 과제였던 일본인들도 천수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조선 반도의 곳곳에 수많은 간척지를 조성했던 일제는 천수만을 눈여겨보았지만, 그들은 천수만에서 대단위 농경지 조성 가능성만 본 것이 아니라, 그 바다가 동양 최대의 수산자원 보고(寶庫)라는 것도 알아보았다.

"일제 때 일본 정부가 천수만 간척공사 계획을 수립했다가 다각도로 타당성 조사를 시행한 후 농경지 조성으로 얻는 수익보다 수산자원 상실로 생겨나는 손실이 훨씬 크다는 결론에 따라 계획을 취소했다"는 장기욱(張基旭) 전 국회의원이 말은 사실 여부를 차치하고라도 '타당성 조사'라는 한마디 말만으로도 참으로 의미 심장하다.

당연히 나의 관심은 '타당성 조사'라는 이 한마디 말에 모아진다. 이 말만큼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고 '한'을 안겨 주는 말은 없다.

▲ 뜬바위는 오늘도 저 멀리에 있는 태안읍 백화산을 손짓으로 부르고
ⓒ 지요하
저 1978년의 박정희씨와 정주영씨의 의기투합의 산물인 '서산 A·B지구 간척공사'에 과연 '타당성 조사'가 선행되었는가? 그들은 '타당성 조사'라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는가, 아니면 아예 무시하였는가?

천수만 주민들에게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시행한 천수만 매립이 개발독재의 산물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장을 잃은 주민들에게 농지를 분양하겠다는 약속을 파기하고 고(故) 정주영씨가 독식을 했던 천수만 간척지는 1990년대 후반 현대그룹의 재정난으로 일부가 분할 매각된 바 있지만, 태안군이 '기업도시'로 선정됨에 따라 현대그룹은 앞으로 천수만을 진짜 돈방석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천수만 간척지에 앞으로 골프장이 들어서고 갖가지 레저형 시설들이 지어지면 다시 한번 천수만의 모양새가 확 달라지겠지만, 그렇더라도 천수만 바다에 대한 주민들의 향수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천수만 바다를 그리워하는 마음도 대를 이어갈 것이다.

▲ 뜬바위섬에 세워진 정자에서 팔봉면의 팔봉산도, 부석면의 도비산도 보고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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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만의 큰 갯고랑 적돌강이 흐르는 한 곳에 특이한 모양의 섬이 하나 있었다. 멋진 바위산 같은 작은 섬이었다. 천수만에 백중 사리 밀물이 들어와도 검은 빛깔의 머리 부분은 늘 물 밖에 나와 있어 그 바위를 일러 '부석(浮石)―뜬바위'이라 했다. 그리고 바위의 색깔에 연유하여 '검은여'라고도 했다. 서산시 부석면의 이름이 그 바위에 연유하여 지어진 것은 물론이다. 자연 그 바위에 관한 전설도 생겨나게 되었다.

신라 시대 의상대사와 관련하는 그 전설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있으므로(서산시 부석면 부석사 검색) 여기에서는 소개를 생략한다.

그런데 그 뜬바위(검은여)가 천수만의 매립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되고 말았다. 바닷물이 사라진 그 땅을 농경지로 조성하기 위한 공사에서 그 바위도 포크레인의 밥이 될 운명이었다. 그 위기에서 그 바위를 살려내기 위해 신명을 바쳐 온갖 노력을 다한 이가 있었다. 뜬바위와 더불어 평생을 살아온 갈마리의 한 노인이었다. 그 노인의 노력으로 '검은여보존위원회'도 만들어지고, 뜬바위(검은여)는 계속 그 자리에서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 부남호 옆으로 길고 곧게 뻗은 철새 탐사로. 차에서 내려 걷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 지요하
현대건설은 주민들의 뜻을 받아들여 육지화된 검은여의 주변으로 물이 흐르도록 수로를 만들어 주었고, 주민들은 1989년 검은여에 '검은여·浮石'이라는 글자를 새긴 상징석을 세웠다. 그리고 보기 좋은 정자도 하나 지었다.

천수만 검은여는 부석면 취평리 도비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와 지령(地靈)이 상통한다 하여 옛날부터 신성시해 온 곳이다. 어부들이 의막(依幕)을 짓고 바다를 오가며 풍어제를 지내기도 했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부석면 주민들은 매년 4월 3일 '사단법인 검은여보존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면민의 안녕과 풍년 농사, 풍어를 기원하는 제를 올리고 있다. 어찌 보면 안쓰럽고 서글픈 풍장놀이기도 한 셈이다.

여전히 천수만이라는 이름을 안고 있기는 하되 이제는 바다 가운데가 아닌 광활한 농경지 가운데에 존재하고 있는 섬 뜬바위. 바다는 사라졌어도 여전히 섬으로 남아 있는 뜬바위. 그 검은여는 오늘도 바다에 대한 향수를 안고 바닷새들을 부르고 있다. 마치 바닷물을 그리워하는 듯 드문드문 굴 껍질이 남아 있는 검은 돌들에서는 갯내음이 풍겨 나는 듯하다.

▲ 뜬바위섬으로 가는 길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왜가리들
ⓒ 지요하
태안군 남면과 서산시 부석면 사이 천수만 적돌강의 섬 뜬바위를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배는 필요 없고 차만 있으면 된다. 태안읍 평천리에서 천수만으로 들어서서 드넓은 들판을 가슴에 안고 빙 돌아서 가는 길이 있고, B지구 제방의 4차선 도로에서 북쪽 정미소 방향으로 꺾어 들어가는 길이 있다. 담수호인 부남호 옆으로 곧고 길게 뻗어 있는 판판한 비포장 길을 달리거나 걸으면 색다른 기분을 갖게 될 것이다.

한우 목장의 수많은 소들과 어울리는 바닷새들도 볼 수 있고, 부담호 물 위에 떠 있는 그물 부표를 차지하고 앉아서 물고기를 노리는 왜가리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과거 천수만을 싸고도는 3개 시·군 44개 리의 이름을 차례로 사용하여 '그리운 천수만'이라는 연작시(환경시)를 지은 적이 있다. 유일하게 동리 이름이 아닌 지명을 사용하여 지은 시를 소개한다.   


  그리운 천수만·11 
                         ― '뜬바위·검은여'에서


  조물주의 뜻으로 지어져서 
  신비한 자연의 이치를 안고   
  장구한 세월
  뭇 바닷가 사람들의 
  풍요한 삶의 터전이었어라 
  천혜의 황금 어장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삶의 터전이 
  영원한 상실감과 한으로 변하였네
  갈마리 앞 적돌강 
  밤마다 피어나던 해래질 어화(漁火) 
  끼니 때 달려나가 잡아오고 캐 오고 따 오고 
  긁어 오고 주워 오던 해물탕거리
  모두 가뭇없이 사라졌네 
  사라진 바다를 그리워하며 
  천수만의 형해(形骸)를 끌어안고 살아야 할 
  어민들의 쓰라린 가슴에 
  그래도 단 하나 지켜야 할 것이 있었지
  천수만은 통째로 잃었어도 
  끝내 잃을 수 없는 
  적돌강의 뜬바위 검은여는 천수만의 상징이었지 
  부석(浮石)이라는 동네의 이름이 되었고 
  도비산과 산바람 갯바람으로 속삭임을 주고받으며 
  부석사(浮石寺)와 전설로 어울리며 
  서산 팔경 중의 명물로 군림했었지 
  부석면 사람들의 텅 빈 가슴에 
  안타까움으로 남은 검은여를 보며 
  감히 천년 만년의 숨결을 바라고 
  발을 동동거린 사람이 있었다네 
  천수만과 어울려 
  가장 오래 산 인연이 죄가 되어 
  동서남북 천지간을 헤매며 
  숱한 사람들의 소매를 붙잡느라 골이 빠진
  칠순 노인네의 노공(勞功)에 
  검은여는 마침내 어연번듯하게 살아 
  천수만의 숨결을 간직하게 되었다네 
  옛날에는 밀물 썰물과 동무하며 
  개펄 위에 가만히 있었지만 
  이제는 적돌강의 물결을 부르며 
  풍장 치고 춤을 추는 뜬바위가 되었다네
  뜬바위 검은여가 옛 적돌강의 그 자리에서 
  매년 천지 신명과 어울리며 
  뜬바위로 떠 있는 한
  우리들의 가슴과 가슴에서 
  천수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네
  검은여의 굳센 생명 빛으로….              

  (1999년 <시도> 7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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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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