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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를 향해 걷기 시작한 지 24일. 그 사이 나는 점점 단순해지면서, 조금씩 지쳐가면서, '저 태양이 결국엔 나를 죽이고 말 거야' 이런 말이나 중얼거리면서, 그저 기계처럼 걷고 있을 뿐이었다. 데쳐지는 시금치처럼 그렇게 나는 조금씩 숨이 죽어갔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귀찮아졌고, 그들이 건네 오는 인사와 나에게 보이는 호기심도 부담스러워졌다. 내가 왜 걷는지도 잊어버린 채 목적지를 향해서 '갈 수밖에 없으니까, 중간에 포기하는 건 내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니까' 걸어갈 뿐이었다.

나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고, 외로웠다

배낭은 지구를 짊어진 듯한 무게로 내 어깨를 짓눌렀고, 태양은 나를 태울 듯 매섭게 덤벼들었고, 산티아고는 세상의 끝으로 여겨졌다. 저녁마다 빨아야 하는 단벌의 옷과 냄새가 배어가는 신발, 조금도 무게가 줄지 않는 배낭. 많게는 100명이 함께 쓰는 방과, 날마다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코고는 사람들, 잠을 설치는 짧은 밤들. 늘 먹는 바게트와 파스타에 물리기 시작했고, 언제나 남의 말을 써야만 하는 상황도 끔찍해졌다. 여기서 나는 늘 웃어야 했고, 사람들의 호기심 속에 '대한민국 대표선수'로서 메달 순위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나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고, 외로웠다. 모국어로 이야기하고 싶었고,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더운밥을 먹고 싶었다. 하지만 여긴 너무 먼 곳이었다. 내게는 핸드폰도 인터넷도 없었고, 그리운 얼굴들은 모두 만 리 밖에 있었다. 가뭄에 말라가는 오이처럼 그렇게 나는 시들어가고 있었고, 그럴 때쯤 이 마을 라바날(Rabanal)에 도착했다.

▲ 담벼락에 핀 나팔꽃. 라바날
ⓒ 김남희
마을에는 베네딕트 수도회와 제수이트 수도회가 함께 운영하는 순례자를 위한 휴식의 집이 있었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에 있는 모든 알베르게는 오직 하루만 머무를 수 있을 뿐인데, 이곳 수도원에서는 최소 이틀 밤을 머물러야 했다. 이곳은 길을 가던 순례자들이 잠시 멈춰서 명상하고, 생각하고, 쓰면서 휴식을 취하는 곳이었다.

아침과 저녁의 미사에 참석하는 것도 의무사항이 아니었다. 하지만 절집에 가면 절집 예절을 따르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기에 미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 외의 시간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다. 식사준비를 하거나 설거지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침묵의 미덕을 아는 사람들 곁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곳에 머문 이틀 동안 나는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풍요롭게 가질 수 있었다. 산들이 내려와 기웃거리는 도서실 창가에서 글을 쓰거나, 명상실에서 혼자 명상을 하거나, 정원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무심하게 앉아 있고는 했다. 그럴 때면 내 안에서 버석거리며 말라가던 풀들이 욕심껏 물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쉬는 동안 내 안의 나에게 다시 물었다. '너는 왜 이 길을 걷기 시작한 거지? 네가 길 위에서 찾고자 하던 것들을 향해 가고 있니? 이 길 위에서 너는 진정 행복하니? 지금 네게 가장 소중한 것들이 뭐지? 너를 흔들고, 두렵게 하고, 마음 다칠까 움츠러들게 하는 것, 그게 뭐지? 이 길의 끝에 서면 네가 가장 하고 싶은 일, 그걸 할 용기가 네게 있니?'

▲ 그레고리안 성가로만 진행되는 미사. 라바날
ⓒ 김남희
많은 질문과 답들이 솟구쳤다 일렁이며 잦아들고는 했다. 그 무수한 상념의 갈피들을 한 가닥씩 풀어헤치며, 지난 24일간 내 마음을 어지럽히던 욕망과 미련의 찌꺼기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보낸 시간. 간절히 원했던, 애타게 갈구했던, 식물처럼 고요히 늘어져서 보낸 시간이었다.

가끔은 내가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혼자 있어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퍼내기 위해서는 고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던 시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깊이 들여다보고, 더 오래 가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 길의 끝까지 가기 위해, 내가 만나고 싶었던 것을 만나기 위해, 내가 꿈꾸는 용기를 갖기 위해 나는 더 걸어갈 것임을 확인했던 시간이었다.

▲ 다 함께 모여 와인과 식사를 나누는 순례자들. 순례자를 위한 휴식의 집. 라바날.
ⓒ 김남희
내일 새벽이면 다시 무거운 배낭을 메고 길 위에 선다. 산티아고까지는 이제 240km.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다시 마음의 빗장문을 열고, 세상 바깥으로 나간다.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손 내밀며.

2005년 7월 22일 밤 라바날에서

라바날에서의 일기 - 2005년 7월 21일 목요일 맑음
오늘 쓴 돈 : 음료수 1 유로
오늘 걸은 길 : 0km


오늘은 정말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5시부터 울려대는 자명종들로 인해 역시 불가능했다. 닐스크리스티안과 작별하고, 짐을 꾸려 수도원으로 갔다. 수도원의 부속 건물인 순례자를 위한 집.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차오르는 작은 정원, 독서실, 천장창으로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명상방, 10명이 제한인원인 침실과 눈부시도록 깨끗한 화장실, 새로 내주는 시트와 이불(이곳에서는 빨래를 할 필요도 없다. 세탁 바구니에 빨래를 넣어두기만 하면 되니까) 작지만 순례자의, 순례자에 의한, 순례자를 위한 완벽한 공간이다.

순례자의, 순례자에 의한, 순례자를 위한...

짐을 풀고 마을의 식당으로 가 인터넷에 접속했다. 런던에서 또 폭발 사고가 일어났단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다고 한다. 이렇게 세상을 떠도는 일의 서글픔은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나도 모른다는 거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바보가 되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수도원으로 돌아와 점심 준비를 거들었다. 벨기에인 마질라 할머니와 함께. 프랑스의 불교공동체에서 3년간 살았던 그녀는 그곳에서 만난 아시아인들(주로 베트남인)의 참을성과 강인함, 용기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아마 우리가 더 오래 가난을 겪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시아에선 아직 삶의 많은 조건들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수용의 문제로 다가올 때가 많으니까. 더 많이 가지게 될수록 더 불평하기가 쉽잖아."

불평 없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시아인들의 인내에 대해 내가 이렇게 답하자.

"아랍사람들을 보면 그런 태도가 꼭 가난에서 기인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벨기에나 프랑스에 와서 사는 아랍 사람들과 아시아인들을 비교해보면 너무나 다르거든. 무슬림들은 늘 불만투성이에 공격적이고 폭력적이어서 우리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곤 해. 하지만 중국인, 베트남인, 한국인들은 절대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학교에서도 아시아계 학생들이 늘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고."

정년 퇴직 전에 교사였던 그녀는 아시아계 학생들의 성실함을 높이 평가한다.

"그 참는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야. 속에 병을 만들기도 하니까."

참을성이라는 말이 남성보다는 여성의 미덕으로 강요되는 사회에서 자란 나에게 참고, 인내하고, 안으로 삭이라는 일은 부당함을 감수하라는 요구로 여겨지기도 한다. 현실에 대한 개척 정신보다는 수용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수동적이고 복종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만 같아서다.

▲ 혼자 걷는 길, 동편 하늘의 희미한 빛 한 줄기는 희망이 된다.
ⓒ 김남희
2005년 7월 22일 금요일 맑음
오늘 쓴 돈 : 음료 1 + 장 본 비용 5 + 엽서 0.2 + 숙박비 기부 25 = 31.2 유로


순례자들이 다 떠나고 난 새벽거리는 정적에 싸여있다. 7시 반 미사에 참석했다. 참석자는오직 8명. 수도원에 머무는 순례자들이 전부다. 3명의 신부님들이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며 미사를 이끈다. 9세기에 창립된 베네딕트 수도회에서는 이렇게 라틴어 그레고리안 챈트로 예배드리는 게 전통이라고 한다. 성당은 작고 보잘것없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허물어져가는 벽이 그대로 드러난 제단에는 오직 십자가가 걸려 있을 뿐. 파이프오르간도, 마이크도 없이, 오직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진행되는 예배는 장엄하고 아름답다.

"진리를 이루고자 이 음식을 받습니다"

어제 점심 시간에 나에게 식사 기도를 하라고 해 송광사 공양간에 적혀 있는 글귀를 기도문으로 읊었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 건강을 유지하는 약으로 알아 / 진리를 이루고자 이 음식을 받습니다."

스웨덴에서 온 마르쿠스가 그 기도문이 마음에 와 닿았다며 종이를 내민다. 절에서 공양 시간에 읊는 기도문이라고 알려준 후 어설픈 영어로 옮겨준다.

오늘 점심은 내가 준비해야 한다. 이곳의 호스피탈레로인 크리스틴이 레온에 간다며 내게 점심 준비를 부탁했다. 어제 생강 써는 나를 지켜보며 "요리 많이 해봤나보네" 하던 크리스틴이 맡긴 미션. 벌써부터 떨리고 긴장된다. 전채는 잣죽과 샐러드, 메인은 아라비아따 파스타, 후식은 과일. 양파를 사야 하고, 버섯이 있다면 좋을 텐데 구할 수 있을까. 이리저리 궁리를 해보며 마을의 작은 가게도 다녀온다.

독일인 아저씨 크리스티안이 주방 보조로 일해준 덕에 2시 정각에 완벽하게 모든 준비를 끝냈다. 한 상에 둘러앉는다. 다들 잣죽이 맛있다며 재료가 뭔지 묻는다. 양파와 참치, 옥수수, 정원에서 뽑아온 상추와 토마토를 넣고 올리브 오일과 식초로 양념한 샐러드. 마늘과 고추, 양파, 버섯을 듬뿍 넣고 정원에서 뜯어온 타임, 오레가노, 로즈메리 잎을 넣어 만든 파스타. 모두들 맛있게 먹어주니 참 고맙다. 후식으로는 수박을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으로 썰어 내놓으니 그 모양에 열광한다. 이로써 훌륭하게 일을 마친 셈인가.

저녁 미사에서 일본인 마끼야마상 부부와 나오코를 만났다. 몹시 반가웠다. 오늘 저녁 미사에서는 나도 성경을 한국말로 읽었다. 그동안은 늘 가장 많은 국적인 영어, 불어, 스페인어, 이태리어로만 성경을 읽었는데, 오늘은 한국어와 스웨덴어로도 읽는 기회가 왔다.

미사의 마지막 순서인 성찬식 때, 잘 걷지도 못하는 노인들이 힘들게 걸음을 옮겨 빵을 받는 모습을 보며 눈물이 났다. 한평생 그들을 이끌어 온 건 무엇이었을까. 무엇에 기뻐하고 무엇에 슬퍼하고 화냈을까. 삶의 벼랑에 몰렸을 때 무엇에 의지해 그 길을 건넜을까. 삶의 끝에선 지금,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한 평생 걸어온 길을 돌아볼 때 무슨 생각이 들까. 살아온 삶에 만족할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없을까.

▲ 십자가 무덤을 바라보는 순례자들. 크루즈 데 히에로
ⓒ 김남희
미사가 끝난 후 성당에 남아 기도를 드렸다.

"내일부터 다시 길 위에 섭니다. 지치지 않기를, 작은 만남에 무심하지 않기를, 늘 웃되 진심어린 미소이기를, 늘 깨어있기를 간구합니다. 이 길 위의 끝까지 갈 수 있도록 용기와 넉넉한 마음을 허락하소서."



2005년 7월 23일 토요일 맑음
오늘 쓴 돈 : 기부 1 + 기부 3 + 장보기 6.6 + 엽서 3장 0.8+ 11.4 = 22.8 유로
오늘 걸은 길 : 라바날 델 카미노(Rabanal del Camino) - 폰페라다(Ponferrada) 33km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발끝을 들고 조심조심 식당으로 내려왔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교회 앞에서 나오코를 만나 길을 나선다. 달빛이 들판에 가득하다. 박지원의 글이 생각나는 길.

"달 속에 만일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면, 달에서 땅을 바라보는 이 있어서 그 난간 밑에 비겨 서서 우리와 함께 땅의 빛이 달에 가득함을 구경할 터이죠."

지금 땅의 빛이 달에도 가득해 누군가 이 새벽 지구 위에서 걷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까? 어두움 저편으로 희미한 산그림자가 다가선다. 뺨에 와 닿는 서늘한 바람.

두 시간쯤 걸었을 무렵. 크루즈 데 히에로(Cruz de Hierro)에 다다랐다. 거대한 돌 무덤 위에 십자가가 서 있다. 예부터 켈트인들은 언덕위에 돌무덤을 만들어서 산의 신에게 안전한 여행을 간구하고는 했다고 한다. 이 돌무덤 위에 돌 하나를 올려놓는 행위는 이제 순례자들의 의식이 되었다. 어떤 순례자들은 자신의 고향에서부터 돌을 가져와 이곳에 올려놓기도 한다.

고향의 돌이 없는 나는 근처에서 돌을 주워 올려놓는다. 나무 십자가 주변에는 순례자들이 매달아놓고 간 물건들로 가득하다. 가족이나 연인의 사진과 사연들, 손수건, 신발, 모자, 조개, 목걸이. 내가 진정 이 길 위에 남기고 가고 싶은 건 뭘까. 내 마음 속의 미련과 욕망도 탁 꺼내어 저렇게 매달아놓고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늘없는 청춘들을 만나다

십자가 돌무덤을 지나쳐 삼십분쯤 걸으니 작고 외진 마을 만자린(Manjarin)에 들어섰다. 이곳은 중세 시대의 순례자 숙소가 어땠을지를 상상해볼 수 있는 알베르게로 유명하다. 전혀 보장되지 않는 사생활, 청결과는 거리가 먼 환경, 턱없이 부족한 침대수, 양들과 함께 거주해야 하는 협소한 공간. 하지만 이런 부족함이 오히려 이 알베르게만의 독특함으로 작용해 일부러 이곳을 찾아와 머무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이 알베르게의 주인 토마스는 늘 가슴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흰 티셔츠를 입고 있는데, 순례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아픈 곳을 치료해주고, 카미노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려주기로 소문이 났다. 매일 아침 토마스는 순례자들이 이곳을 떠날 때마다 야곱 성인이 듣고 순례자를 지켜주라는 뜻에서 문 앞의 커다란 종을 힘껏 울려대고는 한다. 허브 차와 과자로 간식을 먹으며 쉬는 지금도, 길을 나서는 이를 위해 토마스는 종을 울리고 있다. 차와 과자에 대한 답례로 약간의 기부를 하고, 다시 배낭을 멘다.

▲ 산자락에 위치한 작은 마을.
ⓒ 김남희
산등성이에 폭 싸인 작고 어여쁜 마을 엘 아세보(El Acebo)를 거쳐 몰리나세카(Molinaseca)에 도착하니 정오다. 길가에서 나오코가 준비해온 빵으로 점심을 먹는다. 스페인의 대학생들인지 단체로 순례여행을 나온 학생들이 거리에 주저앉아 점심을 먹고 있다. 그늘 없는 얼굴로 웃고 있는 청춘들을 바라보노라면 그들에게 다가올 미래가 문득 떠오르곤 한다. 순정한 맹세가 그 빛을 잃고, 혁명처럼 격렬하던 사랑이 지나가고, 폭풍 같던 열정도 잠잠해진 자리에 상처와 의심과 머뭇거림의 장막이 드리워질 그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릿해진다.

상처 없는 영혼은 허락될 수 없는 걸까? 사람은 시련과 아픔을 통해 고양되고 단련되지만, 세상 어딘가에서 가끔은 상처 없는 영혼과 마주칠 수 있어도 좋을 것 같다. 아직도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젊은이들을 남겨두고 우리는 다시 걷는다. 오늘의 목적지 폰페라다(Ponferrada)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두 시 반을 넘고 있다.

여기 알베르게의 시설, 짱이다! 방은 4명이 쓰게끔 되어 있고, 잘 갖추어진 부엌, 분수가 있는 넓은 정원, 거실과 무료 인터넷, 감탄이 절로 난다. 오늘 길 위에서 일본인 여성 미끼와 나미를 만나고, 6명이 같이 걷는 중년의 아줌마들도 만났다. 아직 한국인은 한 명도 못 만났다.

2005년 7월 24일 일요일 흐리고 빗방울 뚝뚝
오늘 쓴 돈 : 쥬스 1.35 + 숙박 4 + 저녁 2.1 + 거리 음악 공연 0.5 = 7.95 유로
오늘 걸은 길 : 폰페라다(Ponferrada) - 빌라 프랑카 델 비에르조(Villafranca del Bierzo) 24km


▲ 카미노의 길 안내표지인 조개껍질 문양(왼쪽)과 순례자 전용 숙소인 알베르게를 표시하는 문양.
ⓒ 김남희
지난 밤에 친구들 꿈을 꿨다. 20대를 함께 보냈던 얼굴들이 모두 모여 연극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다의 신들에 관한 연극. 그 시절에 우리가 그랬듯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있었다. 그리운 얼굴들, 다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인디언의 마음을 닮고 싶어

날이 흐리고 비가 올 것처럼 후텁지근하다. 역시나 걷다보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엄마가 해주는 오징어를 듬뿍 넣은 호박전, 따뜻한 온돌방과 만화책이 그리워진다. 오늘은 포도밭 사이를 따라 이어지는 길. 길가의 설익은 살구를 따 먹은 죄로 설사하며 걷는 길.

12시에 빌라프랑카 델 비에르조 도착. 알베르게는 8명이 한 방을 쓰고, 샤워 및 화장실이 남녀분리이고, 한글 가능한 인터넷이 무료, 부엌과 정원을 갖춘 훌륭한 시설이다. 짐을 풀고, 매일 해야만 하는 일들을 다 마친 후 방명록을 훑어본다.

다른 순례자들이 게스트 하우스 방명록에 남겨놓은 글을 읽다보면 물집치료에서 숙소를 구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신의 은혜라고 여기고 간구하고, 감사하는 글을 보게 된다. 나로서는 그런 태도가 낯설다. 삶의 고비 때마다 나 자신에게 더 굳건히 의지해야만 했던 나로서는, 선택한 일에 대해서 언제나 스스로 책임져야만 했던 나로서는, 꺾이는 무릎을 곧추세우며 울면서도 혼자 나갈 수밖에 없던 나로서는, 일상의 사소한 부분들까지 신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낯설기만 하다.

▲ 포도밭 사이로 이어지는 길
ⓒ 김남희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는 삶을 견디고 받아들이는 그들 나름의 방식이리라. 내가 마음이 팍팍할 때나, 일상에 지칠 때면 배낭을 메고 나와 산을 오르거나, 오솔길을 홀로 걸으며 위안을 얻듯이. 누구에게나 삶을 견디게 하고, 지친 영혼을 위로해주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만으로 다행인 것이다.

기독교의 종교관보다는 인디언들의 세계관에 나는 마음이 끌린다. 인디언들과 신 사이에는 성직자가 필요 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신과 곧바로 얼굴을 맞대고 살면서 누구나, 홀로, 침묵 속에서 신과 만났다. 장엄한 대자연 앞에서 말을 잃을 때면 인디언들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예배하는 자세를 갖추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굳이 일주일 중 하루를 신성한 날로 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모든 날이 곧 신이 준 날이었기에! 그렇게 신전도 없이, 신의 대리자도 없이, 주일도 없이 살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신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살았던 인디언들. 나도 그런 마음을 닮고 싶다.

▲ 빌라 프랑카 델 비에르조의 성당
ⓒ 김남희
나오코와 숙소를 나와 마을을 둘러본다. 산자락 사이에 살포시 앉은 이 마을, 참 예쁘다. 마을 여기저기의 오래된 교회들을 둘러보고, 빵집에서 빵을 사서 벤치에 앉아 먹었다. 젊은이들이 연주하는 갈리시안 음악을 듣다가 천천히 걸어 숙소로 돌아오는 길, 주느비에브와 다시 만났다. 우리는 포옹과 키스로 반가움을 나눈다. 라바날에서 사흘을 머문 덕에 낯익은 얼굴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참 좋다.

숙소에 돌아와 새 증명서를 샀다. 나는 벌써 내년을 꿈꾸고 있다. 이 길의 끝에 서기도 전에!

▲ 백파이프와 타악기로 갈리시안 음악을 연주하는 스페인 청년들
ⓒ 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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