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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숭왕 원종의 장릉.
ⓒ 한성희
인조가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1580~1619)으로 추숭해 왕릉이 된 장릉(章陵)은 경기 김포시청 뒤에 숨듯이 감춰져 있다. 김포시청 앞에서 왼쪽 길을 따라 뒤로 올라가면 장릉이 나타난다.

20만평에 이르는 장릉이 왕릉으로 추숭되고 정원군이 원종이 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인조의 고집과 우격다짐도 한 몫 했다. 장릉은 원종과 인헌왕후(1578~1626) 구씨의 쌍릉이다.

정원군은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 탄생한 4명의 왕자 중 셋째 아들이다. 정원군의 맏아들이 능양군이며 훗날 반정으로 왕위에 앉는 인조다. 능양군의 동생 능창군이 역모혐의로 광해군에게 위리안치 되어 목을 매고 죽자, 정원군은 울화병으로 4년만에 죽어 경기 양주 속촌리에 묻힌다.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인조의 원한은 깊었고 마침내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후 인조가 누구의 대통을 잇느냐는 정통성 문제는, 할아버지 선조의 종통을 잇고 선조를 아버지로 불러야 하고 정원군을 백부(伯叔父)로 불러야 한다는 김장생의 주장과 정원군을 아버지로 해야 한다는 박지계와 공신들이 대립하는 우스꽝스런 일까지 벌어졌다. 선조의 대통을 잇자는 주장은 정원군을 추숭하려는 인조의 속셈을 미리 막아버리려는 조신들이, 정원군을 추숭왕으로 올리려는 인조와 공신들과 벌인 대립으로 봐야한다.

소종(小宗)인 인조의 혈통이 대종(大宗)인 종묘로 들어가는 절차이니 종통을 이을 자격이 되지 않던 인조에게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인조와 공신들이 이 논쟁에서 승리했고 인조는 아버지 추숭작업으로 들어가 정원군 묘를 대원군으로 추숭하고 흥경원(興慶園)으로 격상했다. 이때 인조의 어머니 구씨는 운주부부인으로 추봉되고 인조는 계운궁이라는 궁호를 올린다.

▲ 석물은 왕릉에 준하지만 능상은 원(園)의 형식을 벗지 못했다.
ⓒ 한성희
1626년 1월14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인헌왕후가 49세로 죽자 인조는 “염(斂)과 빈전(殯殿)을 국장에 준하여 거행하라”고 명한다. 4월 21일 김포현 뒷산으로 장지를 정하고 오른쪽 줄기를 산릉공사 중 보토(補土) 했는데 인조의 속셈은 정원군을 이곳으로 천장할 생각이었다.

4개도에서 모인 승 650명이 15일간 산역을 했어도 완성되지 못하자 강화의 봉화군인(烽火軍人) 1천 명을 더 동원해 1차와 2차로 나누어 각각 5일간 일하도록 했다. 5월 18일 인헌왕후의 장사를 지냈고 원호를 육경원(毓慶園)이라 했다. 다음 해인 1627년 8월27일 흥경원을 김포로 천장하며 육경원 오른쪽 줄기로 옮기고 인헌왕후도 함께 천장해 현재의 장릉이 됐다.

▲ 흥경원이었을 때 지어진 정자각이라 계단이 낮고 왕릉에 비해 절반 높이에 불과하다.
ⓒ 한성희
1628년 정원군의 추숭은 이귀와 최명길 등 반정공신들이 주도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됐다. 왕자에 불과한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한다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라 예조와 삼사, 유생들은 거세게 반대했다. 1631년 인조는 아예 이귀를 이조판서, 최명길을 예조판서로 앉히고 정원군 추숭작업을 시작했다.

▲ 기백도 혼도 없는 무인석.
ⓒ 한성희
추숭하는 일에 찬성한 박지계를 제명해버리고 수업까지 거부하며 반대하는 성균관 유생들의 거센 반발과 조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조는 1632년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계운궁 구씨를 인헌왕후로 추숭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인조가 원종으로 추숭했지만 대사헌과 대사간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왕위 재위자가 아니면 입묘(종묘에 봉안되는 것)하지 못하는 것은 고금의 정상적인 법도이고, 원종(정원군)과 선조와는 군신관계로 동식할 수 없고, 제왕의 종통은 지엄한데 지자인 소종이 대종의 예에 입묘할 수 없다”며 입묘를 반대했다. 조신들과 유생들은 선조의 종통을 이어야 한다는 여론이었다.

정원군 추숭례는 인조가 즉위한 지 예송 13년만에 겨우 결정됐고 1635년(인조13년)에 원종은 비로소 종묘에 위패가 봉안됐다. 인조는 정원군을 추숭하면서 정통성의 약점으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에게 인조 스스로가 멸시 당한다고 말할 정도로 별별 수모를 다 겪었다.

결국 인조는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성리학의 정통론에 약점을 잡히자 이를 극복하려고 무리한 추숭을 감행한 것이다. 정원군의 추숭은 결과적으로는 예송을 통해 왕의 권위와 위상을 강화하려는 인조와 반정공신 세력과 그것을 폄하하는 서인 세력으로 대립되어 결국 신권의 강화로 이어졌다. 후에 효종과 효종비의 복상문제로 예송논쟁이 일어난 배경도 정원군의 추숭 예송이 실마리를 제공했다고 봐야 한다.

넋이 없는 왕릉 석물

이렇게 어거지로 추숭왕이 된 원종의 능으로 올라가는 사초지의 잔디는 폭신폭신해서 명당자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했다. 많은 왕릉을 다녀 봐도 잔디가 양탄자처럼 폭신폭신하게 밟힌다는 느낌은 경릉(의경세자 덕종) 외에 처음이다.

▲ 무인석과 문인석의 머리가 너무 크고 몸집이 작아 비례가 전혀 맞지 않는다.
ⓒ 한성희
김포 시내로 둘러싸인 장릉은 13년간의 골 아픈 추숭예송 끝에 마침내 왕릉으로 격상된 옛 역사는 뒤로 묻은 채 푸른 숲으로 평온한 기분이 저절로 드는 곳이다. 인조가 얼마나 풍수에 공을 들여 선택한 자리인지 풍수를 잘 모르는 내게도 명당이라는 느낌이 저절로 들었다. 푸근하게 펼쳐지는 잔디 언덕과 앞이 트여 편안한 자리. 마음이 평안해지는 곳이 명당이라 한다. 장릉의 능상은 내려오기 싫을 정도로 평안하고 푸근했다.

▲ 왕릉 아닌 원(園)의 형식인 능상.
ⓒ 한성희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상을 보자 어딘가 걸맞지 않은 옷을 입은 왕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능상은 보통 왕릉만큼 컸지만 능상을 두른 돌은 왕릉에 맞지 않는 원(園)의 형식이다. 추숭한 후에 무인석과 문인석 등 석물을 새로 세운 인조가 차마 이것까지 고치고 난간석을 두를 수는 없었으리라는 짐작이다. 실상 추존왕으로 올려도 무인석 등을 새로 세우지 않고 장례 당시의 석물을 그대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는데 어거지로 무인석을 세운 인조의 열등감이 지금도 보이는 듯싶었다.

정자각의 높이도 왕릉 정자각에 비해 절반 가량 낮아 원의 정자각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왕릉치고는 드물게 수복방이 남아 있으나 낮은 정자각은 신분 격상을 위해 애쓰던 인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원군 본래의 신분을 보여주는 듯싶다. 문인석과 무인석에서는 아무런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혼이 나가고 빈 껍데기만 서 있는 큼직큼직하고 멋없는 석물이라는 느낌이었다.

“이거 보세요. 이상하네요. 저 석물에 아무런 감흥이 없어요. 깨끗하기는 한데 마치 공장에서 방금 찍어낸 석물 같지 않아요?”
“그러게. 혼이 빠진 것 같아.”

동행했던 홍승희 시인도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커다랗기만 하고 예술적인 품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양쪽을 다니면서 여러 번 올려다봐도 뚱뚱하고 아무런 맛깔도 없이 그저 무심하게 서 있는 석상에 불과했다. 어떤 느낌이든 왕릉의 석상에서 나타났는데 이렇게 맥 빠진 석물은 처음이다. 석마와 석호, 석양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문인석, 무인석, 석양, 석호까지 왜 하나같이 이리 뚱뚱한지 알 수 없다.

▲ 터무니 없이 크고 뚱뚱한 문인석을 아무리 보아도 전혀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크기를 가름해보려고 기자의 부탁으로 포즈를 취해준 홍승희 시인.
ⓒ 한성희
왕릉과 왕궁은 당대 최고의 건축기술과 최고의 석공의 솜씨가 발휘되는 곳이다. 이 석물 제조를 맡았던 선공감의 석공들은 왕이 될 수 없는 왕릉에 놓일 석물이라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디선가 스피커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조용한 왕릉에 웬 스피커? 장릉도 공군부대가 1100여평의 능역을 차지하고 있고 군용비행기가 오르내릴 때 이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로 시끄럽다. 비행기 소음도 왕릉의 적막을 깨는 데 한몫 한다. 어딜 가나 군부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왕릉 신세인가 싶어 갑자기 짜증이 치밀었다.

▲ 연잎이 가득한 작은 방지원도(方池圓島). 뒤쪽 중간에 서 있는 나무가 있는 곳이 원도(圓島)
ⓒ 한성희
두 개의 방지원도

까치가 날아든 잔디를 걸어 내려가 방지원도(方池圓島)에 들렀다. 장릉은 방지원도가 둘이나 된다. 작은 연못은 연을 가득 심어 연잎이 무성했다. 재실을 지나 오른 쪽 숲으로 끼고 돌면 커다란 방지원도가 나타난다.

▲ 저수지라 불리우는 커다란 방지원도. 멀리 둥근 섬과 연못의 네모난 형태가 뚜렷했다.
ⓒ 한성희
장릉 관리 사무소에서는 저수지라 했지만 막상 가보니 네모난 연못 모양과 가운데 둥근 섬이 있는 모습이 뚜렷해 방지원도임에 틀림없는데 왜 장릉에는 연못이 둘이나 될까. 이 방지원도는 저수지 역할을 하기도 한 모양이다. 이 커다란 연못 아래로 논이 있고 근래까지 그 논의 농수를 대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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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왕릉이 조성되면 능을 운영하는 데 쓰이는 전답을 왕릉 하나에 약 24만평을 배정한다. 그런데 이 방지원도가 능에 속한 논에 물을 대기 위한 용도인지 아니면 나중에 그런 용도로 쓰인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듯했다. 두 가지 숙제가 생긴 셈이다. 방지원도가 왜 둘인지, 저수지 용도로 만든 것인지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으니 말이다.

▲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연못에서 헤엄치고 있다.
ⓒ 한성희
어쨌거나 인조 덕분에 김포시민들에게 아름다운 숲과 자연이 있는 훌륭한 문화재 장릉이 남겨졌다. 거기에 아름다운 연못이 둘이나 있으니 독특하고 개성 있는 왕릉임에는 틀림없다. 단, 석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 또한 장릉의 특징이다. 물 위를 미끄러지듯 유영하다 푸드득거리며 날아가는 이름 모를 새들이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커다란 방지원도는 관심 없다는 듯 무심히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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