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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의 자연과 함께 소박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전남 화순군. 여기 사람들은 서울 강남의 부동산시장이 들썩이는지, 국회에서 야당이 여당의 발목을 잡는지, 미국이 이라크 침공을 원유 때문에 했는지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다. 무장무장 뚜벅뚜벅 삶을 오로지 자연과 더불어 엮어가는 그들.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청정골, 화순으로 가을 여행을 안내한다.

▲ 그 곳엔 이미 가을이 오고 있었다.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식영정 처마에 걸린 초가을이 아름답다.
ⓒ 정동묵
모시 저고리 입은 여인의 가녀린 어깨 선마냥 유려한 곡선.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호리호리한 국도를 기분 좋게 내달린다. 2차선이 전부인 여기 길은 묘미가 있다. 장대 같은 수비수를 재주 좋게 제치고 골인시키는 축구선수 박지성처럼 산과 들과 호수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으면서 그 사이 사이를 이리저리 잘도 빠져나간다. 산은 함부로 타넘지 않고 에돌아가고, 들은 나무와 풀이 다치지 않도록 멀찌감치 떨어져 가며, 호수는 행여 물결 일세라 바로 옆이 아니라 차라리 산 위로 길을 내놓았다.

자연이 만들어놓은 순심(純心)

이 나라의 어디를 가든 자연을 가꾸는 건 촌인(村人)들이다. 낳고 자라고 삶을 가꾸다가 다시 돌아가야 하는 그 자리를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까닭이렷다. 행여 짙은 선글라스에 미끈한 외제차 타고 껌 씹으며 도회사람들이라도 지나갈라치면 눈 곱게 뜨지 못하는 그이들의 심정을 나는 안다. 그 아름다운 땅과 골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이들이 바로 그들 아니던가. 머릿속이 온통 자본의 논리로 가득 찬 도회인들 눈에는 자연이 풍광 자체로만 들어오지는 않을 터. 그래서 도농(都農) 간엔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벽이 있다, 벽.

▲ 물과 산의 아름다운 어울림. 그 가운데 배 한 척 한가로이 떠있으니 예가 바로 별천지 아닐까.
ⓒ 정동묵
여기는 전남 화순군. 이름만으로는 대한민국 전도 상에서 언뜻 위치를 짚을 수 없을 정도로 외부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깡촌'이다. 이는 호남을 내달리는 몇 개의 고속도로가 유독 화순만 비켜 가는 까닭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 곳 사람들의 순박한 맘씨 때문이다. 자신을 과장해서 내보이지 않으려는, 있는 그대로의 농정네들.

그런데 화순사람들의 순심(純心)은 자연이 만들어놓은 듯 보인다. 삼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남쪽으로만 너른 들이 펼쳐져 있는 배산임야(背山臨野)의 지형.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갈라지는 곳에, 짚더미 아래의 송아지처럼 포근히 웅크리고 있다. 해서 주위로는 이름 있는 산들이 많다. 무등산(1187m), 모후산(919m), 백아산(810m), 만연산(609m), 옹성산(573m)…. 이 모든 산들의 어머니는 지리산(1915m)이다. 그래서 이 지역엔 물도 많다. 동복호는 명경지수 그 자체이며 가는 곳마다 크고 작은 내가 지천을 이룬다. 그 물들의 하얀 속살이며 반짝거리는 비늘은 원시의 바로 그것이다.

산골에선 물이 그립고 물가에선 산이 그리운 법. 어디에 내놔도 부럽지 않은 산과 물이 있으니 사람들의 마음 또한 한량 같을 밖에. 그들은 바람과 시간을 즐길 줄 안다. 담양과 화순 일대에 정자(亭子)문화가 발달한 것도 이 때문이다. 면앙정 송순이나 송강 정철이 담양에서 <면앙정가>나 <사미인곡> 등속을 읊조릴 수 있던 것도 천혜의 자연 때문이었다.

이런 정자 문화는 바로 옆동네인 이곳 화순까지 이어져 물염정, 망향정, 환산정, 영벽정 등을 낳았다. 정자는 물가에만 있지 않다. 어느 동네를 들어가든지 마을 어귀 당산나무 아래에 정자 하나씩은 꼭 있다. 이 곳에서 사람들은 삶의 고단함을 이야기로 풀어낸다. 평생을 노동으로 점철한 그들이 애오라지 믿는 것은 사람과 바람과 별과 집짐승뿐.

"그러지라. 여그가 우리 안식처요, 안식처. 논 매다, 피 뽑다 허리 아프믄 여그 와서 이렇게 두 다리껭이 쭉 뻗고 벌렁 누워뿔기도 허고, 도란도란 찐 고구메도 같츠 까묵으믄스 자슥 야그도 하제. 고거이 낙시요, 낙. 후흣."

이서면 야시리 정자에서 동네 사람들과 말씀 나누시던 박 할머니(69)가 목청 좋게 이야기한다.

명경지수에 세상 시름 떨쳐버리고

1박 2일의 여정이고 주마간산 식의 여행이 아니라면, 화순 구경은 화순읍에서 북쪽이나 남쪽 중 한쪽을 택하는 게 좋다. 워낙 볼거리들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거리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화순 전체를 좀 알았다 싶을 정도로 여행하고자 한다면 2박3일은 족히 잡아야 한다.

▲ 산과 물과 두루미 한 쌍의 한가로운 어울림. 김삿갓이 주저 앉을 만한 풍광이다.
ⓒ 정동묵
화순읍에서 7번 지방도를 타고 만연산을 넘어 30여 분 달리면 드넓은 호수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화순 사람들의 식수원인 동복호다. 호수엔 지방기념물 제60호로 지정된 화순 적벽과 물염정, 망향정 등이 초가을 햇살에 빛나는 물비늘을 태연히 바라보고 있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수백 척 단애절벽의 절경에 젖어 방랑시인 김삿갓도 방황을 멈추고 이 곳에서 생을 마쳤다던가. 화순 적벽과 그가 머물렀던 물염정에 지난 세월이 묻어 있다. 무릎까지 다리를 담그고 물고기를 노려보는 재두루미 한 쌍의 먹이짓이 노련하다. 그들을 촬영하러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마자 날갯짓하며 날아가니, 미안하면서도 서운하다. 때 묻은 인간과는 섞일 수 없다는 그들의 삶의 법칙이 아닌가 해서 말이다.

問余何意棲碧山(문여하의서벽산)고- 왜 산에 사느냐 묻길래
笑而不答心自閒(소이부답심자한)이라.- 웃기만 하고 아무 대답 아니했네.
桃花流水杳然去(도원유수묘연거)한데- 복사꽃잎은 아득히 물에 떠내려 가는데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이라.- 여기는 별천지라 인간 세상 아니라네.


중국의 시성(詩聖) 이백(李白)이 이렇게 <山中問答(산중문답)>을 노래한 연유를 예서 이제야 좀 알겠다. 세상에 오염되지 않겠다는 뜻의 물염정(勿染亭)을 짓고 자연을 노래하던 삿갓 김병연의 마음 또한 십분 이해하겠다. 명경지수 유유히 흐르고, 두루미며 백로 한가로이 노니는 이 곳에서, 세상의 시름은 충분히 씻을 수 있을 터였다.

그저 머무르고만 싶은 간절한 마음 다독거려 다시 길을 떠난다. 북면에 소재한 백아산 휴양림을 향해서다. 손 흔들어 반기는 아오자이 같은 망초꽃이며 색색깔의 접시꽃이 고마웁다. 웬 꽃들이 지천으로 그리 많은지….

▲ 화순의 어딜 가든 아름다운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 정동묵
화순 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관광상품이 백아산(810m) 휴양림과 온천이다. 지리산과 무등산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와 험한 산세 때문에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전남총사령부가 주둔했다는 백아산에는 관에서 직접 관리·운영하는 휴양림이 있다. 언덕 위의 하얀 집처럼 골 곳곳에 통나무로 지은 방갈로가 그림같이 자리 잡고 있어 가족들의 휴식처로는 그만이다.

백아산 자락에는 화순에서 유명한 '불미나리 인진쑥즙' 생산지도 있다. 현재 시행 중인 친환경농업육성법 입법의 모델로 삼았던 친환경주의자 황용철(55) 대표의 생명철학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곳으로, 전국 환경생명농업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 곳이다. 무농약과 1급 청정수로 키운 불미나리와 인진쑥으로 만든 즙은 무기질이 풍부한 알칼리성 식품으로 식욕 증진, 혈압 강하, 이뇨·해독작용이 뛰어나다.

▲ 화순엔 추수가 한창이다. 도로변에 고추 널고 있는 한 아낙네의 건강성.
ⓒ 정동묵
화순에서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온천. 역시 북면 금호화순리조트를 중심으로 퍼져있는 화순온천지구는 태고의 화산 분화구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나는 영험한 곳이란다.

온천이 개발돼 리조트를 개장한 것은 지난 95년. 온천수는 유황, 나트륨, 리튬, 아연이 주성분인 100% 천연수로 성인병 예방, 피부 미용, 심장 강화에 도움을 주며, 관절염, 무좀, 아토피성 피부염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17평형부터 71평형까지 총 220개의 객실을 보유하고 있는 금호화순리조트는 이 지역에선 특급 숙박 장소다.

너른 들판에 퍼진 옐로그린

▲ 여인의 가녀린 어깨 라인마냥 화순 길의 곡선은 유려하다.
ⓒ 정동묵
북쪽인 북면에서 남쪽인 남면과 한천면, 능주면, 춘양면 등지를 구경하려면 족히 대여섯 시간은 차로 달려야 한다. 드라이빙을 좀 즐길 줄 안다면 달리는 그 자체를 여행의 일부로 편입시켜도 좋을 만큼 화순의 길은 색다른 맛이 있다. 연인 시샘하는 솔로처럼 오도카니 서서 눈 흘기는 나무며 개울, 들꽃들의 눈초리만 감당할 자신이 있으면 된다.

한천면의 한천자연휴양림이나 남면에 있는 사평휴양림도 들러볼 만하다. 사평휴양림 인근에는 사평폭포가 있어 가을의 정취를 더욱 느낄 수 있을 듯하다. 능주면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인돌 군락과 정암 조광조 선생의 유배지가 있다. 관광단지로 한창 단장 중인 사적 제410호 고인돌 군락은 총 66만3천여 평의 광대한 대지에 기원전 5~6세기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지석묘가 약 1천여 기 펼쳐져 있어 장관을 이룬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대표적인 정치 개혁가였던 정암 조광조 선생에 대해 조금이라도 애정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능주면 소재지에 있는 선생의 유배지는 찾아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건물만 다독여서 추슬러 놓았지 방치되다시피 한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집 앞엔 각종 쓰레기며 건설 중장비들이 널브러져 있어 유적지다운 면모는 더욱 찾을 길이 없다. 조선 중종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이 곳에서 생을 다한 선생의 모습을 그려보면 이럴 수는 없다.

▲ 화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가사문학관 진입 터널에선 조롱박이 평화롭게 익어간다.
ⓒ 정동묵
조금만 더 달려 화순의 남단 도암면 대초리로 가면 와불로 유명한 운주사가 있다. 왕건의 삼국통일을 예견했던 도선국사가 하루 밤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불가사의한 전설이 전해지는 신비의 절 운주사. 지금도 석탑 17기와 석불 80여기를 비롯해 절 주변 곳곳에 크고 작은 석불과 탑들의 흔적들이 산재해 있어 천불천탑의 존재를 뒷받침하고 있다.

산 중턱에는 와불이 있는데, 이 "와불이 일어나는 날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전설이 있다고. 여느 산사와는 아주 판이한 느낌이다. 그런데 나는 이 절 매표소의 문지기와 한판 다투는 바람에 그만 감상할 기분을 잡쳐버리고 말았다. 어느 명소를 가거나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이들은 참지 못하는 고질병 때문이었다.

1박 2일의 여정이 부족했다. 워낙에 넓기도 넓은 땅이기도 하거니와, 첫날 본분을 망각하고 산과 물 그리고 바람과 노느라고 시간을 지체한 까닭이기도 했다. 그래서 솔직히 화순의 남쪽은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이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보다 더 철저한 계획이 있어야 할 듯.

초가을의 그 곳은 옐로그린 천지였다. 익어가는 논의 벼와 밭의 콩, 고구마, 팥 등속은 내남없이 황금빛 그린이다. 그 속에서 일하고 노래하며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살이의 풍경들. 자신의 삶을 무장 해제한 채 있는 그대로 '인간답게' 살아가는 화순사람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정녕 잊혀지지 않을 듯 싶다. 이 것이 바로 웰빙이 아니던가.


 

덧붙이는 글 | 화순 가는 길

분당에서 화순으로 드는 길은 두 갈래다. 하나는 호남고속도로 동광주나들목에서 광주광역시 제2순환도로로 접어든 다음 소태나들목에서 29번 국도를 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광주나들목에서 조금 더 달리면 나오는 고서나들목에서 887번 지방도를 타는 것이다. 

둘 중에는 후자를 권하고 싶다. 전자는 너릿재터널만 지나면 바로 화순읍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887번 지방도를 타면 담양의 식영정과 가사문학관, 소쇄원 등 선조들이 맛보았던 풍류를 훨씬 더 진하게 감상하면서 화순으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화순의 북면 화순온천부터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이 글은 <월간 소프트> 9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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