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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희
갑자기 여름이 사라졌다. 올해는 이상한 해다. 지루하게 겨울이 길더니 봄이 여느 해보다 20여 일이나 늦장을 부리고 나타나질 않나, 더위가 가실 날이 됐는데도 무더운 정도가 아니라 살갗이 데일 만큼 뜨거운 용광로 같은 태양이 퍼붓질 않나.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선선한 가을로 변한 온도가 사람을 계속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날씨가 미쳤어, 미쳤어."

비 맞은 땡중처럼 혼자 중얼중얼대면서 갑자기 변한 기온에 잠바를 걸치고 강근숙 씨가 자기대신 근무해 달라는 공릉으로 향했다. 영릉을 가는 도중 시냇물 흐르는 소리에 발길을 멈추고 들여다봤다. 일주일 전까지 아이들이 옷을 흠뻑 적시고 뛰놀던 냇물이 갑자기 차가워 보인다. 숲과 풀은 초록으로 여름인데 정녕 가을이란 말이지?

ⓒ 한성희
수요일(24일) 들어선 공릉은 적막이 느껴지며 고요했다. 재잘거리던 여름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평일이라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한숨을 쉬며 인적 없는 영릉에 서서 눈길을 한 바퀴 휘둘러본다. 주로 사람들이 붐비는 주말에만 나오기 때문에 평일에 공릉에 와보기도 오랜만이라 이것도 적응이 안 된다.

귀를 따갑게 울리던 매미 소리도 어디론가 사라져서 두어 마리가 겨우 '맴맴' 시늉만 내고 있다. 공릉 입구 매미들의 합창은 시끄럽다 못해 도망을 쳐야할 만큼 공릉이 떠나가라 악을 썼었다. 유난히 입구에 매미들이 떼를 지어 모여 사는지 합창을 할 때면 관리사무실 사람들은 전화 통화를 못할 정도로 시끄러웠다. 매미 소리에 시달리다 못해 오죽해야 휴지로 귀를 틀어막기까지 했을까.

그 소리를 견디다 못해 나는 곧잘 능 안으로 달아나 버리곤 했다. 그런데 매미 소리도 하루아침에 없어지다니. 듣기 싫다고 나무 위를 한 번 흘겨보고 능 안으로 도망가던 것도 매미에게 미안해진다.

ⓒ 한성희
냇가의 물소리가 차갑게 들리는 것도 괜히 심술이 났다. 그래도 가을이 온다는 신호를 보내서 계절이 바뀌는 적응기간은 줘야 하는 거 아냐? 이왕 온 가을인데 그렇다면 가을을 찾아보지 뭐.

영릉을 들러 순릉 숲으로 들어갔다. 잠자리들이 무수히 날아다닌다. 오늘은 카메라 렌즈에 잠자리를 담아봐야지. 도토리거위벌레가 올해도 어김없이 상수리에 알을 낳고 가지를 싹둑싹둑 잘라 내던지고 있다. 길을 걷다보면 위에서 가지들이 툭툭 떨어진다.

ⓒ 한성희
날아다니는 잠자리가 쉬는 틈을 타서 카메라를 들이대지만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잠자리 날개 같은 잠옷'이라더니 잠자리의 투명한 날개는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는 유혹이다. 숲을 헤매면서 잠자리를 쫓아다니다가 모기에게 턱과 팔목을 두 방 물렸다. 설마 이 숲에 말라리아 모기는 없겠지. 방정맞은 걱정을 하면서 턱을 긁으니 이내 부어오른다.

잠자리만 찍겠다고 작정하고 들어간 숲에서 모기에게 물리고 돌아 나오면서 뭔가 미진하다는 걸 느꼈다. 요즘 공릉 뒤에 있는 숲길을 20일 가량 들어가 보지 못했다. 여름 더위로 하루가 다르게 자란 풀들이 길에 수북이 올라와 그 풀을 헤치고 들어가기가 힘들다. 하필이면 숲길 입구에 유난히 솟아 있는 바람에 더욱 들어가기 어려웠다.

ⓒ 한성희
그러나 사실은 그 이유 때문은 아니다. 20여일 전 놀란 가슴에 발길을 끊고 말았다. 공릉에 오면 으레 발길을 공릉 뒤로 향했고 그날도 습관처럼 숲길로 들어섰다. 풀을 헤치고 들어서서 잡초가 없는 길까지 왔을 때였다. 길가에서 뭔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또아리를 틀고 고개를 쳐들고 있던 커다란 뱀이 인기척에 스르르 또아리를 풀더니 기어가는 게 아닌가! 머리에서 목덜미까지 얼룩덜룩 새빨간 무늬가 도드라지는 징그러운 뱀이었다. 둥그런 몸통을 가진 뱀이 땅 위에 엎드리면 저렇게 납작해질 수도 있다는 걸 처음 보았다.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보는 잠깐 사이에 뱀은 풀 사이로 사라졌다.

뱀을 봤으니 산책이고 뭐고 숲을 감상할 기분이 아니었다. 되돌아오는 길에 두리번거리며 뱀이 나타날까 겁을 잔뜩 먹고 살금살금 걸어가는데 풀 사이로 뱀 꼬리가 사라지는 게 또 보이는 게 아닌가. 이 숲이 뱀 소굴인가 보네. 저 잡초 사이를 어떻게 도로 지나간담? 뱀이 잡초 속에 숨어 있다가 발목을 물면…. 으악! 상상만 해도 간이 바짝 졸아든다.

막대기를 하나 주워들고 탁탁 땅바닥을 치면서 걷기 시작했다. 소리를 내면 지가 도망가겠지. 잡초가 수북히 길을 메우는 짧은 구간을 지나오면서 미친 듯이 막대를 휘둘렀다. 진땀을 흘리면서 그곳을 탈출한 뒤 다시는 근처에 얼씬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했더니 관리 아저씨는 꽃뱀은 독이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물려봐야 독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독이 없다 해도 제 대가리보다 더 크게 아가리를 크게 벌린 뱀의 날카로운 이빨에 내 발목을 물리긴 싫다.

ⓒ 한성희
그 뒤에 순릉 숲으로 코스를 바꿔 들어오곤 했지만 공릉 숲길만큼 만족스럽진 않았다. 뭔가 미진한 것이 바로 오랫동안 공릉 숲길을 가지 못해서 몸이 근질거리는 이유였다.

방법이 없을까? 길에 수북한 풀만 없다면 들어갈 수 있을 텐데. 해설사 사무소에 앉아 머리를 굴리다가 벌떡 일어나서 관리사무소로 향했다. 마침 정 주사는 없고 이 계장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공릉 숲길에 돼지풀 있던데 그거 안 베어버릴 거예요?"
"아, 그거 벨 거예요."

숲길을 다니다가 돼지풀이 수북하게 돋아난 것을 봤었다. 내 속셈은 외래종 잡초인 돼지풀을 베어버리는 김에 숲길 입구의 잡초도 함께 잘라버릴 것이고 그러면 길을 다닐 수 있겠다는 잔머리 굴리기였다.

"유적지에 외래종 돼지풀이 있음 안되잖아요. 그거 땅을 산성화시키고 토종 풀들을 못 자라게 한대요. 씨가 맺기 전에 빨리 없애야 해요."
"해마다 그거 제거 작업해요. 정확히 어딘 데요?"
"공릉 뒤로 들어가는 길 있잖아요. 풀이 수북히 난 입구에서 조금 들어가다 보면 왼쪽에 있어요. 지난번에 정 주사님에게 말했는데 한꺼번에 한다고 하든데 아직 안 했나봐요. 아참, 영릉 뒤 소나무 묘목 심은 데 자리공도 있더라. 그것도 빨리 잘라버려야 해요. 씨가 맺혔던 걸요?"
"내일부터 작업할 거예요."

아이구 좋아라, 그럼 다음부터 공릉 숲길 들어갈 수 있겠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물론 나는 꽃뱀 이야기는 한 마디도 안하고 못된 외래종 잡초 돼지풀과 자리공 타령만 하다 나왔다.

▲ 물봉선화
ⓒ 한성희
오후가 되자 관람객이 드문드문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시 영릉과 순릉을 한 바퀴 돌다가 냇가를 지나치다 물봉선화가 여기저기 피어 있는 걸 보았다. 벌써 물봉선화가 진분홍 꽃을 달고 나오다니. 가을이 오긴 오나 보다….

하늘이 잔뜩 흐리고 매미소리가 갑자기 사라진 걸 보니 이내 비가 올 것 같다. 매미는 극성스럽게 울다가도 비가 오기 직전에 울음을 딱 멈춰버린다. 이 비가 쏟아지고 나면 가을을 맞아들이는 계절적응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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