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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소년이 유유히 흐르는 톨가 강을 건너고 있습니다. 등자에서 발을 빼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별 망설임도 없이 성큼 성큼 물장구를 치며 건너가는 말의 모습에서 말과 얼마나 가깝게 지내는지는 쉽게 알수 있습니다. 자신이 말을 사랑한 만큼 말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그 동안 한국의 마(馬)문화 이야기라는 주제로 연속 기사를 쓰면서 말에 대한 여러 가지 부분에 대한 관심이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본인이 마상무예를 수련하기에 말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 더욱 그러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의 말 문화를 공부하다 보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몽고마에 대한 내용입니다. 과거 몽고의 침입 때 우리나라의 제주도에 마장을 건설하여 한반도에 계속적으로 말을 공급하고 그것을 통제수단으로 삼으려 했던 역사가 있기에 몽고마에 대한 이야기는 고려시대의 전쟁사를 언급할 때도 아주 재미있는 소재로 사용되곤 합니다.

▲ 몽골의 말몰이꾼이 긴 장대를 이용하여 초원에서 말을 이끌고 있습니다. 보통 기마군단의 맨 앞은 장창기병으로 채워지는데, 기병의 강력한 충격력과 긴 장창으로 무장하면 상대의 진을 보다 쉽게 파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 사진 속에서 몽골 장창기병의 옛 모습이 묻어 나옵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이러한 이유로 그 머나먼 몽골까지 말을 만나러, 태어나서 처음 해외출장을 가야만 했습니다. 몽골 문화 속에서도 말은 그 존재가 특별하리만큼 역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과거 광활한 대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즈칸을 만든 것도 실은 몽고마를 이용한 기마군단이었습니다.

▲ 말을 타고 온 몽골청년이 강가에서 세수를 하고 있습니다. 세수하기전 말의 목을 먼저 축이고 그 다음에 자신이 세수를 합니다. 그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개는 무슨 생각을 할까요? 몽고에서는 개 또한 충실한 목동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몽고마는 기원전 6000-5000년 전부터 중앙아시아에서 가축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재까지도 바위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 약 기원전 3000년 전의 말 기르는 모습이 나타나곤 합니다.

고대 몽골인들 또한 드넓은 초원을 물과 풀을 찾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유목생활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말이라는 동물이 그 엄청난 이동거리를 책임지는 좋은 운송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과거 몽골인들은 '마상생 마배장(馬上生 馬背長)'이라는 말처럼 말 위에서 태어나 말에서 자라고 말 위에서 죽는다고도 볼 수 있었습니다.

▲ 아주 간편하게 만들어진 고삐를 입에 물고 있는 몽고마의 모습입니다. 몽골에서는 일반적인 호마의 양 갈래 고삐에다가 채찍처럼 쓸 수 있도록 좌측에 또 한 개의 끈이 달려 있습니다. 서양의 호마만을 타본 사람이라면 이 부분도 무척 생소할 것입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몽고마가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흉노족, 즉 훈족의 등장입니다. 훈족은 등자에 두 발을 딛고 서서 활을 전후좌우로 자유롭게 쏘았으므로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는 등자 사용의 개념이 없어서 심지어 페르시아의 왕자가 말을 타다가 떨어져 죽는 일이 발생할 정도였습니다. 중국 또한 몽고마의 위력을 막아 보기 위하여 전국시대에 연(燕)·조(趙)·진(秦) 등에서 성을 쌓아 방어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성을 진시황이 연결하여 만리장성이라는 엄청난 장성으로 확대 개편했던 것입니다.

▲ 몽고마 두 마리가 편안하게 휴식을 즐기고 있습니다. 이처럼 몽고마는 두 마리, 세 마리가 서로 엉켜 고개를 부비거나, 서로의 등에 고개를 올리고 쉬는 경우도 있습니다. 서양 호마에게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데, 서양 호마에게 다른 말이 고개를 얹으면 바로 뒷발로 찹니다. 이 또한 초원에서 함께 의지하며 살아가는 몽고마의 독특한 행동양식일 것입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몽고마의 특징을 서양의 호마와 비교하여 살펴보면, 키는 서양의 호마가 몽고마보다 훨씬 키가 큰데, 몽고마는 서양의 말보다 지구력과 급회전 능력이 뛰어나고 쉽게 놀라지 않아 전투 시에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서양말은 몽고마에 비해 관절이 약하고 발굽에 쇠편자를 신고 달리므로 급회전이나 급제동력이 몽고마에 비해 현저히 뒤떨어집니다. 이런 이유로 풀이 자라난 초원에서는 몽고마와 서양의 호마는 절대적인 차이를 나타내게 됩니다.

▲ 몽골 초원을 다니다 보면 사람보다는 말을 보기가 쉽습니다. 몽고마도 피곤하면 이렇게 누워서 쉬기도 합니다. 백마, 흑마, 얼룩마 정말 수 많은 색깔의 말들이 모여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이렇게 몽고마가 서양의 말보다 우수한 전투력을 소유하게 된 것은 드넓은 초원에서의 방목을 통해 눈이 오든 비가 오든 군집을 이뤄 유목민들과 함께 초원을 누비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서양말의 경우 호마라고 불리는데, 망아지 상태부터 개별관리가 이뤄져 사람들의 보살핌 속에서 살았기에 환경 적응력이 몽고마에 비해 뒤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몽골기병의 가죽으로 만든 경갑옷과 특별한 보급부대 없이 전투병 스스로 일정 보급품을 각자 운송했기에 몽골 기마군단은 엄청난 위력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전투에서나 유목 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이 말이었기에 몽골인들의 말에 대한 생각은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몽골에서는 '마나이째날' 즉 마유제(馬乳祭)가 있는데, 이는 일종의 말 성년 의식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망아지가 커서 젖을 떼고 스스로 초원에서 뛰어 다닐 수 있는 것을 사람처럼 의식화한 것입니다.

▲ 저 멀리 나담축제에 참가하여 그림처럼 달리고 있는 몽골의 아이들입니다. 나담축제에서 우승한 아이들은 가문의 영광으로 자랑할 만큼 나담축제에서의 말 경주는 몽골인들에게 아주 뜻깊은 행사입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그리고 현재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나담(Nadam Fair, 那達慕)에서도 말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나담은 몽골말로 유희 혹은 축제로 군사적 승리를 축하하기 위하여 벌인 종교적 의미에서 그 시작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문헌을 살펴보면 1차 나담은 1225년 칭기즈칸의 석문 기록에 소개되어 있는데, 화자자모(花刺子模)를 패배시킨 후 승전을 축하하기 위하여 나담 축제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고 합니다. 현재의 나담축제는 외몽골을 중심으로 본다면 양력 7월 11일의 몽골혁명기념일을 전후하여 실시합니다. 현재 약 800회를 맞이하는 역사 깊은 축제라 몽골인들도 상당한 자부심을 갖는 행사입니다. 몽골에서는 말 경주를 새마(賽馬)라고 하는데 나담축제에서 가장 뜻 깊은 행사로 5~7세의 어린이들이 참여합니다.

▲ 나담축제 중 말 경주에 참가할 말의 꼬리 부분입니다. 이처럼 꼬리를 동여맨 이유는 달리는 동안 말꼬리 털조차도 바람의 저항을 줄이기 위함입니다. 심지어 말의 머리털을 밀어버리고 상투처럼 조그맣게 남겨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꼬리만 보더라도 나담축제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나담축제에서 말 경주는 2년생부터 6년생 말로 각각 구분해서 실시하는데, 각 대회에서 우승한 말에 붙이는 명칭 또한 각각 다릅니다. 2년생 대회에서 우승한 말은 '다아가', 3년생은 '수드렝', 4년생은 '햐잘랑', 5년생은 '서얼렁', 6년생은 '이흐나스'라고 불립니다. 또한 2년생 말이 우승한 후 해마다 나가 차례로 우승하면, '투루막라이'라는 칭호를 붙이는데, 몽골에서도 아주 드문 경우지만 이 말은 거의 신성시되어 사람들의 경배를 받게 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나담축제에서는 씨름, 활쏘기 등도 함께 진행되는데 이는 유목민들에게 꼭 필요한 세 가지의 기본군사훈련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 몽고마와 함께 자유롭게 지내고 있는 몽골의 소년들입니다. 천진난만한 모습이 꼭 저의 어릴 적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이 아이들과 5km 정도 말 경주를 하였는데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를 냈습니다. 4살부터 거의 매일 말을 탔다고 하니 벌써 10년이 넘는 초고수 승마인이었습니다. 내년에는 기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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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나담축제와 더불어 몽골의 마문화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마두금(馬頭琴)이라는 몽골 전통악기입니다. 마두금의 모양은 우리나라의 현악기와 비슷한데 목 부분에 말머리를 조각하여 장식한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마두금은 슬픈 전설을 가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7세기에 목동인 '쑤허'가 버려진 백마를 잘 길러 훌륭한 말로 키웠습니다. 그때 임금은 경마대회를 열어 1위를 한 사람에게 자신의 딸을 주어 사위로 삼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쑤허'가 그 백마를 타고 일등을 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쑤허'가 미천하다고 여겨 약속을 파기하고 백마를 빼앗아 버렸습니다. 이후 백마가 도망을 쳐 '쑤허'의 집 앞에서 숨이 끊어졌는데, 꿈속에서 백마가 나타나 자신의 힘줄과 뼈로 금(琴)을 만들라고 하여 '쑤허'는 마두금을 만들었습니다. 그 후 마두금을 치면서 백마와 그의 안타까운 영혼을 달랬는데, 임금에 대한 원한과 백마에 대한 그리움이 진할수록 마두금의 소리가 영롱하게 초원을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이 전설은 마두금의 애절한 소리에 얽힌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몽골에서는 거의 모든 설화나 이야기에 말이 거의 빠짐없이 들어있는데, 몽골인들은 말을 삶의 동반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 말안장도 없이 두 몽골 형제가 말을 타고 있습니다. 형은 말 고삐를 잡고, 동생은 형 허리를 잡고 보기만 해도 흐뭇한 형제애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몽고에서는 작은 소년들이 함께 말을 타고 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결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일 것입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이처럼 몽골인들은 말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마치 가족처럼 그들을 보살핍니다. 그런데 몽골어로 '호르똥 호르똥'은 우리나라 말로 '빨리 빨리'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이 몽고말을 타고 '호르똥 호르똥'하는 모습을 보면 무척 싫어하며 '오땅 오땅'(천천히 천천히)이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됩니다. 아무리 체력이 강한 몽고마일지라도 여름에 심하게 말을 부리면 겨울의 혹한을 이기지 못하고 말이 죽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칭기즈칸을 위시한 몽골제국의 기마군단은 이러한 말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 역사상 유래 없는 대제국을 건설했는지도 모릅니다.

첨부파일
bluekb_240477_7[1].MPG

덧붙이는 글 | 푸른깨비의 몽골문화 답사기는 총 8편으로 자연, 들꽃, 마상무예, 역사, 생활 등으로 연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마문화 이야기는 약 20편의 연재기사로 함께할 예정입니다.

최형국 기자는 무예24기보존회 마상무예단 '선기대'의 단장이며, 수원 무예24기 조선검 전수관장입니다. 중앙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으로 몸철학과 무예사를 공부하며 홈페이지는 http://muye.ce.ro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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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의 역사와 몸철학을 연구하는 초보 인문학자입니다. 중앙대에서 역사학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경기대 역사학과에서 Post-doctor 연구원 생활을 했습니다. 현재는 한국전통무예연구소(http://muye24ki.com)라는 작은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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