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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덕여관 전경
ⓒ 이정근
1896년. 김일엽과 같은 해에 경기도 수원에서 부유한 관료의 집안에서 넷째 딸로 태어난 나혜석은 서울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에 유학, 유화를 공부한다. 유학시절 오빠 친구인 게이오 대학생 최승구와 열애에 빠졌고 결핵을 앓던 최승구가 사망함으로서 그들의 관계는 막을 내리지만 첫사랑 최승구는 나혜석의 뇌리에 영원히 각인된다.

귀국 후 내청각에서 여성화가 최초의 개인전을 열며 왕성한 그림 활동을 하는 한편 동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폐허> <삼천리>를 비롯한 신문 잡지에 칼럼을 기고하는 등 신여성으로서 맹렬하게 활동하였다. 이때 춘원 이광수와 교분을 쌓는가 하면 1919년 김마리아 등과 함께 3·1운동에 여학생 참가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 수덕여관 안마당. 인적이 끊긴 여관엔 잡초만 무성하다
ⓒ 이정근
1920년. 그의 나이 24세 때 부유한 집안의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 김우영과 정동 예배당에서 결혼한다. 결혼의 전제조건이 지금 생각해도 첨단적이고 도발적이다. 나혜석은 그의 첫사랑 최승구의 비석을 세워줄 것을 요구했고 혜석과 결혼하기에 급급했던 김우영은 그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여 신혼 여행지를 최승구의 무덤이 있는 전남 고흥으로 정하여 비석을 세워줬다.

나혜석은 이듬해 첫딸 선(宣)을 낳은 후 26년 아들 진(辰)을 낳고 남편 김우영과 세계 일주여행에 나선다. 1927년 6월 19일 부산항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7월에 파리에 도착한 혜석은 남편 김우영이 법률 공부하러 독일 베를린으로 떠났지만 파리에 머무르며 야수파 비시에르에게 사사받는다.

여기에서 문제가 터졌다.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로 천도교 교령이던 최린(崔隣)이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을 때였다. 한국 유학생들이 주최한 환영회에서 최린을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빠져버린 혜석은 불타는 사랑에 빠진다. 이러한 염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김우영이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는 것으로 그들의 사랑은 막을 내릴 수 있었지만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생활을 청산하는 이혼의 빌미가 되었다.

▲ 수덕사 대웅전 석축에 몸을 의지한 이름모를 풀 2포기. 한많은 두 여자의 넋이련가
ⓒ 이정근
남편과 함께 파리를 떠난 나혜석은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도착, 미 대륙을 횡단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하와이 경유하여 태평양을 건너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다. 도쿄에 잠시 머무른 후 일본을 출발 부산에 도착함으로서 그들의 세계 일주여행은 끝났지만 파리에서의 최린과 나혜석의 만남은 사랑이었지만 남편 김우영에게는 아내의 스캔들이었으므로 결혼생활은 파탄의 시작이었다.

귀국 이듬해 셋째 아이 건(健)을 낳았지만 남편 김우영과 결혼 당시 '나만을 사랑한다'는 전제조건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고 새로운 여자와 신접살림을 꾸린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창살 없는 감옥이었고 지옥이었다.

애정 없는 결혼생활은 인생의 낭비라고 결심한 혜석은 1930년 가을 김우영과 이혼하고 '이혼의 비극은 여성해방으로 예방해야 하고 시험결혼이 필요하다'라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칼럼을 <삼천리> 잡지에 기고하여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 창호가 찢어진 수덕여관
ⓒ 이정근
이때 비로소 육(肉)과 영(靈)이 결합하는 사랑이 지고지순한 사랑이라는 낭만적 사랑론에 머물러있던 여자(女子) 나혜석이 육과 영이 분리된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열정적 사랑을 찬미하는 섹슈얼리티 여성(女性) 나혜석으로 재탄생했음을 그 당시 신문사 문화부에 있던 여기자와 오간 서간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동생은 아직도 연애가 무엇인지 모르는 모양이로군! 서로 눈동자만 바라보고 앉아서 좋기는 뭣이 좋아, 수박 겉핥기지, 육체의 신비를 모르는 것은 연애가 아냐…… 그런 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요, 연애를 하는 그 순간에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야, 나는 지금도 그 때 생각만 하면 미칠 것만 같아, 이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사람같이 바보는 없을 거야...

뿐만이 아니다. '삼천리' 잡지에 기고한 <이혼 고백장>에서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오. 오직 취미다. 밥먹고 싶을 때 밥먹고 떡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거와 같이 임의용지(任意用志)로 할 것이오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글을 발표하며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정조관념을 통렬히 비판함으로서 사회적인 논란을 일으켰다. 나혜석, 그녀의 사회 인습에 대한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서양에나 동경 사람쯤 하더라도 내가 정조 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이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의 정조를 유인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종종 방종한 여성이 있다면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 말살시키고 저작(詛嚼)시키는 일이 불소하외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

▲ 수덕여관 목 간판. 고암 이응노 작품이다
ⓒ 이정근
이혼에 대한 상처를 씻으려고 일본에서 그림공부에 몰두하던 혜석은 일본 동경에서 열리는 제전(帝典)에 출품하기 위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그림을 그려 제 12회 제전에서 입선하고 다시 귀국하여 선전(鮮典)에 출품하기 위하여 금강산과 해금강을 주유하며 그림 공부에 열중하지만 "육체의 신비를 모르는 것은 연애가 아냐"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나혜석이기에 그림공부에 몰입할 수 없었는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이때, 이혼의 아픔을 극복하려고 그림 그리기에 전념하는 한편 신문 잡지에 여성 인권신장을 위한 칼럼을 기고하던 혜석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자신에게 성(性)을 가르쳐준 최린을 상대로 '유부녀의 정조를 유린했으니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지방법원에 소를 제기한다. 조건 없는 열정적인 사랑을 주장하던 혜석으로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였다.

경성 장안에 화제를 뿌리며 조롱거리의 주인공으로 전락한 혜석은 문제가 확대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최린측의 제의로 사건을 합의하고 종결하지만 혜석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린 딸과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병이 되어 신경쇠약과 손이 떨리는 수전증까지 찾아와 병든 몸을 이끌고 전국을 유람하다 수덕여관에 찾아온 것이다.

만공선사로부터 중이 되는 것마저 거절당한 혜석은 수덕여관에 머물면서 중이 되게 해달라고 1인 시위를 하는 한편, 붓 가는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찾아온 젊은이가 있었으니 그 사람이 화가 이응노다. 그림에 대한 열정이 불타고 있던 청년 이응노에게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둘도 없는 선배이자 스승이었다.

▲ 뒤뜰에 있는 고암 이응노 작품. 문자를 추상화 기법으로 형상화 했다
ⓒ 이정근
여기에서 잠깐, "육체의 신비를 모르는 것은 연애가 아니야"라고 거침없이 주장하는 나혜석과 청년 화가 이응노가 깊은 산속 여관방에서 만나 숙식을 같이 하고 있으니 육과 영이 하나 되는 모종의 사건이 있지 않았을까? 호기심이 발동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노랑(老郞) 팔자를 가진 여자는 연하의 남자(男子)를 남성(男性)으로 보지 않는다.

나혜석의 첫 남편 김우영과 20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며 혜석이 상대한 남자들이 대부분 10살 이상 차이가 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노랑 취향의 여자에게 있어서 연하의 남자는 상대하고 싶지 않은 풋내기 머슴아일 뿐이다. 더구나 상대는 연하의 소녀 취향을 가지고 있는 이응노이었기에 더더구나 불이 지펴지지 않았다.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버린 이응노는 나혜석이 이곳을 떠날 무렵 1944년 아예 수덕여관을 사버리게 된다. 혜석으로부터 꿈에 그리던 파리 생활과 그림 이야기를 들은 이응노는 훗날 21세 연하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버리고 홀로 남은 그의 본부인 박귀희가 여관을 운영했으나 그마저 2001년 사망함으로서 폐허가 되어버렸다.

뒤뜰을 돌아보니 고암 이응노가 1967년 동백림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후 심신을 추스르기 위하여 머물렀을 때 자연석 너럭바위에 문자를 추상화 기법으로 암각화(岩刻畵)한 작품이 뒷마당을 지키고 있었다. 그 바로 옆에는 당시에 식수로 이용했던 우물이 폐수에 썩어가고 있었다. 역시 샘물은 퍼내야 새로운 물이 고이나 보다.

▲ 굴뚝을 뒤덮은 담쟁이 넝쿨. 더 오를곳이 없어 하늘을 향해 춤을 추고 있다.
ⓒ 이정근
만공선사로부터 중이 되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느낀 혜석은 수덕여관을 나와 공주 마곡사에서 수도생활 아닌 수도생활을 하면서 잠시 머물다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니게 된다. 안양 양로원을 거쳐 청운 양로원에 기거하던 혜석은 양로원 생활이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음인지 양로원을 뛰쳐나와 길거리를 헤매다 배고픔과 추위에 쓰러져 서울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눈을 감았다. 그때가 1948년 12월 10일이다.

ㄷ자형 초가집 수덕여관 안마당에는 이름 모를 잡초가 자라고 있고 굴뚝이 높이 솟아있다. 재래식 구들장을 깔은 여관방을 덥히기 위한 난방용 굴뚝이리라. 그 굴뚝을 타고 올라가던 담쟁이 넝쿨이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어 허공에서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었다. 어쩌면 더 이상 오를 곳을 찾지 못해 좌절한 혼백(魂魄)이 하늘에서 내려와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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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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